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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으로 본 현대사](30) 인혁당 사건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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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검찰이 미리 선고 통지, 집행명령 없이 사형… “사법 암흑의 날”


■ 대법원 선고 18시간 만의 ‘사법살인’


인혁당 사건의 가족들은 걷잡을 수 없는 통분 속에서도 재심 청구를 논의하는 등으로 밤을 새우고, 날이 밝자 곧장 서울구치소로 달려갔다. 남편들에 대한 접견이 금지되었다는 교도관의 말에 무슨 이유냐며 항의를 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때는 이미 사형이 집행된 뒤였던 것이다(하재완의 부인 이영교의 말-2009년 4월9일자 한겨레). 다음날 재심 청구를 위해 변호사 사무실로 가는 길에 제부로부터 사형 집행 소식을 들었다는 가족도 있었다(우홍선의 부인 강순희의 말-2012년 9월14일자 경향신문).


놀랍게도,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바로 다음날인 4월9일 새벽, 여덟 명의 사형수들에 대한 교수형이 서울구치소에서 전격 집행되었다. 언론 보도에는 그 시각이 판결 선고 후 18시간 만인 새벽 5시였다고 했다. 군법회의 판결이 확정된 것이어서 형 집행장에는 군 법무장교와 군종장교(목사)가 입회했다. 당시 군목으로 참여했던 박정일 목사의 말에 의하면, 형 집행은 그날 오전 4시반경부터 8시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사형수들은 “난 억울하다. 언젠가는 모든 일이 밝혀질 것이다” “나는 유신체제에 반대한 것밖에 없고, 민족과 민주주의를 위해서 투쟁한 것밖에 없는데, 왜 억울하게 죽어야 되느냐” “우리의 이번 억울한 희생은 반드시 정의가 밝혀줄 것이다” 등의 유언을 남겼다. 누구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거나 용공적인 말을 한 사람은 없었다. 마지막 가는 길에 기도를 원하느냐는 군목의 말에 모두 묵묵부답이었다고 한다(2012년 9월12일자 한겨레). 내가 변호인이었던 여정남을 비롯해 여덟 분의 목숨이 그처럼 오랏줄에 매달리던 그 시각, 나는 같은 구치소 감방에서 새벽잠을 자고 있었으니,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일러스트 | 박건웅


■ 판결 전 선고통지서, 집행명령 도착 전 사형(?)


사형 확정 후 하룻밤 사이에 형 집행을 하는 것은 전례도 없고, 있을 수도 없으며 따라서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의 군법회의법에 의하면 사형은 확정일로부터 6개월 이내에 국방부 장관이 집행명령을 내리고, 그때부터 5일 이내에 집행해야 된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이것은 하룻밤 지나고 집행을 해도 좋다는 규정이 아니라 상당한 유예기간을 두고 사정 변경 등도 감안해 신중을 기하라는 뜻이다. 특히 사형수에게 재심 청구 등 마지막 구명의 기회를 준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므로 사형 확정 다음날의 형 집행은 법적으로도 피고인의 재심 청구권 박탈이라는 위법을 면하기 어려웠다.

의혹에 찬 반칙은 이 밖에도 속속 드러났다. 대검찰청에서 발송한 도예종을 비롯한 사형수들의 형 선고통지서가 비상고등군법회의 검찰부에 접수된 시점이 대법원 판결이 선고된 1975년 4월8일 오전 10시보다 8시간이나 빠른 오전 2시로 문서 접수인에 찍혀 있었다. 판결 선고 훨씬 전에 군 검찰부에 통지서가 갔다는 이야기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국방부 장관이 발부한 사형 집행명령서가 서울구치소에 접수된 시각은 4월8일 오후 2시로 되어 있었는데 누군가 ‘8’을 ‘9’로 고쳐 놓은 것이 역시 접수인에 훤히 보인다(국가기록원에 보존된 관계 문서에서 확인). 당초의 오후 2시 접수는 행정절차상 불가능한 일임을 뒤늦게 알고 하루 뒤로 날짜를 고쳤음이 틀림없다. 만일 그렇게 고친 대로라면 서울구치소에서 사형 집행명령서가 오기도 전에 집행을 한 것으로 되어 더욱 큰 문제가 된다. 이렇게 조급하게 허둥대면서까지 사형 집행을 서둔 속셈은 무엇이었을까? 대법원의 사형 판결은 기정사실 내지 통과의례에 불과했다는 점을 실증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 고문 상처 숨기려 시신 탈취 화장까지


시신의 처리에서는 더욱 통분할 만행이 벌어졌다. 유족들은 형장에서 나온 시신을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신부들의 도움으로 서울의 한 성당으로 옮기려고 했다. 그러나 당국은 서울 이외 지역 거주자의 시신은 서울에서 가족에게 인도하기를 거부하고, 각 거주지 시립병원으로 실어 보냈다. 송상진의 시신만은 어떻게든 응암성당으로 옮겨 안치하려 했으나 도중에 유족과 신부, 목사, 시민 20~30명과 경찰 300~400명이 대치 충돌한 끝에 시신을 빼앗긴 채, 어디론가 사라지는 차를 놓치고 통곡만 했다(<인혁당 사건에 대한 가톨릭의 현실 고증>, 이상우, ‘비록 박정희시대’(3)-반체제민권운동사, 중원문화, 1985). 송상진, 여정남 두 사람의 시신은 끝내 가족에게 넘겨주지 않고 경찰이 벽제 화장터로 싣고 가서 화장 처리하고 말았다. 전격적으로 처형을 한 것도 처참한 고문의 흔적 때문이었고, 그 중에서도 상처가 심했던 두 사람은 아예 시신 인도 자체를 거부한 것이라고, 모두들 통분했다. 당시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4월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 추방당한 성직자, 오글 목사와 시노트 신부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관련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두 분의 외국인 성직자가 있다. 조지 오글 목사와 제임스 시노트 신부가 바로 그들이다. 당시엔 누구도 함부로 인혁당 사건에 관해 입을 열지 못할 때였는데, 1974년 10월10일, 개신교의 목요기도회에서 오글 목사가 인혁당 사건을 공개적으로 문제 삼고 나섰다. 그는 그날의 설교를 이유로 중정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강제 추방되었다(<1970년대 민주화운동> 1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시노트 신부는 1975년 2월24일 구속자가족협의회 후원회 회장으로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함께 명동성당에서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어 인혁당 사건이 조작임을 밝히는 ‘인혁당의 진상은 이렇다’ 등의 성명을 발표하고, 그 사건이 조작임을 공개 성토하는 등 대정부 투쟁에 앞장섰다. 그리고 사형 집행 후 주검조차도 가족에게 돌려주지 않는 당국의 처사에 현장에서 거세게 항의하다가 경찰에 끌려갔고, 마침내 그도 강제 출국을 당했다.

인혁당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각계의 운동은 시일이 가도 끊이지를 않았다. 특히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개신교의 기독교교회협의회 그리고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를 중심으로 줄기차게 전개되었다.


■ 의문사위·진실위, “고문에 의한 조작” 발표


역사는 흘러, 1979년 10월, 박정희 왕조가 김재규의 총격으로 끝나는가 했으나, 전두환이 군사반란 및 내란을 일으켜 권좌(5공)에 오르고, 1987년 6월항쟁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노태우의 6공 등장을 막지 못했으며, 그와 합세한 김영삼 정부가 출현했다. 그에 이어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1998년, 인혁당 사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공동대표 이돈명·문정현)가 결성되면서 이 사건의 진상규명 운동이 본격화되었다.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2002년 9월12일, (인혁당 사건으로 복역 중 옥사한 장석구에 대한 직권 결정으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중정에서 정권 안보를 위해 고문 등에 의하여 조작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국가기관으로서는 처음으로 조작 의혹을 밝혀낸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해 재조사할 것을 정부에 권고하는 결정을 했다(<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1차 2권, 2003). 이어서 그해 12월, 인혁당 사건의 유족들이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고, 2005년 12월7일, 국정원 과거사건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도 중정이 이 사건을 무리하게 반국가단체로 짜맞추기 위해 수사과정에서 고문을 자행했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이와 관련해 당시의 한 위원은 ‘사건의 성격상 사형 집행은 박 대통령의 재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 법원, 30년 만의 재심 개시 결정


서울중앙지방법원(형사합의23부)은 같은 달 27일, 이 사건의 유가족들이 낸 재심 청구에 이유가 있다며, 재심 개시 결정을 했다. 사법살인으로 불리는 통한의 죽음이 있은 지 실로 30년 만의 일이었다. 재판장인 이기택 부장판사는 결정을 고지하기에 앞서 “피고인들이 이미 없어진 국가기관에 의하여 사형당해 지금 이 법정에 서지 못하게 된 점이 가장 가슴 아프다. 그분들의 명복을 빈다”고 소회를 밝혔다. 이어서 그가 “이 사건의 재심을 개시한다”는 결정 주문을 낭독하자 유족들은 소리 죽여 흐느끼기 시작했다고 신문은 기록하고 있다(2005년 12월28일자 경향신문).


재심 첫 공판은 2006년 3월20일 열렸다. 같은 재판부(이때 재판장은 문용선 부장판사)에 의해 심리가 진행된 이 재판에서는 의문사위원회의 조사결과와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여 기존의 유죄판결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검찰은 결심 공판 때 구형도 하지 못했다.


■ 32년 만의 무죄 판결, 그러나 불귀의 원혼들


2007년 1월23일, 이 재심 사건에 대한 1심 판결이 선고되었다. 재판부는 도예종 등 재심 피고인 8명 전원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다만 폐지된 긴급조치 위반 부분은 면소됐고, 긴급조치 및 유신헌법 자체가 무효라는 변호인 측 주장은 그 위헌 여부를 심사할 권한이 법원에 없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실로 32년 만의 무죄 판결이었다. 법정은 박수와 눈물로 뒤범벅이 되었다. 그러나 한 번 형사(刑死)한 억울한 영령들이 되살아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권력자에 의해 조작된 누명을 쓰고 ‘사법살인’에 희생된 원혼들의 명예회복의 길이 열렸다는 데서 그 의미와 위안을 찾을 수밖에 없는 판결이었다. 이 판결은 법원이 ‘과거사’에 얽힌 사법적 오류를 더 이상 고수할 수 없는 국면에서, 흔히 내세우는 ‘법적 안정성’보다 ‘사법 정의’를 중시한 결단으로 평가되었다. 또한 지난날 시국사건 등에서 억울한 유죄 판결을 받았던 사람들의 재심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되었다. 다만 법원이 지난날의 과오에 대해 좀 더 진정성 있는 사죄를 했어야 되지 않느냐는 아쉬움이 남았다.


 후 인혁당 사건 생존자 및 복역 중 사망자, 민청학련 사건으로 처벌을 받은 장영달 등 8명, 이해찬 등 5명을 비롯한 45명이 연달아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1959년의 진보당 조봉암(사형) 사건, 1961년의 민족일보 조용수(사형) 사건, 1974년 오종상의 긴급조치 위반사건 등도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대통령 박정희는 말년에 술에 취하면 인혁당 사건 처리를 후회하며 울먹였다고 한다. 내가 그 기사를 읽고, 술의 참회 유발적(내지 양심 회귀적) 효용에 대해 경탄했던 기억이 난다.




<2015-05-03> 경향신문

☞기사원문: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30) 인혁당 사건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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