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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4.24] 1940년 8월, 조선·동아 ‘폐간’…민족지에 대한 탄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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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조선일보와 방응모를 말한다③


손병휘 가수(이하 손) : 애국시민 여러분, 해외동포 여러분 그리고 동네 주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여러분의 조합원 소리지기, 노래꾼 손병휘입니다. 이 모자 보셨죠. 지난주에는 일제시대의 신사 분위기를 내기 위해서 중절모를 썼구요. 오늘은 일제시대의 밀정이라든가 고등계형사 역으로 나온 사람들이 나오면 쓰는, 이런 모자, 일본어로 도리구찌라고 합니다. 도리는 새라는 뜻이고 구찌는 입이거든요. 새부리처럼 생겼죠. 그리고 영어로는 헌팅캡(hunting cap)이라고 하죠.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이하 박) : 짭새 비슷하네요. (웃음) 죄송합니다.

손 : 오늘도 우리 역사의 길라잡이죠, 백년전쟁을 안내해 주시는 박한용 선생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박 : 네, 안녕하세요.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 사건

방응모 “우리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으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하여…”

비국민적 행위=반일행위=일장기 말소 사건

손 : 지난주에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해서 인수하자마자 또 인수하는 과정에서 어떤 친일행위를 했는가에 대해서 얘기를 나눴습니다만 그 와중에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있죠. 1936년에 베를린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을 한 손기정 ‘기떼이 손’이었는데 그때 이름으로는,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 사건이라는 그걸 예고를 했었습니다, 오늘 시작을.


 

박 :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는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정간 또는 폐간을 당하잖아요. 사실 조선중앙일보는 스스로 자진폐간 해버리죠.

손 : 조선중앙일보, 몽양 여운형 선생이 사장으로 계셨던

박 : 네네. 그때 이상하게도 조선일보가 이때 어땠는지 궁금하잖아요.

손 : 그러니까요. 동아일보 얘기만 많이 나오고 조선일보 얘기는 못 들었습니다.

박 : 근데 이때 조선일보가 어떤 태도를 가졌냐가 매우 중요할 것 같아요. 동아와 조선은 민족지라 하지만 사실은 경쟁지잖아요.

손 : 그렇죠.

박 : 이 때문에 조선일보는 묘하게도 비슷한 시기에 전국적으로 발전자축회를 개최합니다. 사세확장의 결과죠. 동아일보가 위축돼 있고 조선중앙은 자진휴간 아닙니까. 이렇게 해서 전선지국(全鮮支局), 전 조선 지국 순회에 나섭니다, 방응모가. 그렇게 해서 자비로 강연회 하고 좌담회까지 개최를 했어요.

 

손 : 이럴 때 경쟁지가 주춤한 사이에 사세를 확장시켜보자. 상당히 사업가로서 냉정한 면모를 보여주는 군요. 이게 자본의 속성이기도 하지만 남의 초상집에서 그걸 기회로 삼아서 자기 잔치로 삼는 그런

박 : 그래서 일제 보고에 따르면 37년 2월 달에 원산에서 방응모가 순회강연을 했는데 봉변을 당한 보고가 나와요.

손 : 봉변을 당해요?

박 : 내용을 보게 되면 보고 내용이 이렇게 됩니다. “우리 조선일보는” 방응모 이야기죠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으로 비국민적 행위” 다른 말로 반일 행위라는 뜻이에요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하여 끝까지 조선일보사가 이미 정해 놓은 방침에 한뜻으로 매진하겠다” 이런 식의 발언을 합니다.

손 : 네, 그렇군요.


 

박 : 여기서 비국민적 행위라는 것은 뭐죠? 일장기 말소 사건 같은 거 아녜요.

손 : 그런 거 하지 않겠다.

박 : 예. 얼마나 열 받겠어요. 그래서 참석자들이 탁자를 두드리고 마침내 완력을 썼다는 게 주먹다짐까지 갈 뻔 했나 봐요.

손 : 그러니까 방응모 같은 경우는 식민지 조선의 백성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를 일본 사람으로 생각했군요. 그렇기 때문에 ‘비국민’ 요즘으로 따지면 종북몰이 하면서 이런 거 하면 우리 충성스러운 신하가 될 수 없다 그런 얘기겠군요. 그래서 보면 방응모의 국민당원 행적을 보면

박 : 그럼 또 제가 국민당 행적으로 보자면, 이때 국민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닙니다.

손 : 그렇죠. 대일본 국민입니다.

중일전쟁 나흘 뒤, 조선일보 주필 서춘 “일본군은 아군 또는 황군으로” 주장
방응모, 서춘 입장 지지…조선총독부 “조선일보가 국민적 입장으로 변했다”

박 : 1937년 7월 달에 중일전쟁이 일어나잖아요. 이때 되면 방응모가 더 본격적인 친일행위를 해요. 국민적 행위를 합니다, 일본 입장에서. 역시 또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굴한 정보보고가 있어요. 이걸 보면 방응모의 언론관이 뭐냐라는 걸 잘 알 수가 있어요. 한 번 연구소가 공개 했었어요. 물론 첩보입니다, 일본의 정보경찰 보고자료인데. 1937년 7월 11일에 열린 조선일보 간부회의, 그러니까 7월 7일 날 중일전쟁이 일어나요, 그때부터 나흘 뒤죠,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그 당시 조선일보 주필이 서춘입니다, 그때 스카웃 해왔던.

 

손 : 네. 서춘

박 : 이 사람이 주필이 친일에 앞장서요. 지금 조선일보에는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 씨’라고 쓰고 있는데 이건 안 맞다는 거예요. 이제 ‘일본군’은 ‘아군’으로 또는 ‘황군’으로, ‘중국’을 ‘지나’로, ‘지나’는 중국을 낮추는 말이에요, ‘장개석 씨’는 씨를 빼라 이렇게 해서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논설을 쓸 것을 주장합니다.

손 : 서춘


 

박 : 이렇게 하니까 편집국장하고 영업국장, 편집국장 김형원과 영업국장 김광수가 적극 반대를 합니다. 이 사람들 민족주의예요. 근데 이때 방응모가 결정을 해야 되잖아요. 헌데 뭘 물어보나, 느닷없이.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이미 몇 십만 원의 손해를 봤지 않느냐” 그러니까 “정간, 휴간 돼도 우리 손해 본다. 또 3·1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 신문의 민중의 지도 역할 포기하자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서춘의 입장을 지지했어요.

손 : 그렇군요.

 

박 : 이 첩보에서 평가가 나와요, 정보보고에. 이후에 조선일보 지면은 ‘국민적 입장’으로 변했다는 조선총독부의 평가가 나옵니다. 조선일보 안팎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편집방식은 변하지 않았고 이러한 조선일보 지면의 변화와 함께 방응모도 실제 자기가 솔선수범해서 친일행각에 더욱더 나서게 된 거죠.

손 :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한 지 만 4년째 되던 1937년에 조선일보의 국민적 논조 즉 친일논조가 확립이 되었다 그런 얘기군요.

박 : 그렇죠. 이것은 신문사 내에서 비밀스런 회의에서 논조가 바뀌었죠. 근데 방응모는 아예 적극적 친일 행위로 나서지 않습니까. 같이 갔다는 거예요. 그 신호가 1937년 7월 29일 경성군사후원연맹의 위원으로 방응모가 직접 나서잖아요.

손 : 경성군사후원연맹, 이건 어떤 거죠?

박 : 이것은 황군(皇軍), 이젠 황군이에요,

손 : 천황

박 : 황군, 황군에 대한 원호, 상이군인 및 유가족에 대한 부조, 도와주는 거, 또 응소군인(應召軍人), 징집이나 지원병에 응하는 거죠, 이런 것에 대한 군인과 지원병 가족에 대한 부조, 이런 것들을 목적으로 조직된 철저한 친일단체입니다.

애국금차회=애국금비녀회
“전쟁 나니 고급친일파 부인들이 솔선수범 금비녀 모으기 운동”

손 : 그러니까 일본군을 후원하기 위한 단체라고 하면 되겠군요. 그 외 1937년도 8월 16일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 발기인으로, 그러니까 경성군사후원연맹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바로 거의 동시에 애국금차회 보름 만에, 애국금차회 이건 뭡니까?

 

박 : 애국금채회(愛國金釵會, 釵 비녀 차, 비녀 채)라고도 하는데 애국금비녀회예요. 한 번 들으셨을 거예요. 전쟁이 나니까 고급친일파의 주로 수작자 부인들이죠. 아주 수괴급 친일파의 부인들이 시국이 이런 때 우리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나, 우리 솔선수범해서 황군에게 국방 헌납해야 되겠다 해서 자기네들끼리 금비녀 모으기 운동을 해요. 금모으기 운동입니다.

손 : 금모으기 운동의 원조가 기분 나쁘게 여기 있었군요.

 

박 : 이렇게 금을 모아서 용산에 있는 조선군 사령부에 헌납하죠. 이 때 이것을 그림으로 그렸던 것이 이당 김은호의 금채봉납도 또는 금차봉납도이고 이것이 최초 친일 그림입니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손 : 운보 김기창의 스승이었고 논개 영정이라든가 그런 거의 원형을 제공한 이당 김은호, 친일 미술가. 예, 그랬군요.


 

박 : 그리고 나서는, 워낙 많으니까 많이 넘어가야 할 것 같아요, 보시면 알겠지만.

손 : 중간 생략 많이 했습니다, 지금.

박 : 이거 하려면 행적만 쭉 해도 방송 공해예요.

손 : 그렇습니다. 물 많이 마셔야 됩니다.

박 : 여기서 일련의 시국강연, 전국순회 시국강연을 하게 되다가 1938년에 들어가면 조선인 지원병제가 실시됩니다.

 

손 : 그러니까 그 전까지는 일본 본토에는 일본인들만 군인으로

박 : 갔죠.

손 : 징집이 됐는데

박 : 왜냐하면 멤버십카드가 없잖아요, 우리는.

손 : 멤버십카드가 없었는데

박 : 노예가 군대의무가 없잖아요.

손 : 그렇습니다. 원래는 자유민만이 병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도. 노예들은 감히 니들이 무슨…

박 : 사람이 아니라는 거죠.

손 : 그렇죠.

박 : 조선에도 특별히… 중일전쟁이 나니까 육군이 모자라잖아요.

손 : 그렇죠. 사람이 모자라니까

박 : 육군 특별지원병을 허락한다는 식이에요, 일본은. 이렇게 되고 방응모가 또 나서게 됩니다. 1938년 2월 9일 조선인 지원병제 실시를 축하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지원병제도제정축하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합니다.

손 : 2월 9일

 

박 : 이렇게 해서 일련의 활동들이 한편은 언론의 어떤 대표성을 가지고 사회유지자로서 지원병 독려활동에 나선 겁니다. 근데 이때 충돌한 게 뭐냐면 중일전쟁을 쭉 하면서 나가니까 미국이나 영국이 자극을 줬겠죠. 이렇게 하니까 일본에서 ‘영미격멸’이라는 구호가 나오기 시작하겠죠.

손 : 영미격멸

박 : 우선 중국에서 제일 큰 이익은 뭐예요. 영국이잖아요. 옆에 버마가 붙어 있고. 그렇게 하면서 배영국민대회가 열리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39년도입니다. 많이 건너 뛴 거죠. 39년 건너뛰기 전에 지원병 독려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방응모 개인의 행위일 수 있죠. 이런 지원병 독려활동 나올 때 1938년 6월 15일 자 조선일보 사설을 보면 여기에 맞춰서 방응모가 했던 행동을 뒷받침하는 사설 내용이 있어요. 그걸 한 번 읽어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손 : 신문에 꽂힌 사설입니다. 그죠. 읽어 볼게요. “황국신민 된 사람으로 그 누가 감사치 아니하랴. 다만 오늘이 개소식을 당하야 특별히 이번에 엄선으로 선발된 지원 병사들은 이와 같은 중대하고 심원한 의의를 가진 제도를 특별히 실시하는 최기에 있어서 제1차 훈련생인 만치 그 책임이 중차대한 것이다” 온갖 미사여구는 다…


 

박 : 오늘의 개소식이라는 것은 태릉에 육군지원병 특별훈련소가 만들어진 거예요.

손 : 지금의 육군사관학교가 있는 그 태릉 맞습니까?

박 : 예, 그렇죠. 그 터예요.

손 : 그 터입니까.

 

박 : 거기에 조선인 지원병이 계속 드나들며 개소식 하니까 여기에 맞춰 조선일보가 특별하게 사설을 낸 거예요. 그런데 그 시기에 방응모가 지원병 독려활동을 하고 있었죠.

손 : 그렇죠.

박 : 사주나 신문이나 짝짜꿍이었다는 사실이죠.

손 : 그렇군요.

박 : 이 부분에서 우리는 조선일보와 방응모는 별개의 조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죠.

 

손 : 개인의 친일의 행적과 조선일보 신문의 친일 행적이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라는 거군요.


박 : 그럼요. 그런 속에서 배영동지회(排英同志會), 수영이 아니라, 느닷없이 방응모가 영국 어떻게 알겠어요. 그런데 배영국민대회(排英國民大會)라든지 이런 걸 열잖아요.

손 : 지난주에 얘기를 했습니다. 배영, 영국을 배격하자.

 

박 : 그렇게 하면서 친일유림단체까지 나가요, 한학을 좀 했다고. 그렇게 해서 조선유도연합회(朝鮮儒道聯合會) 라고 있어요.

손 : 유도연합회면 업어치기 유도연합회가 아니라

박 : 자꾸 한자를 안 쓰다보니까 배영동지회라든지 배영국민대회라든지 조선유도연합회 할 때 스포츠가 아니고 전부다 친일단체, 친일행사예요.

손 : 이 유도는 유교 할 때 유도라는 거죠.

박 : 그렇죠. 전국적인 최대 규모의 유교 친일단체 거기에 평회원까지 하고 있죠. 이것이 1940년 1월 달의 일입니다.


 

손 : 1940년 1월 달

1940년 8월, 조선?동아 폐간…민족지에 대한 탄압이다?

“40년대에 물자부족이 시작됩니다. 태평양전쟁으로 나가기 직전이에요. 두 번째로 언론 통제를 해야 되는데 앵무새가 여러 마리 필요 없다는 거예요. 세 마리 앵무새는 시끄러워요. 한 마리면 돼요”

박 : 1940년 하면 뭐가 기억나죠? 조선, 동아가

손 : 1940년이면 뭐죠?

박 : 8월 달에

손 : 40년 8월

박 : 조선, 동아가 아주 운명적인… 폐간.

 

손 : 아, 네네.

박 : 1940년 8월 10일 자로 폐간되잖아요. 제가 앞에서 길게 얘기해야 될 이유가 있지만 많이 생략했지만 보고 들으시는 분들은 아실 거예요. 1940년 8월 동아, 조선이 폐간되는데

손 : 그래서 폐간된 것을

박 : 뭐라고 배웠습니까?

손 : 민족지에 대한 탄압이다

박 : 교과서에서 그렇게 나왔죠.

손 : 그렇죠. 그리고 동아, 조선은 그렇게 주장을 합니다, 자기네들은 그래서 민족지다, 탄압받지 않았느냐.

박 : 그런데 어떻게 돼요? 지금까지 쭉 했던 행적만 보더라도 폐간을 하긴 모범상을 줘야 합니다. 시국언론창달의 모범상을 줘야 되는데 폐간됐다는 것이 그게 문제잖아요. 납득이 안 가는 일이잖아요.

손 : 뭔가 떡고물을 줬어야 되는데

박 : 전에도 한 번 얘기한 적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40년대에 물자부족이 시작됩니다.

손 : 전쟁을 치르느라 물자부족

박 : 그다음에 태평양전쟁으로 나가기 직전이에요. 그래서 물자가 부족도 했지만 두 번째로 언론 통제를 해야 되는데 앵무새가 여러 마리 필요 없다는 거예요.

손 : 그렇군요.

박 : 세 마리 앵무새는 시끄러워요. 한 마리면 돼요.

손 : 총독부 기관지가 있는데

박 : 그렇죠. 지방신문 다 없애고 이런 것들에 다 연관되었고 돈도 듬뿍 줬잖아요.

손 : 그렇습니까?

박 : 그럼요. 이렇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걸 떠나서라도 그럼 좋다 민족지로서 폐간 당했다면 1940년에 방응모 행적을 한 번 보자는 거예요. 방응모 행적 보십시오.

 

손 : 볼까요. 1940년 2월 10일 조선일보사 주최로 황기2600년 기념 대강연회를 개최하여 조선군 참모 기타슌조(喜多俊三) 소좌

박 : 소령이죠, 지금으로 치면.

손 : 지금의 소령이죠, 조선군 참모군요. ‘지나사변과 국민의 각오’라는 제목으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전무이사 정교원이 ‘국민정신총동원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박 : 이것은 1940년 2월 10일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거예요, 친일행사를.

 


손 : 그리고 10월 16일, 폐간됐을 때 폐간되고 두 달 있다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개편하여 만든 전시 최대의 관변 통제기구인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참사로 선출이 됐네요.

박 : 방응모죠. 뭐가 도대체 민족 언론이고 탄압 당했단 말입니까.

손 :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참사로 응모한 게 아니라 선출

박 : 그렇죠. 국민총력조선연맹은 요즘으로 치면 민방위본부보다 더 강력한 거예요.

 

손 : 거기에 참사

박 : 국체의 본의의 기초하여 내선일체의 내실을 기하고 각각 직역에서 멸사봉공의 정성을 다하여서 온 몸으로 국방국가체제, 요즘으로 치면 총력안보체제 완성과 동아 신질서의 건설에 매진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최고의 전시총동원 기구의 핵심 간부가 되는 겁니다.



손 : 그래도 조선일보가 폐간되면 수입이 엄청 줄었을 텐데요.

박 : 저는 가슴은 쓰라렸다고 봐요.

손 : 가슴은 쓰라렸다.

박 : 이렇게까지 친일 했는데도 불구하고. 근데 사업가잖아요. 무대책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여기서 조광이 뜨는 겁니다.

손 : 친일잡지 조광

박 : 8월 달에 폐간이 되는데 40년 1월 달에 보면 조선일보사 임시중역회의에서 중요한 회의가 열려요. 조선일보사 출판부를, 신문사 내의 출판부를 독립하고 해산시켜서 주식회사 조광사(朝光社)로 개편하는 것입니다.

손 : 아, 발전적 해체군요.

박 : 그렇죠. ‘조광(朝光)’은 1935년도에 창간되었어요. 이 창간된 잡지를 조선일보사 또는 조선일보 부속기구가 아니라 독립시켜서 잡지로써 전망을 가지는 거죠.


손 : 계열사를 만들었다.

 

박 : 이미 조선일보가 폐간될 가능성이 있었다고 알고 있고 대책을 마련한 건지도 모르겠어요.

손 : 언질을 받았겠죠.

박 : 3월 달이 되면 조선일보사 출판부는 완전히 조광사가 되고 조광의 제작 겸 발행인으로 방응모가 취임하게 되고 41년 9월부터는 편집 겸 발행인으로 완전히 자기가, 조선일보는 없어졌지만 조광의 책임자가 됩니다.

손 : 그렇군요. 그러니까 지금 월간조선의 뿌리, 조광

박 : 그렇죠. 그 뿌리는 친일로부터 시작해왔고

손 : 그러면 조선일보사는 일단 없어진 거네요.

 


박 : 없어졌지만 부자는 망해도 3년 먹을 게 10년 먹을 거예요, 3년이 아니고… 하듯이 조선일보사는 신문을 털고 간 거죠. 잡지로 따로 하나 독립시켜 놓고 이 조선일보사는 동방흥업주식회사라는 기업으로 바뀌는 거예요. 방응모의 주특기가 금 캐는 거 말고 지난번에 봤죠. 30년대 토지개량 또 조림사업 이런 거 있잖아요.

손 : 간척사업도 하고

박 : 건축임대사업 이것을 하는 그런 기업으로 변신해 갑니다.

(중략)

손 : 한 장의 국채를 사는 것은 곧 군수조달에 그만큼 한 원조를 하는 것이요. 또 전쟁으로 국내에 흩어진 돈을 또 그만큼 국가에 회수시키는 것이다. 국민된 사람은 이때에 있어 한층 더 각오를 굳게 하여 한 사람도 빠지지 아니하고 국방충실을 위하여 일치 협력하자.

박 : 이런 정도는 강요에 의해 썼다고 말할 수가 없겠죠?

 

손 : 네.

박 : 자~ 근데 드디어 영미격멸을 외쳤는데

손 : 네.

박 : 드디어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했어요.

손 : 네.

박 : 자, 이렇게 되니까 또 이제는 진짜 방응모가 기명으로 글을 쓴 게 있어요.

손 : 그렇습니다.

박 : 바로 이제 ‘대동아전쟁과 우리의 결의’ 해서 타도 동양의 원구자, 원수들..

손 : 예.

박 : 이러한 글을 조광 그 42년 2월호에 싣습니다.

손 : 예.

진주만 공습에 대한 방응모의 글

“미국 태평양 함대와 영국 극동함대가 황군의 기습적인 일격 아래에 박멸되었다는 보도를 보고 그 순간 나는 실로 한없이 감격하는 동시에 통쾌하다는 느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지금 새삼스러이 설명할 필요도 없지만 미국과 영국, 이 두 나라는 바로 동양의 원고자이며 동양 전체의 죄인이다”

박 : 고거는 그래도 오늘날 이..자꾸 이게 반복되는 것 같지만 중요한 거니까

손 : 네.

박 : 적어도 진주만 공습을 어떻게 보는가? 방응모가.

손 : 예.

박 : 자기 기명글이에요.

손 : 볼까요?

박 : 예.

손 : 어. 자, 필승을 위하여 지키지 않으면 안 될 몇 가지 조건을 참고삼아…이걸 얘기 할까요? 아니면 그 전의 걸 얘기 하나요?

박 : 그 보다는 좀 이렇게 미국 태평양 함대가….

손 : 아~~

박 : 영국군 함대가… 이 부분부터…

 

손 : 알겠습니다. 아… 미국 태평양 함대와 영국 극동함대가 황군의 기습적인 일격 아래에 박멸되었다는 보도를 보고 그 순간 나는 실로 한없이 감격하는 동시에 통쾌하다는 느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지금 새삼스러이 설명할 필요도 없지만 미국과 영국, 이 두 나라는 바로 동양의 원고자이며 동양 전체의 죄인이다. 와~~

박 : 예~이렇게 되는….자, 이런 얘기를 통해서 우리가 봅시다.

손 : 예.

박 : 저, 이 전체적으로 얘기하게 되면 이 방응모는 파시스트죠?

손 : 네.

박 : 예. 이 파시스틉니다.

손 : 그렇게 해서 방응모가 결국은 채권도 사자 그러고

박 : 네네.

손 : 정말 진주만 공습에 대해서 정말 감격적인, 감격적인 어조로 만세를 불렀는데 그 귀결이 결국은 군수산업이군요.

박 : 네. 근데 이 군수산업이 43년도로 가잖아요?

손 : 네.

박 : 근데 군수산업으로까지 가기 전에 또 우리가 좀 뜻밖의 또, 재밌는 게 오늘날 제가 연상했을 때 전 아까 뭐냐면

손 : 네.

일제시대 조광의 발행인 방응모, 월간조선 사장을 지낸 조갑제
“조갑제의 사상적 원형들을 가만히 보면 방응모가 얘기하고 있잖아요”

박 : 우리가 파시즘 얘기를 했잖아요.

손 : 네네.

박 : 그때 저는 조갑제씨를 기억했어요.

손 : 어~~

박 : 조갑제씨가 책을 낼 때 보면 그, 뭐냐면 황인종과 백인종의 대결을 막 얘기하지 않습니까?

손 : 그렇군요~~

박 : 제 정신 아니게 살면서…

손 : 예.

박 : 그때 우리가 놀란 게 일본 파시즘의 어떤 원형을 보는 것 같았는데

손 : 예.

박 : 오히려 조갑제의 사상적 원형들을 가만 보면 방응모가 얘기하고 있잖아요.

손 : 월간조선의 사장을 지냈던 조갑제.

박 : 예.

손 : 그것이 일제시대 때는 월간 조광.

박 : 네. 물론 방응모와 이, 조갑제는 서로 만난 적은 없습니다만

손 : 예.

박 : 조광을 통해서 뭐냐, 파시즘적 사상의 맥락들이

손 : 예.

박 :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손 : 지금 사실은 우리가 많은 부분을 지금 생략하고 있는데

박 : 예.

손 : 시간관계상. 방응모가 기명으로 또는 방응모일 것으로…

박 : 방응모가 책임으로 있는, 발행인으로 있는…

손 : 발행인으로 조광의 논설들을…이것은 그야말로 일본인이 쓴 거다.

박 : 그렇죠.

손 : 일본에서도 뭡니까, 아주 체제순응적인

박 : 예 예.

손 : 심지어 태평양전쟁 때도 일본에서 반전 여론은 있었습니다. 분명히..탄압을 받아서 그렇지, 그런 양심적인 지식인들도 없진 않았어요.

박 : 네.

손 : 그런데 그야말로 어,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스러운 그러한 논조를 폈군요.

박 : 예. 그 마지막…더 일본인스러운 것이 국어를 상용합시다 라는 게 있었어요.


손 : 국어.


 
 

박 : 예. 국어를 상용합시다. 인데 그건 제가 좀 읽어 볼게요.


손 : 아, 예. 그러세요.

박 : 이거는 뭐냐면 1942년 6월호예요. 조광.

손 : 42년 6월호.

박 : 예. 6월혼데 여길 보면 오늘날 반도의 재출발은 일본정신의 체득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손 : 네.

박 : 그럼 일본정신은 동아 신질서건설의 기본원리요, 그 문화권 내의 지도원리다. 즉, 일본정신으로 우리가 무장해야 된다. 그것이 그 정신이 또 문화로 발전한단 얘기죠.

손 : 예.

박 : 그것이 나아가서는 또 세계 신질서건설의 지도원리다 이런 얘기였어요.

손 : 예.

박 : 그것은 뭐냐. 이것을 하루 빨리 체득하면 할수록 대동아공영권의 건설은 빨라지는 것이고 또 반도인의 황민화가 빨라지는 것이다. 반도인은 조선인을 낮춰서 부르는 거예요.

손 : 네.

박 : 내선일체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조센징이 아니라 반도에 있는 일본인이란 뜻인데

손 : 네~

박 : 비칭이죠. 낮춰 부르는

손 : 네~~

박 : 따라서 이 문화에 하루바삐 익히기 위해서는 국어의 학습에 힘써야 할 것이며 국어 상용에 적극적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렇게 얘기했어요.


 

손 : 이 국어가 일본언데

박 : 네.

손 : 1942년이면은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을 해서

박 : 예. 갈 때죠.

손 : 그러구서는 승기를 잡고

박 : 한창 승승장구.

손 : 예. 1943년인가요? 그때 미드웨이 해전을 통해서 예봉이 꺾이면서

박 : 네.

손 : 몰락이 시작되잖아요?

박 : 예.

손 : 42년 이면은 계속 이기고 있을 땝니다.

박 : 예. 그때 뭐냐, 이제는 뭐죠? 단순히 전쟁에만 나간다는데 조선인이 전쟁에 나가고 싶지 않잖아요?

손 : 예.

박 : 조선의 청년들의 정신을 없애기 위해서 뭐죠? 황민화를 당기기 위해서는 우리말을 없애고 일본어를 상용해야 된다 이거를 주장하는 거예요.

손 : 그 당시에 많은 가수들도 일본말로 취입을 하고 곡도 일본말로 만들기도 하고 그랬을 때였고 어, 그 만국기, 운동장에서 가끔 학교에서 운동회를 열 때

박 : 예예.

손 : 만국기가 휘날렸잖아요?

박 : 예

손: 그 만국기도 사실은 이때 나온 거라면서요?

박 : 그렇죠.

손 : 이게 전세계로 뻗어나가는… 그러고 보니까 만국기가 뻗어 나가는 이 모습이 어, 그거 일본 해군의

박 : 에, 물론 이게 전세계적으로도 유행을 했지만 적어도 식민지 조선에 있어서는 그것은 일본의 뻗어나가는 거였죠.

손 : 그렇군요.

박 : 그 당시 운동회 자체가 일종의 시국 행위였어요.

손 : 네.

방응모 친일의 최종귀착지, ‘군수산업’
방응모, 조선항공 공업주식회사 창립 발기인 참여

박 : 예. 이런 친일의 최종 귀착지가 바로 군수산업이었잖아요.

손 : 군수산업.

박 : 예. 그렇게 해서 뭐냐 1944년 9월 달에

손 : 예.

박 : 뭐냐 조선항공 공업주식회사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합니다.

손 : 예.


 

박 : 그러고 나서는 여기에 주주로 참여하고 감사역을 맡고 했는데 이 조선항공 공업주식회사에서 뭡니까? 해군 제1호기, 제2호기를 제작하고 1945년 2월 25일 진공식까지 거행합니다. 전문기업이잖아요?

손 : 와~~ 그러니까 비행기를 만들었단 얘기네요? 전투기를?

박 : 그렇죠. 네.

손 : 어~~

박 : 큰 독점이죠?

손 : 그렇죠. 군수산업이야말로 정말 짭짤한 건데

박 : 예, 독점 군수산업에 친일파들이 같이 모여서 만들어내고 그래서 같이 짬짜미 한 거죠.

손 : 그렇게 해서 해방을 맞이했는데

박: 그러니까 조선일보보다 더 큰 선물을 받은 겁니다.

손 : 그렇죠. 예. 어, 결국은 되로 주고 말로 받았네요?

박 : 예.

손 : 그러고 이제 해방 후의 방응모 이력을 보면 민족주의진영 혹은 진보적 민족주의 냄새가 난다고 하는데 이건 또 어떤 얘깁니까?

박 : 그거 해방 이후에 직함이 굉장히 많이 나와요. 인터넷 검색해 보면 많이 나오는데 뭐 대단한 것 같죠? 뭐 별거 아니에요.

손 : 별 거 아닙니까?

박 : 예. 한마디로 얘기하면 이게 행정 직함이 요란하지만 당시에 언론사 사장이란 지위가 있었잖아요.

손 : 예.

박 : 그 다음에 재력가이죠?

손 : 그렇죠.

박 : 이런 것들을 매개로 하는 어떤 그런 사회적 지위고 아직 친일청산의 문제에서 언론의 문제까지 안 갔었던 시기예요.

손 : 그래서 행세깨나 했다는 얘기군요?

박 : 그렇죠. 그래서 여기에 붙고 저기에 붙고 했고 그런 속에서 뭐냐면 돈이 있으니까 한독당, 김구선생 계열에도 돈도 대주고 그때는 집도 대줬잖아요?

손 : 아~그렇습니까?

박 : 그거 있잖아요, 왜? 갑자기 뭐냐…경교장.

손 : 경교장.

박 : 예, 그거.

손 : 아~~

박 : 경교장은 최창학이지만 이승만 쪽에다가 줄을 대기도 하고

손 : 아, 이승만 쪽에다가…

박 : 예, 그 다음에 또 여러 가지 돈도 내기도 합니다.

손 : 네.

박 : 예. 이런 식으로 했는데 결과적으로 그 결과는 뭐냐? 제2대 민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나갔지만 낙선을 해요. 경기도 양주 갑구에서.

손 : 음..일설에는 한독당. 한독당의 재정부장을 지냈다는 그런 얘기도 있습니다만.

박 : 물론 해방이후 이야긴데

손 : 예.

박 : 이거에 대해서는 그, 1947년부터 한독당 재무부장을 맡았던 신창균이란 분께서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고 거짓말이다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손 : 거짓말이다.

박 : 예, 예.

손 : 또 방응모가 8.15 해방 후에 조선일보를 복간해 계속 사장직을 맡아왔고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7월 6일 인민군에게 붙들려가고 9월 28일 개성 북쪽 서흥에서 트럭으로 강제 북송되던 중 미 군부의 공습을 받아서 죽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는 대요?

박 : 예, 그러니까 이..사실은 밝혀진 것도 오래 되진 않았죠?

손 : 네.

박 : 그, 납북되어서 행방불명 처리됐는데 이제, 결국은 이제 미군 공습에 의해서…아이러니 하죠?

손 : 9월 28일이면은 서울 수복일입니다. 그죠?

박 : 아, 그렇게 되는군요.

손 : 네.

박 : 예. 그렇게 해서 뭐 방응모는 어쨌든 고인의 죽음 자체는 우리가 안타까운 것이지만.

손 : 참, 비극적인 죽음이 되겠습니다.

박 : 비극적이지만 그 과거 행적들을 봤을 때 결코 민족언론하고는 별로 관계가 없다는 것이죠. 오히려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서 명확한 족적을 보이고 있다.

손 : 2010년 12월 방응모 관계자들, 조선일보 측은 친일 반민족행위자 결정을 취소해 달라면서 법원에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습니다.

박 : 예. 그니까 친일인명사전에는 당연히 들어갔고

손 : 네.

박 : 그 다음에 노무현 정부 때 만들어진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있잖아요?

손 : 네.

박 : 이것이 이명박 정부 때까지 지속되면서 이명박 정부 때 반민족 행위자로 공식 규정돼요. 국가에서.

손 : 네.

박 : 그 안에 뭐냐 위원들 가운데도 친일청산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런데도 방응모는 어쩔 수 없이 됐단 말이에요.

손 : 네.

 

박 : 너무 뚜렷하니까.

손 : 너무 뚜렷하니까.

박 : 네. 그래서 뭐냐하면 재판의 내용 중에 아까 말씀드렸던 조선항공업 창립 발기인 있잖아요.

손 : 네,

박 : 항공주식회사.

손 : 네.

박 : 이 부분만 친일 반민족 행위라고 보지 않고 나머진 다 인정한다.

손 : 지난주에 우리가 줄줄 읊었던 그 모든 행위가 사실이다.

박 : 물론..

손 : 친일행위다.

박 : 반민족위원회는 그거와 좀 다른.. 그 중에서 좀 추려서 냈지요.

손 : 네네.

박 : 낸 것들이 다 인정한다. 딱 한 개만 인정하지 않는다지만 이걸 마치 언론에서는 무리하게 기소한 것처럼 뭐 이상한 표현도 했습니다만

손 : 그렇죠. 예.

박 : 그렇지 않는 거예요.

손 : 예. 딱 한 곳만 패소판결 받은 거였는데

박 : 예, 예. 그러고 나서 이제 1심에서 끝나지 않겠죠?

손 : 네.

박 : 예, 그래서 또 이제

손 : 어, 고법에 항소를 했는데

박 : 고법에 항소했어요.

손 : 여기서도 이제 패소된 겁니까? 예.

박 : 예. 그래서 이제 2012년에 와서


손 : 예.

박 : 이제 방응모는 이제 1월 12일 날, 서울고법 행정 7부에서 이제 방응모 사장의 손자죠?

손 : 네.

박 :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행정안전부를 상대로 해서 뭐냐 친일 반민족행위 결정 취소청구 소송을 냈어요.

손 : 네.

박 : 예, 근데 재판부에서는 뭐냐면 아주 그냥 엄격하게 했어요. 민족적 지도자로서 비중이 큰 만큼

손 : 네.

박 : 그로인한 책임도 크다. 예, 그 다음에 고난의 시기를 겪은 민족으로서 그 역사를 반성하자는 입장이었을 때 방 전 사장의 여러 행태는 반민족특별법에서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유형에 속함을 부정할 수 없다 라고 함으로써 사실은 뭐냐하면 그, 친일 반민족행위자로서 법에서도 인정을 해 준 거죠.

손 : 알겠습니다. 이제 그 마무릴 해야 되겠습니다.

박 : 네.

손 : 어, 세 번에 걸쳐서 우리가 방응모…

박 : 두 번에 할려고 했는데 참, 너무 많았어요.

손 : 그래도 지금 우리가 건너뛴 게 많았습니다.

박 : 예, 이만큼 수두룩하게 가져왔다가 못했습니다.

손 : 한 30초에 걸쳐서 방응모에 대해서 평가 좀 해 주시죠.

박 : 예. 저는 방응모나 이런 사람들을 애초부터 친일파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손 : 네.

박 : 다만, 그가 광산왕으로만 그냥 살았더라면 모르겠는데 그가 조선일보를 인수하게 되면서 그는 사회적 입지를 꾀하게 됐는데 이 조선일보는 알다시피 항일 민족지로서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땅히 이러한 것을 인수 할 때는 돈이 많아서 인수하거나 자기 개인의 입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못 다한 안재홍 선생의 뜻을 계승하는 항일 민족지로서 자기의 책임을 다 해야만 비로소 민족언론이라 할 수 있는데, 뜻밖에도 그는 이 조선일보를 가짐과 동시에 친일 행위를 시작함으로써 항일민족지 조선일보에 치명적 오점을 남기면서 시작한 거죠.

손 : 네.

박 : 네. 이렇게 되면서 그는 끝내 친일행위로 일제 말까지 있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이, 해방 후에 그는 반성했어야 된다는 거죠.

손 : 예.

박: 아마 반성했더라면 다시는 조선일보에 대해서 친일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오히려 더 큰 문제는 당사자의 반성도 없었던 것도 문제지만 오늘날 그 조선일보가 오늘날 친일 기득권 세력과 함께 거대한 권력을 행사해서 조중동과 발맞추고 그 다음에 정치권과 발맞춰서 오히려 반성 대신에 친일 청산에 반대하고 오히려 수구냉전 독재에 옹호하는 이러한 또 한 번의 역사적 죄과를 짓는다는 점에서 저는 역사의 엄중함을 다시 알고 반성을 시작하면 언론으로서 거듭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손 : 알겠습니다. 아, 민족의식이 없고 역사의식이 없는 자본가가 얼마만큼 나중에 거대한 악의 뿌리를 잉태하게 되는 것인가를 방응모의 그러한 행적을 통해서 알 수 있었습니다. 어, 고맙습니다.

박 : 네. 고맙습니다.

손 : 오늘 마치겠습니다.

<2014-04-28> 국민TV


☞ 기사원문: 1940년 8월, 조선·동아 ‘폐간’…민족지에 대한 탄압이다?

※관련링크

국민라디오 ‘박한용의 라디오 백년전쟁’ 팟캐스트로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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