[단박 인터뷰]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
올해는 광복 70년이 되는 해다. 그러나 그 시간은 “‘친일파의 계승자’와 ‘군부독재의 계승자’가 지배해 온 70년”이란 평가가 과하지 않다. 이 평가는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다.
<친일인명사전>과 <백년전쟁> 등 지난 70년의 역사를 바로잡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온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을 만났다. ‘역사’에 대해 물었더니, ‘정치’에 대해 답했다.
‘친일’을 청산하지 못한 과오는 ‘파렴치한 정치’로 현재화되고, 결국 역사와 상식의 엄청난 차이를 가져와 국민 개개인의 삶에 박혀 버렸다. “정치인들은 국민들 눈물 닦아 준다 말하지 마라, 내가 더 울리겠다고 해라”라는 임 소장의 통탄은 세월호 참사 직후 기자회견을 하며 떨군 박근혜 대통령의 ‘눈물’을 떠올리게 한다.
“답은 하나밖에 없다”고 임 소장은 강조한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람이 정치를 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100년 전쟁’이 자칫 ‘200년 전쟁’이 될 수도 있다고 임 소장은 힘주어 말했다.
다음은 지난달 31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진행된 임 소장과 인터뷰 전문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 ⓒ 프레시안(손문상)
친일·군부 계승자가 통치, 파렴치하다
프레시안 : 한국 현대사에 있어 1945년 8월 15일이 갖는 의미가 크다. ‘광복 70년’의 시간을 정리한다면?
임헌영 : ‘친일파의 계승자’와 ‘군부독재의 계승자’가 지배해 온 70년이다. 독재는 민간독재(이승만 정권)과 군부독재(박정희 정권)가 모두 해당한다.
‘계승자’란 의미는 조상이 친일파가 아니어도 친일을 옹호하는 사람을 포함한다. 생물학적으로 관계가 없어도, ‘원조 친일파’나 ‘원조 독재자’보다 더 철저하게 계승한 후계자들이 있다. 한국 사회는, 어쨌거나 그들이 지배해 온 사회다.
그런 사람들이 지배하다 보니, 인간의 기본적인 윤리 의식과 가치관이 파괴됐다. 한마디로, ‘파렴치(破廉恥)’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 정치인이 딱 떠오르지 않나. 얼마나 파렴치한가.
프레시안 : 친일파와 군부독재 치하에서 70년을 보냈다는 건데, 그동안 한국 정치가 어떤 역할을 했다고 보나.
임헌영 : 일제 식민체제와 독재체제의 삐뚤어진 통치 철학이 계승돼 만들어진 게 현재다. 오늘의 정치를 한마디로 하면, ‘국민들의 눈물을 씻어준다고 말은 하면서 국민을 더 서럽게 만드는 것.’ 여야가 똑같다. 진보세력도 도긴개긴이다. 국민들의 눈물을 닦아 준다는 교언영색(巧言令色)을 하면서 뒤에서는 국민을 더 울게 하는 게 오늘의 정치다. 이런 통치 철학 밑에서 살다 보니, 국민 상당수도 파렴치해졌다. 선(善)함에 대한 판단이 없어졌다.
또 기형적 자본주의다 보니, 돈의 위력·권력의 위력·폭력의 위력 등 인간이 가진 모든 힘의 위력이 어떻게 보면 8.15광복 직후보다 더하다. 권력과 돈의 힘이 너무 의기양양하다.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없다. 결국 국민도 권력과 돈이라는 최면에 걸려 파렴치한 인간이 더 많아졌다. 대단히 걱정스럽다.
아무리 민주주의여도 국민의 밥줄은 정치적 결정에 영향을 받는다. 그렇지 않나. 실력은 있는데 등록금이 없어 대학에 못 가면 누가 해결해 줄 수 있나. 학생 본인도, 부모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선진국은 국가가 그런 문제(복지)를 해결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왜 못하나? 정치인이 파렴치하기 때문이다.
“(일부 젊은층이) 정치는 나와 관계없다. 공부만 하면 된다”고 하는데, 아무리 공부해 봤자 일생 동안 고생만 하게 되어 있다. 인문학을 공부한다고 한들,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결국 정치가 다 해결한다. 학자들이 아무리 떠들어도 정치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이다. 정치를 바꾸지 않으면, 정치인의 머리가 바뀌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불행하다.
ⓒ프레시안(손문상)
“‘눈물 닦아 준다’ 말하지 마라”
프레시안 : 정치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데 동의한다. 대한민국 사람들의 자존심 중 하나가 ‘우리 손으로 민주화를 이뤘다. 평화적으로 정권 교체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10년간의 민주 정부 이후, 보수 정권이 들어서면서 과거로 회귀했다.
국민의 입장에서는 정치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선거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가’에 의문을 가진다.
임헌영 : 우리는 20세기 후반부터 혁명할 수 없는 불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걸 인정해야 한다. 정치를 바꿀 수 있는 건, 선거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선거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권력을 잡고 있는 국회의원의 배지를 뗄 수 있나, 뽑힌 대통령을 끌어내릴 수 있나. 불가능하다. 국민이 할 수 있는 건 오직 선거밖에 없다.
국가와 이웃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해도, 선거 한 번 잘못하면 그만이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박근혜 정부를 아무리 비난한다고 한들, 달라지는 게 있나. 그럼에도 국민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주는 건 정치권력뿐이다. 제대로 된 정치권력을 세울 수 있는 방법 또한 선거밖에 없다. ‘동학 농민 혁명’처럼 삽 들고 곡괭이 들고 할 수도 없지 않나.
2012년 대선에서 야당 정치인이 앞장서서 잘했으면, 결과는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반성하지 않는다. 지금도 여전히 ‘잘했다’고 하고 있다. 이런 상태로 또 2017년 대선을 맞게 되면, 표를 많이 얻고도 실질적인 권력은 빼앗길 것이다.
당장 4.29재보궐 선거에 출마한 정동영(서울 관악을)·천정배(광주 서구을) 후보 모두 자신이 승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광복 이후 70년 사(史)를 훑어보기 바란다.
1963년 10월 15일 시행된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가 윤보선 후보를 역사상 가장 근소한 15만 표 차이로 이겼다. 그런데 개표 방송은 16일 낮 3~4시까지도 윤보선 후보가 앞선다고 했었다. 당시 정민회 변영태 후보가 22만 표를 얻었다. 적지 않은 표다. 달리 말하면, 국민들은 박 후보에게 표를 주지 않은 것이다.(☞참고 기사 : 황태성 넘겨 얻은 밀가루, 박정희 당선 ‘숨은 공신’?)
그 뒤에도 마찬가지다. 1979년 10.26사태 후, 김대중·김영삼·김종필(DJP) 후보 중 누가 대통령이 돼도 무리가 없었다. 그때 세 사람이 힘을 합쳐서 ‘국민들을 더 이상 혼란스럽게 하지 말고 올바른 민주주의 세우자. 지금까지 너무나 고생했다’라고 했다면, 12.12사태가 일어났을까? 난 일어나지 않았다고 본다. ‘전두환 쿠데타’는 역사상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국민의 눈물을 닦아준다’더니, 최루탄으로 눈물만 더 흘리게 했다.
불과 7년 뒤, 80년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났다. 그때 정치인이 싸웠나? 아니다. 국민과 학생이 싸웠다. 정치인은 앞장서지 않았다. 군사독재에 맞서 ‘시민운동가’란 이름으로 국민이 싸웠다. 그렇게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 놨더니, 김영삼-김대중이 또 단일화하지 않아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정권을 빼앗겼다. 단일화했다면, 국민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압도적 지지로 당선됐을 것이다. 혁명에 가까운 선거가 됐을 것이다. 단군 이래 절호의 기회를, 4.19혁명 같은 기회를, 군부독재의 종기를 뿌리째 뽑을 기회를 망친 건 정치인이다.
이후 두 사람 모두 대통령을 했지만, 뭘 했는지 모를 정도로 정치 상황이 나빠졌다. 김대중-노무현 민주 정권 10년 동안 민주화 터전도 만들지 못했다. 그래서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정권을 빼앗긴 것 아닌가.
제발, ‘국민의 눈물을 닦아 준다’고 말하지 마라. “여러분, 내가 여러분 더 울릴 테니 각오하십시오”라고 하면, 오히려 국민이 각오할 것이다. 더 이상 ‘눈물 닦아준다’며 울리는 정치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증오 정치 조장하는 지도자”
프레시안 :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긴 했지만,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감옥에 가 있는 것만으로도 지난 대선의 문제점이 드러났다고 본다. 그럼에도 선거를 통해 과거 군부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됐다는 건, 역사적으로 봤을 때도 참….
임헌영 : 야당이 싫어할지도 모르겠지만, 이 모든 책임은 결국 정치인들에게 있다. 현재의 여야, 진보세력까지 모든 정치인이 공동으로 책임져야 한다. 그런 반성이 없다면, 일본처럼 보수정권이 장기 집권하지 않을까? 참, 공포스럽다.
우리나라의 비극은 빈부격차가 사회적 현상으로 확대됐다는 것이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친일파와 독재자의 계승자들, 즉 파렴치한이 만든 역사와 상식의 격차다. 빈부격차는 사실 돈만 생기면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와 상식의 격차는 글쎄….
역사 인식의 격차 때문에 같은 국민이면서도 화합하지 못한다. 마치 적을 대하듯 증오감마저 생겼다. 지도자가 어떻게 국민들의 증오를 조장하는 정치를 하나.
선거 때 보면, 내가 내 가족을 설득하지 못한다. 5.18광주민주화 운동에 대해 아무리 얘기해도 ‘북한 간첩이 했다’고 한다. 이런 역사 인식의 격차가 오늘의 우리를 암담하게 만드는 것이다. 파렴치한 정치세력이 주입한 결과다. 생각할수록 무섭지 않나?
8.15광복 이후, 나쁜 세력은 나쁘게 좋은 세력은 또 굉장히 좋게 발전했다. 마치 독립운동가가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대변하고, 친일파가 우리의 열악성을 대변하듯 말이다. 훌륭한 민주세력과 저급한 반민주세력이 같이 성장했다.
국민은 그 중간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다. 그래도 착한 사람이 더 많다고 본다. 왜?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꽃을 보면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런데 파렴치한 정치세력은 그런 인간의 본성을 파괴한다. 그렇다 보니, 나쁜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 설득조차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프레시안 : 우리 사회 중요한 격차로, 역사 인식을 꼽았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이 ‘100% 국민통합’을 공약으로 내걸었으나, 진보-보수의 감정적 골은 더 깊어졌다. 또 극우사이트인 일간베스트(일베)에서 드러났듯 젊은 친구들의 역사 인식이나 상식이 상대에 대한 혐오로 번지고 있다. 해결방법이 있을까?
임헌영 : 답은 하나밖에 없다. 올바른 정치, 인간의 얼굴을 한 사람이 정치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얼굴을 한 사람도 정치를 하기란, 굉장히 힘들 것이다. 노무현 정권은 그래도 민주주의를 하려고 했다. 역사를 바로 봤고, 파렴치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이명박 전 대통령은 파렴치했다. 상식적인 차원에서 대화가 안 될 정도였다.
올바른 사람을 세울 수 있는 건 국민밖에 없다. 아무리 일베가 떠들어도 ‘너무 하다’고 생각하는, 파렴치를 인식한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때문에 민주주의를 통해 부정이 없는 지도자를 뽑을 능력 또한 국민에게 있다고 본다. 정치인이 민주주의 기본 룰을 지킬 때 가능하다. 기본이 지켜지지 않으면, 민주주의 자체가 없어진다. 그게 두렵다.
어떻게 자기 생각만 옳고, 상대방은 틀렸다고 말할 수 있나. 그런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역사에는 올바른 게 있다. 그러나 수시로 변하는 정치 현실에서는 ‘내가 말하는 대로 해야 민주화가 된다. 통일된다’라는 정답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지혜를 모아도 될까 말까 한데 말이다. ‘내 방법 이외의 사람들은 나쁘다. 믿을 수 없다’고 하는 건 정치적 미숙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사료를 보여주면서 설명하고 있는 임헌영 소장 ⓒ프레시안(손문상)
“‘천안함, 북한 폭침’ 언급이 종북이다!”
프레시안 : 파렴치,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 판단이 아예 탈각됐다고 지적했다. ‘종북’이란 정치적 용어가 그렇게 쓰인다.
임헌영 : 야권의 당면 과제는 ‘종북’의 개념을 바꾸는 것이다. 파렴치한 정치를 정화하려면 두 가지를 해야 한다. 첫째는 친일파·군사독재를 청산해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이고, 둘째는 ‘종북’이라는 단어를 쓴 사람을 정계에서 은퇴시켜야 한다.
대통령이든 누구든 다 ‘종북’을 쓴다. ‘종북’이라는 단어 안에 모든 것이 용서된다. 이승만 정권 당시 ‘반공’하면, 친일도 용서되고 부정부패도 용서됐다. 지금이 그런 지경이다. 참 파렴치한 것이다. 그 역사 인식과 ‘종북’을 청산하지 않는다면, 야당은 두고두고 고생할 것이다. 진보도 마찬가지다.
프레시안 : ‘종북’이란 말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는데,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천안함, 북한 폭침’이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천안함 사건에 대한 정부 발표에 의구심을 가진 사람들이 ‘종북’으로 몰렸는데, 문 대표가 이들과 거리를 둔 셈이다.
임헌영 : 야당이나 진보세력이 천안함 사건과 관련해 명백한 입장을 밝혀도 언론은 보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국민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바에 대해 비판하거나 지적하는 건 정치인의 도리 아닌가. 그런데 ‘북한 소행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이 어떻게 ‘종북’인가. 오히려 ‘북한 소행’이라고 말하는 게 ‘종북’이다.
대한민국 영해 안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있나. 북한이 그렇게 정교하게? 놀랍다. ‘종북(從北)’은 북한을 찬양하는 건데, ‘북한 소행’이라는 견해는 북한에 대한 찬양이다.
정치인이 지금까지 안 했던 말을 새삼 했다고, ‘달라졌네. 그 사람을 찍자!’라고 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올바른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국민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얻은 표일 때 가치가 있다. 국민을 속이며 지키지 못할 공약으로 얻은 권력은 결국 역사의 심판을 받는다. 스스로 권력을 잡아도 힘들다. 이런 사실을 야당이나 진보가 알았으면 좋겠다.
“자칫 ‘200년 전쟁’ 될까 암담하다”
프레시안 : 현 정부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평가 복원이 정권의 목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역사교과서 문제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최근 교육부가 선정한 ‘이달의 스승’ 12명에 친일파가 포함됐다.
임헌영 : 박근혜 정부는 역사 인식을 탈색하는 ‘전 국민 몰지각화 운동’을 하고 있다. 단적인 예로 세조를 몰아내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던 사육신을 높게 평가해야 하는데, 세조가 훌륭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처음 주목한 곳이 민족문제연구소다. 물론,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이 빌미가 됐다.
<백년전쟁>은 역사적으로 철저하게 고증했다. 실제 검찰조사에서도 다 증명했다. 그런데 파렴치한 정권은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니까. 참, 고약하다. ‘팩트(역사적 사실)’를 문제 삼는 건, 저의가 있다.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한 게 못마땅한 것이다. 국민의 친일파 청산 의식이 높기 때문에 <친일인명사전>을 비판하기보다는 <백년전쟁>을 물고 늘어지는 것이다. 불편한 심기를 엉뚱한 데 푸는 격이랄까?(☞ 참고 기사 : 이승만·박정희 다룬 <백년전쟁>이 국가 안보 문제?)
<백년전쟁>은 광복 70년 중에 장기 집권한 두 인물, 이승만-박정희를 다뤘다. 그런데 친일로 몰린 사람들이 현직 대통령의 아버지를 전면화해 박 대통령의 심기를 일부러 불편하게 만든 것이다. ‘당신 아버지를 이렇게 비꼬았다’라며 민족문제연구소를 탄압하려는 심리가 깔렸다.
박근혜 정권이 역사교과서 문제에 집착하는 것을 보면, ‘현 정권의 핵심이 친일 공모자’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일본 아베 총리가 하는 행동과 똑같다. 일본 역사교과서나 우리나라 교학사가 만든 교과서나 역사관이 똑같다. 그러면서도 뻔뻔스럽게 아베에게 사과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파렴치한 것 아닌가.
특히 국정교과서를 만들겠다면서 어떻게 일본에 위안부 문제 하나만 사과하라고 할 수 있나. 광복 70년 동안 국민 인식은 높아졌는데, 정치인은 아직도 못 깨어나고 있다. ‘자기들은 똑똑하고, 국민은 바보다’라고 지금도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병에 걸리면, (세상만사) 참, 편리할 것 같다.
프레시안 : <백년전쟁>이 가진 함의는?
임헌영 : 지도자 한 명이 집권만 잘하면 경제 정책은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사회문화와 국민 인식은 3대에 걸쳐 이뤄진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조선 후기부터 부정적인 정치 행태가 이어졌다. 그러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고,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독립운동을 했다. 반면, 반민족세력 또한 철저하게 자기 민족을 배신하며 득세했다. 당시 독립운동가는 가족뿐 아니라 일가를 희생하며, 조국을 되찾는데 헌신했다. 8.15광복 후, 제일 먼저 독립운동가 및 연좌제에 묶인 이들의 명예를 회복시켰어야 한다. 그리고 반민족세력을 응징했어야 한다.
그 역사가 일제 36년을 넘어 지금까지 100여 년을 이어오고 있다. 그런데 잘못하면 ‘200년 전쟁’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만큼 암담하다. 이 다큐의 연작이 언제 끝날지, 누구에게까지 내려와야 할지 안 보인다.
프레시안 : 최근 ‘다음’ 뉴스펀딩에 ‘강제징용 피해자 사례’를 연재하고 있다. 반응이 좋다.
임헌영 : 일제시대 징용자 및 위안부는 국민들이 직접 느끼는 문제다. 다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왜 징용을 갔을까? 결국 나라를 빼앗겨서 갔다. 왜 나라를 빼앗긴 거지? 나라를 빼앗겨도 징용은 안 갈 수 있었을 텐데…’ 등 조금 더 유추하며 ‘친일파 청산이 바로 오늘의 문제구나’라고 느꼈으면 좋겠다.
국제적으로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주목받고 있다. 이게 참, 좋으면서도 걱정스럽다. 우리 정부도 일본에 사과하라고 한다. 그런데 사과하면 다 해결되나? 아니다. 위안부 문제는 일본이 우리나라에 저지른 수만 가지의 죄악 중 하나일 뿐이다. 일본이 죽인 모든 국민, 특히 독립운동가에 대한 보상과 명예회복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게 평소 내 주장이다. 우리나라 국가보훈처는 보훈처대로 하고, 전범 국가인 일본에는 별도의 보상을 받아야 한다.
이와 함께 ‘어떤 일이 있어도 일본이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 않겠다’는 공식 선언이 있어야, 한일관계가 정상화된다.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한다면, 보수 언론과 보수 진영은 ‘일본이 사과했다’고 떠들 것이다. 참 염려스럽다. 오히려 ‘200년 전쟁’이 될까 걱정된다.
사실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 문제와 현대 한일 관계만 다루려고 했다. 그래서 그동안 정치적 발언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친일청산을 하려고 보니, 너무 현실적인 권력에 직면하게 됐다. ‘아, 정말 친일파 청산하려면 그런 의지를 갖춘 정치인이 나와야 하는구나. 그런 정치인이 힘을 가져야 하는 구나’라는 생각에 말을 안 할 수 없게 됐다. 이런 발언 역시, 친일파 청산의 일환이다.
임헌영, 어느새 ‘리영희’가 되다
프레시안 : 친일문제 연구에 평생을 바친 고(故)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받아 지금까지 24년간 친일 문제를 연구해 왔다. 특히 3.1절과 8.15광복절 등 기념일이면 정부 산하 기관 및 시민단체에서도 자료 요청이 쇄도한다고 들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계획을 듣고 싶다.
임헌영 : 연구소 1차 목표가 2009년 편찬한 <친일일명사전>이었다. 반응도 좋았고 연구소 또한 신뢰를 얻었다. 그런데 아직 학술상을 못 받았다. 사실 사전 편찬은 연구적 성과다.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도 “8.15광복 이후 최고 업적”이라고 할 만큼 연구 성과가 뛰어난 작업이다. 사전을 만들면서 일본어 신문이던 <만주신문>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혈서로 쓴 만주군관학교 지원 자료(1939년 3월 31일 자)도 발견했다.
2차 목표는 ‘식민통치사료’를 내는 것이다. 광복 70년이 된 지금까지 우리가 일본에 얼마나 많이 빼앗겼는지 통계가 없다. 민간인 희생도 200만 명에서 1000만 명까지 오락가락한다. 마지막으로, ‘오늘의 일본과 한국의 동아시아 평화 정착’이 연구소의 궁극적인 목표다. 이를 바탕으로, ‘시민역사박물관(가칭)’을 건립해 일제 식민 수탈과 잔혹한 통치를 그대로 전시할 계획이다. ‘독립기념관’과는 또 다른 민간인의 수탈사(收奪史)를 모으는 작업이다. 그래서 후대에 누구나 와서 보고, 일제 식민사(植民史)를 되새겼으면 한다.
프레시안 : ‘임헌영’ 개인은 문학평론가다. ‘민족 문학’ 분야의 개척자로, 18년 만에 평론집 <불확실한 시대의 문학>(한길사 펴냄. 2012년)를 펴냈다. 어떤 문제의식을 담고 있나.
임헌영 : 지금도 15권 정도의 비평이 쌓여 있다. 책을 내려고만 하면, 세월이 이상하게 꼬여서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 문학’과 ‘해외 동포 문학’을 주로 연구했다. 그런데 지금은 ‘민족 문학’이란 것 자체가 낡은 시대의 언어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시대에 맞는 민족 문학을 계속할 생각이다.
<불확실한 시대의 문학>은 이런 연구를 간추린 것이다. 서간문에도 밝혔지만,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에 따라 사회 문화와 역사 인식이 바뀐다. 그런 점에서 문학은 사회를 읽는 척도가 된다.
“‘불확실 시대’라니 너무 무책임하지 않느냐고 따지면 우리가 함께 시대를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책임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답하겠다. 역사적 필연, 사필귀정 같은 말에 현혹되기에는 우리 세대는 너무 많이 속아왔다. 어떤 공고한 민주주의와 번영·평화도 한 고약한 정치가에 의하여 순식간에 붕괴될 수 있다는, 헤겔이나 마르크스의 역사철학으로도 예기치 못한 상황을 유럽이나 미국의 예에서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도 통감하면서 ‘불확실 시대’에 대한 명칭에 더 애착이 갔다. 현재 지구 위의 어느 국가도 자신의 나라는 파멸로 이끌 히틀러 같은 인간을 지도자로 선택할 개연성이 엄존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경악스럽게 한다.”(<불확실한 시대의 문학>서간문 ‘불확실성을 밝히는 하나의 별’ 중)
프레시안 : 리영희 선생이 고인이 된 지 5년이 됐다. 일흔대여섯 살, 지금 본인의 나이가 리영희 선생과 대화를 하고 기록했던 때다. <대화>(한길사 펴냄. 2009년)의 마지막에 ‘리영희 선생의 곧은 성품이 외경심의 원천’이라고 했다. 현재 본인이 우리 사회 ‘외경심의 원천’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는데….
임헌영 : 당시 리영희 선생 건강이 좋지 않아서 대화를 이끌어내기 바빴다. 한두 시간 하면, 쉬어야 했다. 책이 나오기까지 참 어려웠다. ‘외경심의 원천’이라. 나는 리영희 선생에 비해 많이 부족하다. 선생은 독종이다. 난 그렇게 못한다. 마음이 좋아서…(웃음).
지금 살아 있다면, 직언을 날렸을 것이다. 리영희 선생이 얼마나 날카로웠던지, 일부에서 이명박 정권의 실용주의에 기대할 때 첫마디가 이랬다. “두고 봐라. (과거 보수 정권에 비해) 훨씬 더 악질적일 것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라. 남북문제 개선,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대로였다.
그 가르침으로, 난 박근혜 정권을 간파했다. 재야인사 중 일부가 ‘박근혜 대통령이 MB보다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절대 그렇지 않다. 두고 봐라. MB보다도 못하고, 아버지 박정희보다 훨씬 못할 것이다.” 지금 어떤가. 이런 점은 리영희 선생에게 배웠다.
간단하다. 인간의 본질을 봐야 한다. 본질을 못 보면 그 사람에게 속는다. 박근혜 대선 후보 시절, 자세히 관찰하며 그가 쓴 책을 다 살펴봤다. 그랬더니, 가치관이 어느 정도 짐작되더라.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와 다르다. 박정희 전 대통령보다 훨씬 못하다.
굳이 평하자면, 아버지 박정희는 옳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당대 최고 두뇌를 등용했다. 특히 5.16쿠데타 직후, 진보적인 사람들을 불러들여 ‘새마을 운동’을 설계했다. 그러나 지금 박근혜 정부는 사람 쓰는 것을 보면….
사람의 본질을 보면 참 편리하다. 본질에서 어긋난 것은 예외고, 결국은 본질로 돌아간다. 하지만, 요즘 진보세력들이 변증법을 공부하지 않는다. 변증법을 공부하면, 역사와 사람에 대한 통찰이 생긴다. 그런데 본질을 보지 않고, 껍데기만 보기 때문에 조금만 나아져도 ‘희망이 있다’고 얘기한다. 그게 거품이란 것을 모른다.
* ‘단박 인터뷰’는 2015년 <프레시안>이 새롭게 연재하는 조합원과 독자 참여형 인터뷰입니다. 피터팬79님, 아사검님 질문 감사합니다.
전홍기혜 기자, 이명선 기자
<2015-04-09> 프레시안
☞기사원문: “박근혜 정권, ‘국민 몰지각화’가 목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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