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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펀딩] 7화. 일본사람은 다 나빠? 함께 싸우는 일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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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은 모두 적


올 봄에 큰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처음으로 학부형이 됐습니다. 아이는 요즘 학교에서 한글 자음을 배웁니다. 날마다 한 자음씩, 그 자음이 들어간 낱말을 써가는 숙제를 합니다.

며칠 전에는 ‘ㅂ’이 들어간 낱말을 쓰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여러 가지 단어를 생각하다가, ‘일본에도 ㅂ 있다’고 외쳤습니다. 저는 아들에게 그럼 일본을 쓰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일본은 안 쓸 거야, 이순신 장군도 죽이고, 우리나라 할아버지들을 끌고 가서 일 시키고 괴롭히고, 안했다 그러고” “선생님이 아직까지 사과도 안한다고 했어” “일본은 나빠서 내 공책에는 안 써”하고는 좋아하는 공룡의 긴 이름을 썼습니다.

자신이 떠올린 일본이라는 단어를 통해 일본에 대한 미움을 쏟아내는 아이를 보며, 잠시 일본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이는 ‘일본은 나쁘고, 일본 사람도 다 나쁘고, 자기가 일본 사람들을 만나면 이순신 장군처럼 모두 무찌르겠다’고 합니다. 

오히려 일본 사람들은 모두 나쁘니까 엄마도 일본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합니다.

“책임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아이가 아직 어리지만 저는 아이에게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고도 피해자 할머니, 할아버지들께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지만 모든 일본 사람이 나쁜 것은 아니다’라는 점을 설명해 주고 싶었습니다. 

‘엄마가 피해자 할머니, 할아버지를 도와 소송 하는데, 좋은 일본 사람들이 많이 도와주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미워할 때는 자신이 미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하고 어떻게 되길 바라는지도 생각해야 한다’고 차근차근히 ‘책임’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하지만 선악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방법 밖에 모르는 아이에게는 너무 어려운 이야기였던 모양입니다.

아이들은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통해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만행과 식민지배, 일제피해자가 외면 받는 가슴 아픈 현실을 배웁니다.

“올바른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해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문제를 성찰할 틈도 없이 자극적인 결론만 주입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 되기도 합니다. 일본이 우경화하고 비이성적으로 변해간다고 우리도 더 자극적으로 적대감을 키우는 방식으로 대응한다면 문제는 점점 더 해결하기 어려워집니다.

1945년 8월 15일, 수많은 사람들이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은 지도 어느새 70년이 됐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일제 피해자 문제가 그대로 남아있고 아이들이 일본에 대한 미움을 마음에 새기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아이에게 채 설명하지 못한 일제 강제동원 손해배상 사건 진행과 협력하고 있는 일본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함께 싸우는 일본인


2004년 1월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법무법인 해마루에서 처음 변호사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선배 변호사가 과거사 문제를 함께 해보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신사임당보다는 유관순이 좋다는 생각을 했을 뿐, 역사문제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선배의 제안을 들었을 때도 막연히 사회적 약자를 돕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정도였지, 구체적으로 일제 피해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자세를 갖고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일을 시작하고서 이 문제가 인류 보편의 인권에 관한 문제고 우리 사회의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이해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일제 강제동원 사건과 10년 넘은 세월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2004년 봄, 제가 처음 일제 강제동원 사건에 합류했을 때는 2000년에 시작한 미쓰비시 사건이 한창 진행 중이었습니다. 한일협정 문서공개를 요구하는 소송도 1심 판결(2004.2.13)이 나온 상황이었습니다.



한일협정문서공개에 관한 기자회견(2005년1월17일)


2000년대 들어서면서 일본재판소는 ‘한일청구권협정에 의해 원고들의 권리는 소멸됐다’는 이유를 들며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한국정부에 일본과 맺은 청구권협정 문서를 모두 공개하라고 청구했습니다. 그 재판결과 한국정부는 총 156개 문서철에 약 35,000쪽의 청구권협정을 포함한 한일수교문서를 공개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제철의 피해자들은 2005년 서울에서 신일본제철(현재 신일철주금)을 피고로 소를 제기했습니다. 피해자인 원고 할아버지들이 모두 1990년대에 일본에서 먼저 소송을 제기했었기 때문에 사실관계에 관한 문제는 많이 입증이 됐고 법리 문제만 검토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피고 신일철과 1심 재판부는 일제시대 일본제철의 불법행위 성립에서 부터 다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피고 기업이 직접 강제동원에 가담하였다는 것을 입증할 일제시대 자료들을 처음부터 모두 찾아야만 했습니다.

일본제철은 회사를 분리한 후 다시 신일본제철로 합병했기 때문에 같은 회사라는 점을 증명할 일본 자료도 찾아야 하고 번역도 해야 증거로 제출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어 한 줄 읽지 못하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습니다.



2000년5월1일 미츠비시중공업 한국 연락사무소 제소 기자회견



전부터 피해자에 대한 사실조사를 해온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피해자 단체도 혼자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일본제철지용공재판을 지원하는 회’ ‘미쓰비시 히로시마 전 징용공피폭자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한국의 원폭피해자를 지원하는 시민의 모임’ ‘제2차 후지코시강제연행?강제노동소송을 지원하는 호쿠리쿠 연락회’ 등등 수많은 일본 시민단체, 변호사들과 연대해서 활동 했습니다. 

1990년대 초반 일제 강제동원피해자들이 일본의 책임을 묻기 시작 할 때 이 분들이 먼저 관심 갖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변호사들은 무상으로 변론을 맡았고 일본시민들은 회비를 모아 원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법정에서 진술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항공료를 내고 숙식문제를 해결했습니다. 

휴가를 내고 한국에 찾아와 피해자들을 찾아다니며 피해사실을 확인하고 기록했습니다.


신일철주식회사 도쿄본사앞 행동(2002년7월2일)



1980, 90년대 우리가 민주화와 경제문제로 여유가 없을 때 이 분들은 우리가 잊고 있던 강제동원피해자들을 돕고 있었습니다. 

이 분들은 지금도 2주에 한 번씩 도쿄 신일철주금 본사 앞과 토야마 후지코시 공장의 정문에 모여서 한국인 피해자들에게 사죄하라는 집회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일제강제동원피해 관련 소송에서 대리인인 저는 단체에 필요한 증거를 요청하고 받은 증거를 정리하는 보조자입니다. 

일제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해 수 십 년 동안 헌신해 오신 일본의 시민들이 없다면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 이후에도 아베정권이나 전범기업들은 식민지배 및 강제동원의 위법성에 대해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을 하고 진정한 사과를 하는 것도 거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베정권과 가해기업의 반인륜적인 모습이 일본전체 모습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옳기 때문에 그리고 일본이 더 좋은 나라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20여년이 넘는 기간 동안 노력해온 양심적인 일본 변호사들과 일본 시민들이 많습니다. 

이 분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의 역사적 사실을 밝혀낼 기회조차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후지코시 토야마본사 앞 집회(2010년3월9일)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 그 후

이런 한일 공동의 노력이 모여 2012년 5월 24일, 대법원에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의 청구를 받아들이는 첫 승소 판결을 얻었습니다. 

대법원은 가해 기업들의 법적책임을 인정하면서 ‘우리나라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고려하지 않은 일본의 확정판결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나라의 공서양속에 반한다’고 했습니다. 

법조계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각계각층에서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이 우리나라의 사법주권을 회복한 판결이라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건은 원심인 서울고등법원, 부산고등법원으로 환송되어 심리가 진행됐습니다.
지금 피고 기업들은 파기환송심에서 대법원의 파기환송 판결을 부정하고, 청구권협정의 효력 범위에 대해서 가장 강하게 다투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관계에 의하면, 일본 정부가 1965년 청구권 협상과정에서 ‘보상’ 외에 직접적으로 ‘불법성을 전제한 배상 내지 손해배상’을 언급하거나 ‘일제의 식민지배 및 강제동원, 강제징용의 불법성을 인정’한 적은 없습니다.

 동안 한국인 피해자가 제소한 수십 건의 소송에서 일본정부가 처음부터 청구권협정으로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주장한 것은 아닙니다. 

2000년 이래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한국인 강제동원피해자들이 제기한 소송에서 부터 종전의 해석을 변경하여, ‘모든 전후 보상 소송에서 청구권협정에 의해 해결됐다’고 주장했습니다. 

일본 정부가 강제동원 피해보상 문제가 청구권협정에 의해 완전히 해결됐다는 입장을 취한 것은 1990년대 후반 혹은 2000년대 초반에 불과합니다.

다시 설명하자면 2000년대에 들어서기까지 일본정부나 기업이 청구권협정으로 모두 해결됐다는 주장을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청구권협정 당시, 일본 정부와 대한민국 정부가 청구권협정에 의해 개인청구권이 소멸하는 것으로 합의하지 않았고 청구권협정의 효력은 개인의 손해배상청구권에는 미치지 않는다’는 대법원 판결이 옳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섯 번째 판결, 다시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며

앞서 설명한 것처럼,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16년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1심, 2심에서 두 번의 패소 판결을 받은 후 대법원이 원심판결을 뒤집는 역사적인 판결을 선고한 지도 어느새 만 3년이 다 되어갑니다.

대법원 판결 선고 후 여운택, 신천수 두 분의 할아버지께서 별세하셔서 두 사건의 원고 중 이제 단 두 분이 살아계십니다.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 후 추가로 미쓰비시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의 원고 홍순의 할아버지도 이번 달에 별세하셨습니다. 4번의 판결문을 받으면서 원고 9명중 7명이 별세하셨습니다. 

다시 다섯 번째 대법원의 판결을 기다리며, 그 선고를 저희 대리인들만 듣게 되는 것은 아닌지 두렵습니다.

올해는 해방 70년이 되는 해이자, 한일청구권 협정을 체결한지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지금 일본 가해기업이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에 대해 가장 강력히 다투는 법률쟁점은 한일청구권협정의 효력범위에 관한 것입니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법정 싸움이 시작된 이상, 이 싸움이 마무리되지 않으면 그 다음 단계를 논의하기 어렵습니다.

더 늦기 전에 대법원이 스스로 자신이 세운 역사적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피해 구제를 위해서 무엇보다 신일철, 미쓰비시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조속한 판결이 필요합니다.

얼마 전 일본 지원 단체의 총회에 인사말을 보냈습니다.

‘지난 세기 일본의 과거는 한국의 과거였습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일본의 미래는 한국의 미래라고 생각합니다. 암울한 시대, 가만히 있지 못하고 나서서 싸우는 여러분들의 고귀한 마음과 활동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라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일본의 과거사 청산은 한국의 과거사 청산과 연결돼 있고 일본의 우경화는 한국과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게 되는데 이를 막기 위한 애쓰는 여러분의 노력에 감사하다는 뜻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들과 일본 아이들이 서로 적개심 없이 평화의 장에서 만날 수 있을까? 이제 더 이상 다음 세대로 미루지 말고, 우리 세대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글 | 김미경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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