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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으로 본 현대사](28) 인혁당 사건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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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중정 “북괴 지령 받은 지하조직”… 검사들 불기소 ‘항명파동’


■ 학생운동에 붉은 색칠, 1차 인혁당 사건


이른바 ‘인혁당 사건’은 박정희 정권하에서 두 번 있었다. 1964년에 ‘1차 인혁당 사건’이 있었고, 그로부터 10년 후인 1974년에 ‘2차 인혁당 사건’이 터졌다. 1974년 사건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라고도 부르며, 통상 ‘인혁당 사건’이라고 하면, 여덟 분의 억울한 형사(刑死)를 빚어낸 후자를 가리킨다.


먼저 1차 인혁당 사건부터 살펴본다. 당년 44세의 박정희 소장은 5·16 쿠데타로 민주정부를 쓰러뜨린 뒤, 민정 복귀의 공약을 어기고 군복만 벗은 채 대통령이 된다. 그리고 무단통치와 대일 굴욕 외교에 반대하는 국민 각계의 저항에 부딪힌다. 그중에서도 대학생들의 움직임이 격렬했다. 1964년 5월20일,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은 집단시위와 아울러 당시 박정희가 내세운 ‘민족적 민주주의’의 장례식을 치르기도 하였다. 박 정권은 학생들을 대거 연행하여 구속영장을 청구하였다. 하지만 법원에서 기각당하자 한밤중에 무장 군인들이 법원과 영장 담당 판사의 집에 난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분노한 국민 각계, 특히 대학가의 항거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달아오르자 정부는 6월3일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공산당 내지 불순세력이 학생들을 배후 조종하고 있다며 학생운동에 ‘적화’의 색칠을 하고 나선다.


일러스트 | 박건웅

■ 수사검사들의 기소 거부와 사표 파동


마침내 중앙정보부(중정)는 “북괴의 지령을 받고 국가 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인 ‘인혁당’을 적발했다”고 발표하면서,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학생 데모도 인혁당 관련자들이 북괴의 지령에 따라 배후 조종한 것이라고 했다. 동시에 지하조직 관련자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은 수배 중이라고 했는데, 그들에겐 정당 발기인 모임, 강령 규약 채택, 북괴 중앙당에의 창당 보고 및 지령에 의한 학생조직 강화 등의 어마어마한 혐의가 씌워져 있었다.


이 사건은 그 해 8월 서울지검 공안부로 송치되었다. 그런데 이용훈 부장검사를 비롯하여 김병리, 장원찬, 최대현 등 네 검사가 총동원되어 전력을 다하여 수사했으나, 검사들은 증거 불충분으로 도저히 기소할 수 없다며 기소를 거부했다. 이에 놀란 검찰 상부와 중정 측이 당황한 나머지 수사검사들에게 어떻게든지 기소를 하도록 온갖 압력을 가하였다. 그러자 중정 차장 출신의 신직수 검찰총장의 명령에 따라 서울지검은 구속 만기가 되는 날의 당직검사 명의로 그 사건을 기소하게 하였다. 이에 반발한 이용훈, 김병리, 장원찬 세 검사는 사표를 냈다. 법무장관은 국회에 불려나가 “법원의 판단을 받아보려고 기소한 것이다”라고 답변하였다.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들의 이러한 불기소 항명파동은 용기있는 검사들이 당시 중정의 막강한 위세에 검사직을 걸고 맞섬으로써 검찰의 위상을 지켜내고자 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검찰 수뇌와 중정의 밀착으로 사건이 변칙 기소됨으로써 검찰의 권력 예속성을 실증한 치욕적 일면도 간과할 수는 없었다.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의 이용훈 부장검사를 비롯한 수사검사들의 소신과 용기를 잠시 ‘다시 보기’ 해본다. 그들은 수사 결과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할 수 없다는 결론을 검사장과 검찰총장에 이어 법무부 장관에게 보고했다. 그 자리에서 권모 법무부 차관은 “빨갱이 사건에 일일이 증거 운운할 수 있겠소? 정보부에서 받아낸 자백을 검사들은 왜 못 받아내는 거요?”라고 다그쳤다. 그 뒤 검사장은 “당신들은 기소를 하든지, 옷을 벗고 나가든지 택일하라”는 말도 했다. 그래도 검사들이 굽히지 않자 검사장은 구속 만기일 전에 무조건 기소하라는 엄명과 함께 끝내 기소를 못하겠다면 공소장이라도 작성해달라고 사정을 했다. 검사들(부장검사 포함 4인 중 3인)은 이것마저 거부하고 사표를 냈다(이용훈, <사필귀정의 신념으로>, 2000, 한겨레 2005년 10월5일자). 

■ 김형욱의 강공에 당직검사 이름으로 기소


당시 중정부장 김형욱은 ‘재판 결과야 어떻게 나든 단 한 명이라도 기소해야 한다’는 말로 검찰을 압박했다. 검찰 상층부에서는 서울지검 차장검사의 이름으로 기소하도록 지시했으나, 그(여운상 차장검사) 또한 이를 거부했다. 당황한 검찰 내부에서는 구속 만기 날 서울지검 당직 담당 A검사로 하여금 중정의 사건 송치의견서를 그대로 베껴서 공소장을 작성하고 그의 이름으로 기소하게 하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다. A검사는 얼마 후 중정 5국 부국장으로 기용되었다. 이용훈 부장검사와 여운상 차장검사는 사표 수리의 형식으로 면직되었다(나도 당시 서울지검 검사로 재임 중이어서 위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며 분노와 감동을 체험했다).

그런데 김형욱은 이런 말을 남겼다. “사표를 내던져 나를 곤란하게 만들기는 했으나, 이용훈 부장검사와 여운상 차장검사의 정의감과 용기를 나는 내심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아직은 살아 있는 검찰의 양심에 판정패를 당한 셈이었다.”(김형욱, <김형욱 회고록> 제2부, 1985)


이것이 김형욱의 사건 당시 생각이었는지, 20년 후 회고록을 쓸 때의 생각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수사검사의 한 사람이었던 장원찬은 이런 비화도 술회했다. “기록 보따리를 들고 검사장실에 들어갔다. 그때 공안검사 중 한 명은 화장실에 간다며 들어오지도 않았다. 검사장은 야단도 치고, 달래기도 하고, 역정도 냈다. 세 사람은 사표를 제출했다. 화장실에 가느라 사표를 내지 못했던 검사는 상대적 공로(?)를 인정받았다.”(2003년 5월9일, 한국일보)


■ 재조사 후 14명 공소 취소, 12명은 죄명 바뀌어


이 사건을 둘러싼 물의는 기소 후에도 계속되었다. 특히 기소된 26명의 피고인 대부분이 중정에서 나체로 물고문, 전기고문까지 당했다는 사실과 이에 따르는 사건 조작설이 퍼짐에 따라 수사당국의 입장이 크게 몰리는 국면으로 빠져들어갔다. 할 수 없이 검찰은 서울고검의 한옥신 검사로 하여금 고문 및 허위진술 강요 등에 관한 재조사를 하게 한 후, 피고인 26명 중 14명은 공소를 취소하고 석방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12명에 대해서는 당초의 반국가단체구성죄(국가보안법 위반)를 철회하고 추가 구속자 1명과 함께 (13명에 대해) 반국가단체에 대한 찬양 고무 동조죄(반공법 위반)로 공소장을 변경하여 법정형을 낮추었다(<해방 20년사>, 희망출판사, 1965).


기소된 피고인들에 대한 1심 선고 공판은 1965년 1월20일 열렸다. 도예종은 징역 3년, 양춘우는 징역 2년, 나머지는 무죄였다. 그런데 항소심에서는 달랐다. 그해 6월29일 선고된 2심 판결은 도예종 징역 3년, 박현채 등 6명에게 각 징역 1년, 이재문 등 6명에게 각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이었다. 전원 유죄로 뒤집힌 판결이었다. 같은 해 9월21일 대법원은 항소심 판결을 그대로 확정시켰다.


중정과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들의 대결(?)은 그 과정이나 결말에 있어서 피차 절반의 승리로 끝난 셈이었다. 그러나 수사검사들의 유례없는 소신 싸움은 이 나라 검찰사에 빛나는 자국으로 평가되고 있다.


■ 10년 후에 재현된 ‘인혁당 재건위’ 올무


그로부터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박정희는 1972년 헌정을 중단하고 국회도 아닌 비상국무회의와 국민투표라는 헌법 밖의 수법을 써서 유신헌법을 만들고 영구 집권의 기틀을 다졌다. 그리고 반유신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흉기로 대통령 긴급조치를 연발하였으니, 1974년 4월3일에는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하고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을 발표한다. 그때 이철, 유인태, 이강철 등과 지면이 있는 경북대 총학생회장 출신의 여정남을 민청학련 사건 그룹에 ‘배치’하여 인혁당 재건위와의 연결고리로 삼는다. 그런 구도 속에서 중정은 “인혁당 재건위가 북괴의 조종을 받아 민청학련을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발표한다. 즉 중정부장 신직수가 4월25일 수사결과 발표에서 민청학련을 정부 전복을 기도한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북괴의 지령을 받은 인혁당 재건위가 그 배후세력이라고 주장한 것은 지난번의 ‘긴급조치 4호 사건’에서 살핀 바와 같다. 10년 전에 사건을 조작했다가 수사검사들의 기소 거부 파동을 겪으면서 호되게 쓴맛을 본 중정은 다시금 예전의 그 사람들을 검거하여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라는 확대판을 ‘재건’한다. 중정에서 사건을 송치받은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부는 ‘민청학련 주동의 국가변란기도사건’의 추가 발표에서 “서도원, 도예종 등은 1969년부터 지하에 흩어져 있는 인혁당 잔재세력을 규합, 인민혁명당을 재건하고, 대구 및 서울에서 반정부 학생운동을 배후에서 사주했다”고 발표했다. 군 검찰은 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송치된 21명을 대통령 긴급조치 1·4호 위반,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 내란 예비 음모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 긴급조치 4호를 적용했기 때문에 비상군법회의 관할 사건이 되어, 일반 검찰이 아닌 군 검찰에서 공소 제기를 하게 되었다는 점이 1차 인혁당 사건 때와 달랐다.


■ 적법한 물증 없고,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만


군법회의 심리에서 ‘인혁당 재건위’라는 반국가단체를 결성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할 적법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다만 일부 피고인들의 자백이 있을 뿐이었는데, 이는 고문 등 가혹행위에 의해서 조작되었다는 의혹이 짙었다. 요컨대, ‘재건위’ 관련자들의 활동이 국가변란을 기도했거나 민청학련의 배후로서 작용했다는 증거가 없었다. 거기에다 ‘민청학련’이라는 조직 자체가 실재하지도 않았고, 그것은 오직 학생들의 유인물에 들어간 발표 명의에 불과했음은 지난번 ‘민청학련’ 부분에서 살핀 바와 같다. 피고인들은 한결같이 중정의 수사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했으며, 그와 부합하는 교도관의 증언도 나왔다. 군 검찰의 조사에서 ‘중정에 되돌려 보내겠다’는 위협까지 받았다는 진술도 나왔다.

이런 반국가사범이라는 혐의를 쓰고 군사법정에 서게 된 비운의 피고인들은 서도원, 도예종,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우홍선, 송상진 등 모두 21명이었다. 민청학련 사건에 접목시킨 여정남 역시 ‘인혁당 재건위’와 운명을 같이할 징후가 보였다.




<2015-04-12> 경향신문

☞기사원문: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28) 인혁당 사건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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