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제때 해결 못한 친일파 청산… ‘민족 문제’가 ‘정치 논쟁’으로
ㆍ박정희 정권 땐 금기어 80년대 ‘해전사’로 촉발 식민지근대화론과 연결 해방 70년간 해결 못해
ㆍ사실 규명·정의 실현 차원…친일파 문제 똑바로 봐야
해방 70년 동안 한국 사회의 가장 뜨거운 이슈 중 하나는 ‘친일파’ 문제이다. 1945년부터 시작돼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으니 말이다.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고 제국주의의 통치와 전쟁에 협력한 사람들을 정치무대에 다시 서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은 국민들에게 화사첨족(畵蛇添足)일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인 1947년 우익과 중도파 정치인들로 구성되었던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민족반역자, 부일협력자, 전범, 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을 제정했고, 대한민국은 헌법에 근거해 1948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조직했다. 미 군정도 1946년 소위 ‘추수폭동’이 부일 경력을 가진 경찰의 쌀수집으로 인해 일어났다는 점을 인정할 정도로 친일잔재 척결은 광복 후 한국 사회가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하지만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고, 친일파 척결의 상징이었던 김구마저도 ‘빨갱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안두희의 총탄에 쓰러졌다.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했던 인사들이 다시 정부의 요직에 올랐다. 일본 왕에게 충성했던 경찰과 군인들이 다시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역사학이나 정치학이 아닌 문학 전공의 선구적인 연구자 임종국이 1966년 <친일문학론>을 출간할 때까지 ‘친일’이라는 용어의 사용은 금기시되었다.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돼 압송되고 있는 경성방직 사장 김연수(가운데)와 ‘3·1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인 최린.
1907년 5월 구성된 친일파 이완용 내각. 이완용과 내각 대신들은 그해 6월 헤이그 특사사건이 발생하자 고종 황제에게 “물러나라”고 협박했다.
■ <해방전후사…> 통해 수면 위로
1980년 서울의 봄이 오자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통해 친일파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자연스럽게 1989년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6권으로 마무리될 때까지 친일파 문제는 핵심적인 논의의 하나가 되었다. 너무나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와 함께 친일잔재의 척결이 사회 전반에 걸쳐 사회적 담론으로 자리 잡았다. <실록 친일파>(1991)에서부터 <친일파, 그 인간과 논리>(1991), <친일파 죄상기> <친일파 99인> <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이상 1993) 등 저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영원한 금기(禁忌)는 없었다.
물론 부작용도 없지 않았다. 친일단체에 이름을 올렸다는 이유만으로 친일파 명단에 오르는 경우가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반민특위에서 규정한 바와 같이 친일파로 규정할 수 있는 철저한 기준이 마련될 필요성도 제기됐다. 그러나 친일잔재 척결문제는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명제였다. 어떤 사회보다도 식민지 시기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강했던 한국 사회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했다는 것은 ‘범죄행위’였다. 2012년 선거에서 대통령 후보 개인의 문제보다 박정희의 친일문제가 더 많이 회자됐다는 것을 보더라도 친일문제가 갖고 있는 사회적 폭발력을 알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2002년 발간된 <친일파를 위한 변명>은 사회적으로 큰 충격이었다. ‘친일’을 옹호한 것이다. 법원이 이 책을 ‘청소년 유해도서’로 판시하면서, 책은 더 유명세를 탔다. 마치 최근 <제국의 위안부>를 언론과 법원이 베스트셀러로 만들어준 것과 유사한 상황이 이미 10년 전에 발생했던 것이다.
<친일파를 위한 변명>이 해프닝으로 잊혀졌다면, 학계에서의 논쟁은 더욱 심각했다. 2002년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서양사)는 한 학회에서 과거사 문제에 대한 한국 사회의 ‘집착’을 비판했다. 발단은 2001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파 인명사전> 출간 선언이었다. 안병직은 이후 ‘과거사 규명, 무엇이 문제인가’(2005)라는 제하의 글을 발표하면서 한국 사회의 친일파에 대한 ‘강박관념’을 비판했다. 그는 한국 사회의 강박관념이 식민지 시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가리고 있으며, 과거사 법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과거사 청산 방식이라고 주장했다. 또 친일잔재 청산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식민지의 회색지대>(2003)를 출간한 윤해동 한양대 교수(한국사)는 ‘과연 친일파라는 모호하고 임의적인 대상을 깨끗이 청산해버릴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친일파 청산이란 ‘정신적 위안을 얻기 위한 도덕적 정언명령’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친일과 반일이라는 두 가지 대립된 틀로만 식민지 조선인들을 이해할 수 없으며, 다수의 회색지대가 존재했던 현실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동요하면서 협력하고 저항하는 양면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 사실 규명과 정의를 세우는 문제
안병직과 윤해동의 주장은 역사학계와 민족문제연구소로부터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이들의 주장은 소위 ‘식민지근대화론’이라고 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 이데올로기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친일파 인명사전>을 주도한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의 기준을 ‘자발성’과 ‘고위직’에 한정했기 때문에 ‘지원제’를 가장해 강제로 동원된 대학생들, 강제로 이루어진 창씨개명의 경우 친일로 규정하지 않았다는 점을 밝혔다.
친일파에 대한 논쟁이 중요한 것은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식민지 시대를 반일과 친일의 이분법적으로 해석함으로써 당시의 시대상을 객관적으로 분석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은 이후 식민지 시기 연구의 발전에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의 ‘개발’과 ‘근대’가 곧 식민지에 대한 수탈과 함께 ‘카이로 선언’에서 규정한 제국주의적 침략과 팽창을 동반한다는 역사적 사실을 망각한 채 강조된다면, 제국 일본의 식민지 정당화를 위한 논리와 다를 것이 없다.
둘째로 이 논쟁이 정치화되었다는 사실이다. 노무현 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특별법’은 친일파 논쟁의 한 축이 되었다. 해방 직후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60년간 해결되지 못하면서, 과거사 문제는 남남갈등의 한 이슈가 된 것이다. 한국 사회의 주류는 비주류에 의한 청산작업을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친일파 척결을 주장하는 그룹은 ‘좌빨’로 규정되었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제때 해결되지 못했을 때 이데올로기와 관계없이 민족적·국가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라는 본래의 성격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당사자 대부분이 사망한 상황에서 친일파 문제는 더 이상 처벌의 문제가 아니다. 학계에서는 사실 규명의 문제이며, 사회적으로는 정의를 세우는 문제이다. 더 중요하게는 친일파나 식민지근대화론 문제가 한·일 간 감정싸움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에 친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민족을 팔고 은사금을 받은 사람들, 탐욕과 폭력에 근거한 ‘제국주의 전쟁’에 협력한 사람들의 죄상을 밝히는 것이 더 중요한 임무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인류 보편적인 공감대를 얻어낼 수 있다. ‘매국’과 ‘전쟁범죄’의 진상을 밝히지 못할 때, 또 다른 매국과 전쟁범죄는 아무런 죄의식 없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 조선·동아일보 1985년 서로 “친일” 비방전
동아, 구독률 뒤처지자 먼저 ‘포문’
조선, 선우휘 논설고문 반격의 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친일파 논쟁은 1985년 4월1일 동아일보 창간 65주년 기념호가 발단이 됐다. 동아일보는 3면에 실린 ‘동아일보, 민족혼 일깨운 탄생’이란 조용만 칼럼(사진)을 통해 “총독부 당국은 신중히 고려한 끝에 민족진영 측으로 동아일보를 허가하고, 다음으로 실업신문을 내겠다고 하는 대정실업친목회 측에 조선일보를 허가하고 끝으로 신일본주의를 표방하는 국민협의회 측에 시사신문을 허가하였다”고 보도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조선일보를 ‘실업신문을 위장한 친일신문’으로 규정했다. 심지어 조선일보의 사장이 상업은행장이었기 때문에 민중들이 친일신문임을 알고 주식을 사지 않아 경영난에 허덕이다가 기회주의 신문으로 전락했다고 주장했다.
같은 해 4월12일자에서는 동아일보가 일본 제국에 저항하는 ‘국가의 적’으로 규정되었다는 기사(7면)를 게재하면서 조선일보가 일본에 협력한 일간지였음을 암시하는 내용을 포함했다. 당시 일본의 우익단체에서 발행한 신문에 “불온한 동아일보가 조선일보와의 합판을 강력하게 거부하고 총독부의 시책에 항거하고 있다”는 내용이 보도되었다며 동아일보가 민족지였음을 조선일보에 비교해 강조했다.
이틀 후 조선일보의 반격이 시작됐다. 논설고문 선우휘는 ‘동아일보 사장에게 드린다’는 글을 통해 동아일보의 친일적 성격을 지적했다. “오늘날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창간 후 조선일보가 재빨리 옳은 주장과 바른 기사를 써서 사흘이 멀다 하며 압수와 정간을 당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을 동아일보는 무엇이라고 설명하겠습니까? (중략) 논쟁이 격화되면 궁극적으로 인촌(김성수) 선생까지 욕보이는 결과가 된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이에 동아일보는 다시 4월17일 사고를 통해 “우리는 양지가 65년 전의 기록 시비로 더 이상 지면을 소비하고 자제를 잃을 경우 역사에 흠을 남기고 사회적 안정을 해칠 것을 걱정합니다’라고 하면서 논쟁에서 한발 물러섰지만, 조선일보는 4월19일 ‘우리의 입장: 동아일보의 본보 비방에 붙여’를 통해 동아일보의 초대 사장 박영효의 친일 논란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동아일보가 반박하지 않음으로써 이전투구의 논쟁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이상 정운현, <임종국 평전> 참조)
친일을 둘러싼 두 신문의 논쟁은 판매부수를 늘리기 위한 이전투구에 지나지 않았다. 1980년대 들어 조선일보 구독자가 급증하자, 위기의식을 느낀 동아일보가 조선일보의 전력을 비난하고 나온 것이다.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 아닌가? 친일 문제가 한국에서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를 잘 보여주는 해프닝이었다. 그래도 4·19 혁명 25주년에 실린 다음과 같은 조선일보의 마지막 기사 중 일부는 명문(名文)이라 할 것이다.
“우리 민족의 현대사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과 관계없이 항용 특정계파의 일방적 자기미화의 논리로 잘못 기술되곤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친일 및 부일 세력과 항일투쟁 세력을 역사적 가치에 따라 명확히 구분하지 못한 채 일제하의 친일이 해방 후의 지배세력으로, 그리고 반민족적 반민주적 세력이 민족세력으로 둔갑하는 오류를 반복한 데서 비롯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2015-05-05>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