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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으로 본 현대사](29) 인혁당 사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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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수사관 불러주는 대로 진술서… 법원, 속전속결 ‘묻지마 유죄’


■ 공판조서 조작 항의한 변호사도 연행


인혁당 사건은 수사~재판의 전 과정이 위법·불법 시리즈의 연속이었다. 중정에서의 온갖 고문에 의한 진술 조작은 말할 것도 없었다. 거기에다 군 검찰 조사에도 중정 직원이 동석하거나 중정으로 되돌려 보내겠다는 위협이 가해져 피의자는 검찰관이 중정의 의견서를 보며 불러주는 대로 진술서를 작성할 수밖에 없었다. 가족 면회(접견)도 일절 금지되었고, 공개 재판을 받을 권리도 침해되었다. 법정에서의 자유롭고 충분한 진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예’ ‘아니요’ 식의 답변만 허용되었다. 한 피고인이 자신의 진술서는 중정에서 고문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고 하자,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이 아직도 충분한 고문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 검찰관도 있었다. 검찰관이 신청하는 증인은 모두 채택되어, 피고인이나 변호인도 모르게 수명(受命) 법무사가 비밀리에 증인 신문을 했다. 반면, 변호인이 신청하는 증인은 채택조차 하지 않았다. 심지어 피고인들이 법정에서 공소사실을 부인한 대목도 공판조서에는 시인한 것으로 허위기재가 되어 있었고, 이를 항의한 변호인들(김종길, 조승각 두 변호사)이 중정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은 일까지 있었다.(<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4> 202쪽 이하, 국정원 과거사건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2007).


일러스트 | 박건웅

■ 74년 사건, 10년 전 그때 그 사람들의 악연


여기서 잠시 제1차 인혁당 사건(64년 사건)과 제2차 인혁당 사건(74년 사건)의 유사성, 연관성, 그리고 차이점을 살피는 일도 사건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우선 그 상황적 배경이 거의 같다. 두 사건 모두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가 격렬해졌을 때 그 배후세력으로 ‘인혁당’이 내세워졌다. 그리고 학생 시위가 북괴 내지 공산세력의 사주로 국가전복이나 정권 타도를 목적으로 삼았다고 했으며, 두 사건에서 동일한 인물들이 사건 수사의 지휘부를 이루고 있었다. 즉 64년 사건 때 중정 차장이었던 신직수와 인혁당 사건 담당 중정 요원이었던 이용택이 74년 사건 때는 각 중앙정보부장과 중정 6국장으로 ‘격상’되어 있었다. 이런 줄기찬 악연에서 두 사건을 조망해보는 안목도 나왔다. 즉 64년 사건 때 공안부 검사들의 불기소 항명으로 고역을 치르며 체면을 구긴 두 사람이 ‘10년 만의 보복’을 한 것이라는 잠재심리 분석이었다. (<1970년대의 민주화운동>1,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1986).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하여 일반 검찰이 아닌 군 검찰에 수사를 맡기고 군법회의에서 재판하도록 한 것도 64년 사건의 ‘학습효과’에서 나온 지혜가 아닌가도 생각된다.


이보다 주목할 만한 차이점을 지적하는 의견도 나왔다. 즉 64년 사건에 비해 74년 사건은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는(또는 지명도가 덜한) 인물들을 추가시켜 그만큼 사회적 관심을 덜 끌겠다는 의도가 작용한 게 아닌가 하는 시각이다. 그래서인지 74년 사건이 발표된 뒤 몇 달 동안은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며, 이 점에 대해서 기독교(개신교) 일각에서 반성하는 움직임이 늦게나마 머리를 들었다.


■ 1심, 사형 7명 등 역시 ‘정찰제 판결’


비상보통군법회의는 그해(1975년) 7월21일,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1심 판결을 선고했다. 서도원·도예종·하재완·송상진·이수병·우홍선·김용원은 사형(여정남은 이 사건이 아닌 민청학련 사건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김종대 등 8명은 무기징역, 이창복 등 6명은 징역 20년이었다. 검찰관의 구형량과 똑같은 ‘정찰제’ 판결이었다. 이보다 이틀 뒤(7월23일)에 선고된 민청학련 32명 그룹에 대한 판결 형량은 이 연재 지난번 치에서 알려 드린 바와 같다. 군법회의 판결은 소위 설치장관의 확인조치를 거치게 되어 있어서, 앞서의 민청학련 그룹의 사형수들은 국방부 장관의 확인조치에서 7명 중 5명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여정남과 이현배는 ‘원판결대로 확인’이 되었다.(그런데 이현배는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여정남만 계속 사형수로 남아 불안을 키웠다.) 항소심인 비상고등군법회의에서는 위의 두 사건을 병합심리하게 되었는데, 이때 나는 여정남의 변호인이 되었다. 그의 1심 변호인이던 강신옥 변호사가 1심의 법정 변론이 문제가 되어 구속당했기 때문에 내가 대타로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 여정남의 수난, 인혁당 사건의 축소판


여정남의 항소이유서에 의하면, 그가 당한 수모는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피고인들이 겪은 불법과 야만의 축소판이었다. “긴급조치하인데 법이 무슨 필요냐? 정보부에서는 불가능이 없다. 어느 정도는 시인해야지, 안 그러면 재판 도중이라도 끌어내다 박살낸다”는 협박을 여러 번 당했다고 한다. 고문으로 정신상태가 혼미해진 가운데 부르는 대로 받아써야 했던 정황을 폭로하기도 했다. 시기의 선후가 맞지 않는 말을 부르는 대로 받아쓰라기에, 조작을 해도 좀 똑똑히 하라고 했더니, 수사관이 ‘네 말이 맞다, 피의사실과 다르게 불렀군, 내가 잘못 불렀다’라며 틀린 것을 자인(?)하더라는 희극의 한 장면도 있었다. (여정남의 <항소이유서>). 실제 진술과 다르게, 심지어는 그와 정반대로 조서가 작성된 것을 알면서도 강제에 못 이겨 시키는 대로 이름을 쓰고 무인을 찍어야 했던 그 참담한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또한 대구의 여정남이 서울에 올라와 이철, 유인태를 사주했다고 하는 시나리오도 유인태의 다음과 같은 진술에 의하여 그 허구성이 변명의 여지를 잃고 말았다.

■ 처음엔 민청학련을 인혁당 배후로 설정하려다


즉, 중정 수사관들은 소위 인혁당의 배후조종과 관련하여, “처음엔 ‘내가 여정남에게 모든 것을 지령했다’고 쓰라고 하기에 ‘이분은 선배인데 어떻게 내가 지시를 합니까?’ 했더니 ‘인마, 선배 좋아하지 마. 너희 서울대 애들은 지방대 애들을 우습게 알잖아?’라며 막무가내로 (그렇게 쓰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더니 얼마 지나면서 거꾸로 내가 여정남으로부터 모든 지시와 지령을 받았다고 바꿔 쓰라고 윽박질렀다. ‘그 사람이 나이는 많지만, 서울의 학생운동 사정에 어두운데 내가 무슨 지시를 받는단 말입니까’라고 했더니 ‘이 새끼야 잔말 말아. 그래도 선배잖아!’ 이렇게 해서 소위 인혁당과의 관계가 생긴 것이다.”(유인태 <내가 겪은 민청학련 사건>-‘한승헌 변호사 변론사건 실록 2’, 2006). 여정남이 이철, 유인태에게 화염병 제조나 각목 사용을 지시했다든가, 민족지도부 구성을 논의했다는 것도 사실무근이었다. 그러나 다른 피고인이 시인했으니 너도 시인해야 한다느니, 그렇게 부인하면 정보부로 다시 보내겠다는 협박에 못 이겨 검찰관이 불러주는 대로 쓸 수밖에 없었다고 그는 실토를 했다.(여정남의 <항소이유서>). 인혁당 재건위가 민청학련의 배후세력이라는 ‘가설’은 이렇게 해서 발표되었던 것이다.


■ 사실심리도 봉쇄한 2심 재판의 허울과 위법


두 사건을 병합한 항소심은 피고인의 진술과 변호인의 반대신문, 증거신청이나 이의신청도 봉쇄, 묵살한 채 일사천리의 속도전으로 시종했다. 그리고 판결도 김종대, 전재권 두 피고인이 무기에서 20년 징역으로 감형된 것 외에는 모두 1심 그대로였다. 2심에서 제대로 심리도 하지 않고 폭주(暴走)를 할 때 모두가 짐작했던 대로였다.


하지만, 항소심 판결문에 보면 ‘살피건대 일건 기록과 원심에서 적법하게 조사한 증거들을 모두어 보니 원심이 판시한 각 피고인들에 대한 범죄사실들은 이를 넉넉히 인정할 수 있고, 달리 원심이 사실을 그릇 인정하였거나 그 사실 인정 과정에 심리를 다하지 아니한 잘못을 찾아볼 수 없음으로 논지 모두 이유 없다’는 기계적인 부동문자 몇 줄의 나열로 ‘묻지마’ 유죄를 포장해 놓고 있다. 오죽하면 이 사건이 대법원에 올라가 불문곡직하고 상고기각으로 끝장 날 때에도, 유일하게 원심 파기 환송 의견(이른바 소수의견)을 낸 이일규 대법원 판사는 이런 지적을 했을까. “기록에 의하면 이 사건의 항소심인 원심판결은 제1심에서의 신문과 중복된다 하여 피고인의 신문을 생략하여 항소이유에 관한 변론만을 시행하여 결심하였는바, 이는 공소사실에 대한 사실심리를 하지 아니하고 재판을 한 절차상의 위법이 있다고 아니할 수 없고, 따라서 원판결은 파기를 면할 수 없다.”


■ 대법원 사형 확정 직후의 울부짖음과 나


이 사건이 상고심에 걸려 있는 동안, 유신헌법에 대한 난데없는 국민투표가 강행된 후 정부가 말하는 ‘일부 공산주의자 내지 국가보안법 위반자’를 제외한 긴급조치 위반자들은 구속집행정지(미결수) 또는 형집행정지(기결수)로 석방되었다. 그것이 2월17일이었는데, 한 달쯤 뒤인 3월21일, 나는 반공법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어 내가 변호하던 여정남을 포함한 인혁당 피고인들과 같은 서울구치소에서 수감생활을 하게 되었다. 나의 첫 공판날이 하필이면 4월8일, 바로 인혁당 사건의 상고심 판결이 예정된 날이었다. 서울 서소문동에 있는 법원 건물 앞마당에서 인혁당 사건의 가족과 친지, 각계 인사로 보이는 많은 사람들이 실성하다시피 절규하고 통곡하고 몸부림치는 모습을 나는 구치소 호송차 안에서 수갑을 찬 채 바라보아야만 했다. 사형수들에 대한 상고기각으로 사형이 확정되었음을 직감할 수가 있었다. 그날 오전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민복기 대법원장)는 인혁당 사건 및 민청학련 사건 피고인 38명 중 2명을 제외한 36명에 대한 상고기각 판결을 선고함으로써 서도원·도예종·하재완·이수병·김용원·우홍선·송상진·여정남 등 8인에 대한 사형판결을 확정시켰던 것이다. 선고에 단 10분도 채 안 걸렸다. 법정 내에는 ‘전부 조작이다’라는 절규가 튀어나왔고, 북받쳐 오르는 비통함과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울부짖음으로 넘쳐났다.


이 판결을 놓고 사법부의 변질을 논하는 견해도 나왔다. 즉, 한 사학자는 ‘(1964년의 1차 인혁당 사건이 있었던) 10년 전의 사법부와 유신체제의 사법부는 크게 달랐다. 1960년대 후반에 조금씩 권력에 종속되던 사법부는 1971년 사법부 파동을 거치며 독립성이 아주 약해졌다’며, 당시 법관의 임명 보직권을 대통령이 갖고, 그해 3월 대법원 판사 15명 중 9명이 재임명에서 탈락했던 사실을 상기시켰다.(서중석, <인혁당 재건위 사건 조작과 박정희 유신체제> ‘인혁당재건위 사건 재심백서 1권’, 4·9평화통일재단, 2015).




<2015-04-27> 경향신문

☞기사원문: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29) 인혁당 사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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