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긴급조치 9호 땐 일반 법원서 재판… 박정희 “유신헌법, 내가 봐도 엉터리”
■ 대법원도 못 믿어, 상고 포기 속출
앞서 살펴본 사건들 외에도 긴급조치 4호로 기소된 피고인들은 많았다. 그중에는 대법원도 믿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 아예 상고를 포기한 사람도 많았는데, 여기서는 지면 사정으로 그 가운데 일부만 열거해 보기로 한다.(괄호 안은 항소심 판결의 징역 형량)
이해찬(서울대·10년), 유홍준(서울대·7년), 제정구(서울대·15년), 강창일(서울대·10년), 정찬용(서울대·12년), 문국주(서울대·10년), 최민화(연세대·12년), 김학민(연세대·15년), 김경남(한국신대·12년), 이학영(전남대·7년), 윤한봉(전남대·15년), 정명기(감신대·7년), 장영달(국민대·7년), 여익구(동국대·15년), 방인철(중앙일보 기자·10년).
이철을 비롯한 민청학련 그룹과 같은 날(1974년 5월27일) 기소되었던 일본인 다치가와 마사키(太刀川正樹, 자유기고가)와 하야가와 요시하루(早川嘉春, 대학 강사) 두 사람은 이철, 유인태 등에게 폭력혁명을 사주하고 7500원을 ‘거사 비용’(실은 취재 사례비)으로 주었다는 혐의로 내란선동, 긴급조치 위반, 반공법 위반 등으로 비상군법회의에서 징역 20년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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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 박건웅
■ 문세광 사건 반응 내세워, 1·4호 해제
그해 8월15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열린 광복절 경축식장에서 대통령 저격사건이 발생했다. 재일교포 문세광이 쏜 총탄에 박정희 대통령은 무사했는데 부인 육영수가 총상을 입고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그런데 그로부터 1주일이 지난 8월23일, 박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통하여 긴급조치 1호와 4호를 해제한다고 발표했다. 묘하게도 문세광 사건의 반응을 내세운 조치였다. 즉 ‘지난번 광복절 식전에서의 참변을 본 우리 국민들은 북한의 흉계가 무엇인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을 것이고… 그동안 정부가 취해온 긴급조치의 참뜻도 이해했으리라고 믿고, 이 사건을 계기로 국민총화가 다져졌음을 볼 때 든든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면서, 따라서 긴급조치 1호와 4호를 해제한다고 하였다. 문세광의 총격이 참으로 묘한 결과를 가져온 데 대해서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해제가 곧 ‘백지화’는 아니었고, 해제 당시 재판에 걸려 있는 사건이나 이미 처벌을 받은 자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아니한다고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재판은 재판대로 받고 수감자는 한 사람도 석방되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 ‘국민총화’가 다져졌다면 좀 풀어주는 것이 순리일 터인데….
운동사의 측면에서 볼 때 일련의 긴급조치 사건은 한국 교회가 유신체제 반대운동에 동참하여 민주화운동을 이끄는 주도세력으로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한국교회 인권운동 30년사>, 2005). 나아가서 유신철권 통치에 정면으로 도전했던 젊은이들의 의기가 정권의 무자비한 탄압과 맞물리면서 학생운동과 제반 사회운동을 아우르는 연합전선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황인성, <내가 겪은 민청학련>, 민청학련계승사업회, 2014).
■ 유신헌법 국민투표 하곤 구속자 석방
정부의 철권정책은 누그러지지 않은 채 여전했다. 각 대학과 종교계, 사회단체에서는 유신 철폐와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욱 거세어지고, 시위와 기도회가 끊이지 않았다. 언론계에서도 10월24일 동아일보 기자 200여명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고, 기관원 출입 및 기자 불법 연행 거부, 간섭 배제를 외쳤고, 이 파문은 조선일보 등 다른 언론사에도 파급되었다. 11월27일에는 종교계, 학계, 정계, 언론계, 법조계 등 각계 인사 71명이 ‘민주회복국민회의’를 결성했다.
정부는 땅굴을 호재로 한 총력안보, 전군지휘관회의 등으로 맞불을 놓았는가 하면, 재야 지도자들에 대한 보복을 서슴지 않았다. 이때의 경색 국면은 심지어 대법원장이 세계인권선언기념식 기념사에서 “유신체제는 철저한 인권보장의 첩경이며, 유신정신은 인권을 억압하려는 뜻이 추호도 없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여러 풍파와 격돌이 끊이지 않은 채 1975년이 밝아오자 박정희는 유신체제의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하여 국민들을 또 한번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1월22일). 야당과 국민의 극심한 반대와 난데없는 비상계엄령 속에서 강행된 투표 결과는 투표율 79.84%, 찬성률 73.1%라고 발표되었다. 전체 투표권자의 58.3% 찬성이었다. 국민투표 사흘 뒤(2월15일)에 국민들은 다시금 박 대통령의 특별담화를 듣게 된다. “현행 헌법질서의 역사적 당위성과 국민적 정당성이 주권자인 국민의 총의로 재확인된 이 시점에서 긴급조치 구속자들을 석방함으로써 이들에 대해서도 민족중흥의 역사적 과업 수행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기로 결심했다.” 유신헌법을 반대했다고 구속한 사람들을 바로 그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확인되었다는 이유로 석방한다니, 참으로 시니컬한 논법이었다.
어쨌든 구속자 석방은 좋은 일이었지만, 여기에도 복선이 깔려 있었다. 인혁당(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을 비롯하여 반공법 위반 수감자들은 석방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것이다. 이래저래 박 정권에 대한 국내외의 비난과 분노는 수그러들지 않았고 학원가도 조용할 리가 없었다. 그 와중에 민청학련 사건 석방자 중 시인 김지하가 동아일보에 투고한 글이 문제가 되어 다시 남산에 연행되었다. 인혁당 사건이 날조라는 내용의 글이었는데, 그의 변호인단을 구성하여 선임계를 제출한 나는 그날로 ‘남산’ 측의 사임 요구를 받고 이를 거부했다가 바로 다음날(3월21일) 반공법 필화사건으로 구속되는 몸이 되었다. (나는 당시 일본에서 납치당한 뒤 선거법 위반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야당 지도자 김대중의 변호인이기도 했다.) 나는 그 후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날 때까지 9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하고 나서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한 채 무직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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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헌법 국민투표 이후 석방된 민청학련 사건 사형수 이철이 동지들과 함께 기뻐하는 모습.
■ 긴급조치 7호 이어 9호의 노림수
이 시점에서 긴급조치 본성을 버리지 못한 박 정권은 1975년 4월9일, 또 하나의 강수로 ‘대통령 긴급조치 제7호’를 발동한다. 고려대학교에 대해 휴교를 명하고, 그 학교 내의 일체의 집회 시위를 금하며, 위반자는 최고 10년 징역에 처한다는 내용이었다. 필요하면 병력을 투입할 수도 있다는 규정도 보였다. 이어서 5월13일에는 현행 헌법의 부정, 학생의 집회 시위, 유언비어의 유포 등에는 1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는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를 선포했다. 이 조치를 비난하는 행위도 처벌한다는 기막힌 규정도 부활시켜 놓았다.
또한 이 조치에 의한 명령은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미리 철조망을 쳐놓는 용의주도함도 보였다. 해제했다던 긴급조치 1호와 4호가 더욱 억센 모습으로 재현된 것이다. 이 조치에 위반되는 범죄는 군법회의가 아닌 일반 법원에서 재판한다는 점이 그 전의 긴급조치들과 달랐다. 그러나 일반 법원에서도 긴급조치 사건은 거의 ‘묻지마 유죄’에 과잉 처벌로 시종했다. 허위사실 또는 유언비어 유포죄가 전가의 보도로 위력을 발휘했다.
그중 몇 가지 사례를 여기에 옮겨 본다. 학원 강의 중 군부를 비판하고, 국어책을 정부 선전의 매개체라고 말했다가 징역 8년을 선고받은 학원 강사. 교회 설교에서 박 정권이 인권 탄압을 계속하고 있으며 근로자와 농민을 억압하고 있다고 말했다가 징역 6년형을 받은 목사. 박정희가 단독 입후보해서 대통령이 된 것을 비판하고, 차라리 북한의 김일성이 똑똑하다고 수업시간에 말했다가 징역 3년을 받은 교사. 한국에는 민주주의가 소멸되고 많은 지식인, 학생들이 정치적 이유로 고통받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미국의 유명인사와 언론에 보냈다가 징역 7년을 선고받은 한 시민…. 이처럼 황당한 사례는 개그 차원으로 진화해나갔다.
위에 적은 1심(지방법원)의 선고형은 상급심에서도 극히 일부만 감형이 되었을 뿐이고, 무죄 선고가 난 예는 찾아보기가 어려웠다(2007년 1월30일자 한겨레, ‘긴급조치 위반사건 주요 판결’). 하지만 그처럼 위축된 법원의 분위기 속에서 놀랍게도 무죄 판결을 한 용감한 법관도 있었다. 그는 서울지법 영등포지원 이영구 판사였다. 이 판사는 박 정권의 유신독재에 항거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상진군의 49재에 맞춰 교내 시위를 벌인 서울대생들을 집행유예로 풀어주었다가 당시 대법원장이 정부 측으로부터 이 판사를 인사조치하라는 압력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 판사는 그런 사실도 모른 채 긴급조치 9호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한 여교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는 마침내 지방으로 발령이 났고, 한 달 뒤에 법복을 벗고 말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법관들은 정치권력의 눈치에 맞추어 판결함으로써 사법부의 독립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국민의 불신을 키웠다.
■ 박정희 “내가 봐도 유신헌법은 엉터리”
1995년 봄, 서울의 한 여론조사기관에서 전국 5대 도시의 현직 법관들에게 ‘가장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법부 관련사건’을 묻는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 결과 ‘유신 치하의 민청학련 사건 등 긴급조치 사건 판결’이 수치스러운 판결 1위로 나타났다. 긴급조치 1호·4호 사건도 상고심은 대법원이었고, 7호와 9호 사건은 1심부터 일반 법원이 재판을 했던 것이니, 잘못된 재판의 책임이 일반 법원의 법관들에게 있다고 보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 사법적 과오는 훗날 과거사 재판을 뒤집는 재심 무죄를 통하여 재확인되었다.(다음 순서인 ‘인혁당 사건’ 후반에서 살펴보겠음)
문제의 처음과 끝은 한마디로 ‘유신헌법’에 있었다. 정작 그 창시자이자 수혜자인 박정희는 이 미증유의 ‘위법(僞法)’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물론 겉으로는 그 정당성을 입에 올렸지만, 철석같이 믿는 측근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봐도 유신헌법의 대통령 선출 방법은 엉터리야. 그러고서야 어떻게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겠어?” 1979년 1월, 당시 대통령 경제특보이던 남덕우에게 한 말이었다(남덕우, <경제개발의 길목에서>, 2009). 유신의 본체가 스스로 ‘엉터리’라고 실토한 그 유신헌법 때문에 이 나라와 국민이 겪어야 했던 참담함을 생각하니, 말문이 막힌다.
<2015-04-12> 경향신문
☞기사원문: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27) 대통령 긴급조치 4호 사건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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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11) 경향신문 폐간 탄압 사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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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8) 진보당 사건과 조봉암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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