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이후 일본의 신사라는 것은 세계적으로는 물론 일본 내에서도 매우 특수한 존재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야스쿠니신사는 수많은 신사들 중에서 매우 특수한 신사였다.” – 『야스쿠니신사』, 1984. |
죽음을 강요하는 야스쿠니
야스쿠니신사는 1869년에 만들어졌습니다. 처음에는 일본의 내전이었던 ‘세이난전쟁’에서 ‘천황’편으로 싸우다 죽은 사람만을 군신(軍神)으로 모셨습니다. 이후 일본이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키고 주변국을 침략하면서 전사자가 늘어나자 야스쿠니신사는 일본 육해군이 직접 관리하는 중요한 시설이 되었습니다. 이름에 종교시설에 붙는 ‘신사’가 들어있지만 ‘군사시설’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야스쿠니신사에 대한 알 수 있는 유명한 좌담회가 있습니다.
사이토: 우리 아들은 동원이 걸려오면. “천자님께 목숨을 바쳐야지, 바쳐야지”라고 언제나 말하곤 했죠. 이번에 소망하던 대로 명예롭게 전사했습니다. 모리카와: 흰 가마가 야스쿠니신사에 들어온 밤은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되뇌이며 가슴이 뭉클했어요. 변변치 않은 우리 아이를 그나마 천자님을 위해 쓰이게 해주셔서. 정말다행이에요. 무라이: 모두 천자님 덕분이죠. 황송할 따름입니다. 나카무라: 다들 눈물을 흘렸죠? 타카이: 기쁨의 눈물이었어요. 기쁠 때도 눈물이 나오니까요. (중략) 사이토: 저는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 언제나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었어요. 천자님이 우리들을 가엾게 여겨 보리밥을 드시면서까지 수고를 해주신다는 말을 듣고, 어떻게 해서든 꼭 보은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천자님께 절을 올릴 때, 저는 눈물이 흘러서 주체를 할 수가 없었어요. ‘야스쿠니님’께 참배할 수 있었고, 천자님께도 절하고, 저는 이제 여한이 없어요. 오늘 죽어도 만족해요, 웃으며 죽을 수 있어요. 나카무라: 정말로 그렇죠. 이제 아들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쓸쓸하기 이를 데 없지만, 나라를 위해 죽어 천자님께 칭찬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다른 것은 모두 잊어버릴 만큼 기뻐서 기운이 나죠. – 야스쿠니 사상의 성립과 변용 『중앙공론』, 1974.10 |
위의 대화는 중일전쟁 초반 ‘합사행사’에 참가한 어머니들의 좌담회를 기록한 것입니다.(‘합사’는 ‘신령’을 합쳐서 하나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좌담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 동북지방에 살던 일반인이었고 이때 처음 도쿄에 와서 처음으로 ‘천황님’을 가까이서 만났습니다. 대화를 보면 전쟁에 나가 죽은 자식에 대한 슬픔보다 ‘기쁨과 황송함’이 가득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가족의 죽음은 유족에게 슬프고 괴로운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좌담회에 참석한 모리카와씨는 이후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아, 명예로운 일이야”
“이미 그 아이는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다른 건강한 군인을 보면, 아아 저렇게 어디엔가 살아 있을까, 괜한 생각을 하기도 해요. 나 혼자만 남았구나 하고 무심결에 푸념을 늘어놓기도 하죠. 저녁 무렵이 되면 부끄러운 일이긴 합니다만, 부모 된 마음으로, ‘불쌍해라, 불쌍해라’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아아, 명예로운 일이야, 명예로운 일이야’라고 생각하죠. 그러면 왠지 모르게 웃는 얼굴이 돼요.”(『야스쿠니문제』2005.10)
아들을 잃은 상실감, 가여워하는 마음을 ‘천황을 위해 죽었으니 명예로운 것’이라며 억누르고 있습니다. 마치 정신분열이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슬픔을 감추게 되었을까?”
일본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던 메이지시기에 일본은 전 ‘국민’이 왕실의 조상을 섬기는 신앙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국가신도’라고 합니다. 이 국가신도에서 일본왕인 ‘천황’은 ‘살아있는 신’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본국민이 모두 ‘천황’의 자손이고 하나의 피를 나눈 가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신념에서 ‘천황’을 위해 죽은 것은 ‘국가를 위해 죽은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야스쿠니신사는 이렇게 ‘천황’을 위해서 죽은 자들이 다시 돌아와 영원히 ‘천황’을 지키는 신이 되는 곳이었습니다.
전쟁에서 가족을 잃은 유족들에게 일본정부와 야스쿠니신사는 ‘천황의 명령에 따른 전쟁은 성스러운 것이다. 전사자들은 아시아의 해방을 위한 정의로운 전쟁에서 죽었다. 죽음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가족을 잃은 슬픔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일본인들은 이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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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정을 앞두고 야스쿠니에 참배하는 일본군(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이렇게 ‘죽음의 사이클’이
만들어졌습니다”
‘천황’의 이름으로 동원되어 → 전사하면 → 영광스럽게 야스쿠니신사에 신이 된다 → 전쟁에 나가는 것은 성스러운 것이다 → 또 다른 사람이 ‘천황’을 위해 동원되고 → 전사하고 → 합사되고, 수많은 일본인들이 ‘전쟁에서 죽는 것이 영예로운 것’이라는 말에 속아 주변 국가를 침략하는데 동원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극진히 제사를 지내고 신으로 모셔준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것보다 기쁜 일이 있을까요. 거꾸로 ‘신으로 모셔준다니 기쁜 마음으로 전쟁에 나가 죽으라’고 자기 남편과 아들에게 말하는 것을 정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전쟁 말기 라디오를 통해 부대원이 모두 자결했다는 소식을 알릴 때 ‘우미유카바(海行かば)’라는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바닷물에 잠긴 주검이 되더라도 산위에 풀이 돋아나는 주검이 되더라도, 천황 곁에서 이 목숨 내던진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라는 뜻을 담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당시 많은 일본의 젊은이들이 ‘죽어서 야스쿠니신사에서 만나자’는 구호를 외치며 전쟁터로 떠났습니다, 각자 사연과 이유는 달랐지만 일기장, 유서에도 ‘야스쿠니신사에서 만나자’는 말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전쟁터로 향한 일본 병사는 240만 명이 넘었고 이들에 의해 학살당한 아시아인은 2,000만 명이 넘었습니다.
l 침략신사 분포도(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이 지도는 당시 일본이 점령한 동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을 그린 세력도 입니다. 지도 둘레에는 점령지에 만든 신사 사진이 있습니다. 이 신사들은 제국주의 침략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신사들의 가장 위에 야스쿠니신사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시아인들에게 야스쿠니신사는 2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살육, 강간, 고문, 가족파괴,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 말살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이런 침략전쟁을 ‘성전(聖戰)’이라거나 ‘아시아 민족을 해방시킨 전쟁’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군국주의자들에겐 ‘성전’일지 모르지만 일본시민과 동아시아의 많은 사람들에게 야스쿠니신사는 죽음과 공포의 상징일 뿐입니다.
야스쿠니신사는 국립묘지가 아니다
‘국가를 위해 돌아가신 숭고한 영혼에게 경의를 표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야스쿠니신사와 알링턴 국립묘지는 같다.’ 2013년 4월, 아베신조 일본총리가 미국에서 한 말입니다. ‘국가를 위해 죽은 사람들을 당연히 국가가 모신다’는 생각에도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야스쿠니신사가 국립묘지라는 아베총리의 생각은 두 가지 부분에서 근본적으로 틀렸습니다.
첫째, 세계의 추모시설은 침략전쟁을 인정하거나 미화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국제사회가 비난하는 전쟁범죄자를 추모하지 않습니다. 독일 사람들이 죽은 자를 추모한다고 히틀러와 그 친위대를 기리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둘째, 국가 추도시설이라도 유족이 싫다고 하면 사망자를 모시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죽었을 때 그 죽음을 가장 먼저 슬퍼하는 자, 추도할 권리를 가진 자는 그 누구보다 유족입니다. 이 권리는 어떤 식으로도 부정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야스쿠니신사와 일본정부, 일본사법부는 이런 ‘상식’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유족의 의사도 확인하지 않으며, 유족이 추모할 ‘공간’도 없는 국가추도시설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한국인에게 야스쿠니신사는 무엇인가
1938년 4월 26일 ‘천황’이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한 일이 있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10시 15분, 참배 시간에 사이렌이 울리면 모든 사람이 일어나 야스쿠니신사 방향을 향해 1분간 묵도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같은 시간, 경성의 남산에 있던 조선신궁에서는 관민 1,000명이 동원 된 가운데 큰 의식이 거행되고 있었습니다.
l 남산 중턱에 자리잡은 조선신궁(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이런 행사가 반복되자 사람들 사이에 ‘불평불만’이 퍼졌습니다. “행사 때마다 매번 신사에 올라갔다 내려갔다 해야 해, 귀찮고 다리나 허리만 아플 뿐이지 아무 의미도 없다” “이 부락에서는 궁성요배를 실행하지 않고 있다. 그놈들이 전쟁에 이기기 위해 시키는 것을 누가 하나”, 유언비어를 퍼트렸다는 죄목으로 잡혀간 사람들의 진술서에 있던 말입니다.(『야스쿠니에 묻는다』, 2014.7)
일제는 식민지지배를 하는 동안 한반도 전역에 1,144개의 신사를 세우고 끊임없이 참배를 강요했습니다. ‘조선인’들이 허리를 굽혀 참배하게 만들 수는 있었지만 정말로 ‘천황’이 살아있는 신이고 그 신이 벌인 전쟁은 성스러운 것이라고 믿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세월이 흘러 이제 한국인 대만인의 합사취소 요구가 늘어가자 야스쿠니에서 일하던 ‘이케다 료하치 권궁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전사한 시점에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사후에 다시 일본인이 아니게 될 수는 없다. 일본의 군인으로, 죽으면 야스쿠니에 혼령이 모셔질 거라는 마음으로 싸우다 죽었기 때문에, 유족의 요구만으로 철회할 수는 없다. 내지인(일본인)과 똑같이 전쟁에 협력하게 해달라고 해서 일본인으로 싸움에 참가한 이상, 야스쿠니에서 제사지내는 것은 당연하다.” -『아사히신문』, 1987.4.16. |
식민지배로 부터 침략전쟁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이 주변나라의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반성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야스쿠니신사를 유지하기 위해 억지논리를 만들어 퍼트리고 있습니다.
생(生) 사람을 신으로
이렇게 억지를 부리기 때문에 멀쩡하게 살아 있는 사람을 ‘신’으로 모시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1944년에 일본군에 끌려간 김희종 할아버지는 일본의 요코하마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사이판에 배치되었습니다. 훈련 때 절대 포로가 되지 말라고 교육받았습니다. 전황이 악화되자 할아버지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함께 있던 조선인 동료가 ‘조선인이 왜 자살하냐’고 하는 말을 듣고 미군에 항복해서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년 후에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나는 영이 아니다
내 이름을 삭제하라”
그런데 세월이 흘러 2006년 5월에 김희종 할아버지는 자신이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같은 해 7월, 할아버지는 합사를 취소하라고 하기 위해 직접 야스쿠니신사에 갔습니다. “나는 영이 아니다. 빨리 내 이름을 삭제하라”고 항의했지만 야스쿠니신사는 “전쟁 당시 일본인은 패전하면 집단자살해서 모두 죽었다. 포로는 존재할 수 없다”고 답했습니다. 설명을 듣던 할아버지는 혈압이 올라 쓰러졌습니다.
나중에 야스쿠니신사는 ‘조사가 부족했기 때문에 전사자로 오인했다’는 사과편지를 보냈지만 ‘신의 이름’에서는 빼줄 수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한국정부 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이렇게 살아 돌아온 사람을 합사한 것이 60명이었습니다.
유족들의 고통
매년 5월 8일이면 ‘일제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천안 ‘망향의 동산’에 모여 합동추모제를 지냅니다. 서로 친하기 때문이지만 70~80이 다 된 어른들이 상차림을 두고 ‘위치가 잘못되었다, 그렇게 쌓으면 안 된다’하면서 다툽니다. 그런데 추모제를 하면서 써 붙인 지방(紙榜)에 돌아가신 분의 혼이 깃든다는 생각은 모두 같습니다.
행사를 마치고 소지(燒紙, 지방을 불태워서 혼을 돌려보내는 의식)하는 걸 보던 유족이 ‘아버지가 다시 야스쿠니에 갇히시겠네’라고 혼자 말 하는 걸 듣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제사 때 ‘혼은 어떻게 지내다가 어디에서 오는가?’ 저는 1년에 한, 두 번 막연히 떠올렸다가 잊어버리는 것이지만 이 분들은 항상 마음에 담아두고 산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습니다.
정성을 담아 행사를 마치고도 ‘아버지가 야스쿠니신사에 있는데 어떻게 오시냐, 못 오신 것 같다’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뒤늦게 아버지의 사망일과 합사사실을 알게 되어 그나마 생일에 치르던 제사도 못 지내게 된 분도 있고, ‘야스쿠니에서 이름을 지울 때까지 비석에 이름을 새길 수 없다’고 비면을 비워두고 있는 분도 있습니다.
“야스쿠니신사의 자유가
침해되니 좀 참으라”
모두 희생자의 혼이 야스쿠니신사에 갇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일본의 재판부는 ‘야스쿠니신사의 자유가 침해되니 좀 참으라’하고 야스쿠니신사는 ‘우리도 정성껏 모실 테니 당신들도 마음껏 모시라’고 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한국인의 관습에서는 돌아가신 분의 유골과 영혼을 한 곳에서 모시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사고로 인해 객사한 경우 영혼만이라도 고향으로 불러들여 정식으로 장례를 치러줍니다. 그래야 돌아가신 분이 이승에 대한 미련을 정리하고 저승길로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유족도 위로를 받고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희생자의 유족들은 유골을 받지 못했고 사망사실도 최근에서야 알았습니다. 당연히 정상적인 장례를 치른 경우가 없습니다. 유족들은 야스쿠니신사가 제 멋대로 희생자의 영혼을 가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조상에게 해야 할 마땅한 도리를 못하게 막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야스쿠니신사가 또 다시 유족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ㅣ야스쿠니신사 앞(2013.10.22)
노!합사 소송
저희들이 2001년에 ‘재한군인군속 소송’에서 처음 야스쿠니신사의 합사 취소를 요구한 지 14년이 흘렀습니다. 2007년에 ‘야스쿠니신사와 일본정부’를 상대로 재판을 시작한 지 8년, 다시 야스쿠니신사만을 상대로 세 번째 소송을 시작한 지 2년이 되어 갑니다. 원고들의 요구는 간단합니다. ‘야스쿠니신사에 합사한 아버지, 형님, 오빠, 남편..그리고 본인의 이름을 지울 것.’
세 번째 소송을 시작 할 때 우리 측 일본 변호인들은 ‘금액을 올려야 제대로 재판을 해 볼 수 있다’고 원고들을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원고들은 ‘돈은 필요 없다. 돈 때문에 한국인들이 재판을 벌인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며 ‘1인당 위자료 1엔’을 청구했습니다.
유족들의 요구에 대해 일본재판부는 ‘야스쿠니신사가 죽은 자를 모시는 것은 종교의 자유다. 원고들의 요구를 들어주면 야스쿠니신사가 가진 종교의 자유가 제약받는다. 합사로 인해 원고들이 받는 고통이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라고하며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했습니다.
법정에서 힘겨운 싸움을 하는 동안 매년 8월, 여러 나라의 시민들이 도쿄에 모여 ‘침략신사 야스쿠니’를 반대하는 촛불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올해 5월에는 처음으로 독일에 가서 이런 일본사회의 실상을 알리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일본인들, 당신들은 과연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졌는가, 천황제와 파시즘에서 해방되었는가’ 일본사회의 본질을 따져 물을 생각입니다.
l ‘평화의 촛불을 야스쿠니의 어둠에’ 도쿄 촛불행동(2006.8)
2002년 6월 현재,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조선인’은 2만1,181명입니다. 야스쿠니신사에 2만 명이 넘는 한국인을 합사해두고 우리는 과연 해방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해방 70년을 맞은 지금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글 | 김진영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간사
일본 도쿄고등법원 항소심 원고 최후진술(한국인 원고 이희자) (전략) 이 재판은 일본제국주의 국가가 조선을 강제로 식민지로 만들고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을 전쟁터로 끌고 갔기 때문에 발생한 피해의 회복을 요구하는 재판입니다. 그 요구는 야스쿠니신사에서 내 아버지의 이름을 지워달라는 것입니다. 지금 재판에서 가족의 이름을 빼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원고들은 일본인이 아니라 원하지 않는 전쟁에 동원된 한국인의 유족입니다. 1심 판결에서 과거의 역사를 전혀 다루지 않은 것은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한국인들은 일본인으로 참전하여 일본인으로 죽었기 때문에 ‘일본인’처럼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것이다. 큰 문제가 없으니 약간 불쾌한 것 정도는 야스쿠니신사의 종교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참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뜻인가요? 애초에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것이 잘못 된 것이고, 사람들을 전쟁터로 내몰은 것이 잘못 된 것이며, 죽게 만들고 야스쿠니신사에 합사한 것이 잘못입니다. 이 거대한 연속된 잘못 가운데 지금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야스쿠니신사에서 이름을 빼주는 것 밖에 없습니다. 야스쿠니신사와 일본정부, 1심 재판부는 이 단순명료한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재판장님, 몇 일 전에 아베신조 총리가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와 일본의 야스쿠니신사를 비교하면서 ‘전사자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고 말한 신문 기사를 봤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지금 일본에는 국립묘지가 없습니다. 아마 그래서 국립묘지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베총리의 말처럼 국립묘지는 공동체를 위해 목숨을 희생한 이를 기리는 시설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국립묘지의 겉모습만을 설명한 것이고 그 안에는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국립묘지는 희생자의 유가족들이 이제 죽어서 곁에 없는 가족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달래고 서로의 기억을 공유하고, 위로하는 곳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국립묘지는 그런 곳입니다.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것은 국가가 아니라 가족입니다. 국가는 추모하는 자리를 만들 뿐, 직접 희생자를 추모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가 죽은 이를 추모할 때 그 가족들을 귀빈으로 모시고 법으로 정한 엄숙한 예식을 치릅니다. 예식을 규정하는 이유는 국가가 아무리 성의를 다하여 노력해도 그 가족의 슬픔과 아픔을 보상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규정이 없으면 혹시라도 실수를 해서 유가족들의 아픈 마음을 더 상하게 할까봐 일정한 기준을 만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족을 찾을 수 없거나 가족이 거부한 것이 아니라면 유가족이 없는 추모식은 없습니다. 또 가족이 원하지 않으면 희생자는 국립묘지에 가지 않습니다. 아베 총리가 비교한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도 그렇고 한국의 국립묘지인 현충원도 그렇습니다. 희생자를 국가 시설에 모실 것인지 가족들이 따로 모실 것인지는 그 유족이 결정합니다. 국가는 어떻게 할 것인지 유족에게 확인하고 절차를 진행합니다. 국가가 이렇게 희생자들과 가족들에게 정성을 들이는 이유는 희생자들이 존귀한 국가를 위해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가족들이 모여서 존귀한 국가가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지금 야스쿠니신사는 어떻습니까? 피고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야스쿠니신사는 국가시설이 아니라 민간 종교법인입니다. 민간기관이기 때문에 이것, 저것 책임질 필요도 없습니다. 희생자를 어떻게 할 것인지 유족들에게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그 곳은 야스쿠니(교)를 믿는 사람들을 위한 곳일 뿐입니다. 어떻게 민간기관이 국가라는 온 국민의 공동체를 위해 희생한 사람을 추모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이 제가 야스쿠니신사에서 제 아버지의 이름을 빼달라고 요구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야스쿠니신사는 희생자와 그 가족을 대하는 기본적인 예의도 자격도 없는 곳입니다. 그 곳에서는 식민지 백성으로 억울하게 끌려가 죽임당한 아버지를 조금도 위로해 줄 수 없습니다. 저희 가족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후략) – 제1차 야스쿠니무단합사 철폐소송’이희자’의 진술서 (2007,2,26 제소) |
※참고기사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보도자료] 일본 정부는 역사·영토문제 홍보예산 수천억원 증액
☞경향신문: “국회, ‘야스쿠니 신사 반대’ 예산 전액 삭감”···일본은 홍보 예산 증액
☞연합뉴스: 일본, ‘영토·역사’ 등 대외홍보 예산 4천600억원 늘려
☞세계일보: 日, 역사·영토 홍보예산 4610억원 늘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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