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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으로 본 현대사](31) 김재규의 10·26 사건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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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궁정동 총격’ 내란살인죄 기소된 김재규 “민주주의 회복 목적”


■ 헬기에 놀란 사슴의 횡사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10월26일 오후 7시50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궁정동 안가 정보부 식당에서 박 대통령과 김 부장,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이 만찬을 하던 자리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때 김 부장과 차 실장 사이에 언쟁이 벌어졌고, 김 부장이 차 실장과 박 대통령에게 연달아 권총을 발사하여 두 사람을 사망케 하였다. 대통령의 궐위에 따라 최규하 국무총리가 그 권한대행에 취임했으며, 27일 오전 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이것이 사건 다음날 아침 7시20분, 김성진 정부 대변인이 발표한 세칭 ‘김재규 사건’ 또는 ‘10·26 사건’의 줄거리였다.


운명의 그날 오전 10시, 박 대통령은 충남 아산만에서 열린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했다. 이어 오찬 장소로 예정된 도고호텔 마당에 박 대통령이 탄 헬기가 내릴 때, 마당 한구석의 사슴 우리 안에 있던 사슴들이 놀라서 벽에 마구 부딪치다가 그중 한 마리가 죽는 흉사가 일어났다. 불길한 징조였다. (당시 동행했던 동자부 장관 이희일의 회고. <비록 한국의 대통령>, 조선일보사, 1993) 서울에선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사건이 나던 그날, 대통령 정무 제2수석비서관이던 고건은 청와대 사무실에 남아 있었다. 박 대통령이 돌아온 뒤 별 지시사항이 없자 청와대 본관을 걸어 나오는데, 길모퉁이에 있는 큰 백합나무 위로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더니 나뭇잎이 떨어져 내렸다. 그때 “꺅, 꺅, 꺅” 까치 우는 소리가 나기에 나무 위를 보았더니 15~16마리의 까치 떼가 두 무리로 나뉘어 싸우고 있었다. 청와대에선 처음 보는 불길한 광경이었다. (고건 <국정은 소통이어라>, 중앙일보 연재, 2013) 위와 같은 두 가지 불상사가 심어 준 예감은 바로 그날 저녁, 궁정동에서 현실이 되었다.


일러스트 | 박건웅


■ 박정희, 궁정동 만찬에서 피격


사건이 터진 10월26일 오전, 박 대통령은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하고 돌아온 뒤, 차 실장에게 궁정동 식당에서 만찬을 갖도록 하라고 지시했고, 그 연락을 받은 김재규 부장은 측근 부하들에게 음식 준비와 채홍사 노릇을 서두르도록 명했다. 그 다음에 일어난 사건 전모를 그 후(11월6일)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본부장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가 발표한 내용을 간추려 정리해본다.


그날 오후 6시가 좀 지난 시각에 만찬이 시작되었다. 참석자는 앞서의 네 사람과 시중드는 젊은 여인 두 사람, 이렇게 여섯 명이었다. 박 대통령은 그 무렵의 부마사태(대규모의 반정부 시위)는 중정의 정보 부재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냐며 힐책했다. 거기에다 차 실장도 중정의 무능을 과격한 말투로 공박했다. 이에 불쾌해진 김 부장이 흥분된 얼굴로 방에서 나온 뒤, 2층에 있는 자기 집무실로 가서 권총을 뒷주머니에 넣고 나와, 자신을 따라오던 중정부장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에게 “오늘밤 내가 해치우겠으니 방에서 총소리가 나거든 자네들은 (청와대) 경호원들을 해치워라”라고 지시했다. 방으로 돌아온 뒤에 중정 의전과장 박선호의 보고를 받기 위해서 다시 나갔다가 들어온 김 부장은 김계원에게 “각하를 똑바로 모십시오”라고 말한 뒤, 차지철을 쳐다보며 박정희에게 “각하, 이따위 버러지 같은 자식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올바로 되겠습니까?”라고 외치면서 권총을 뽑아 1발을 차지철을 향해서 쏘고, 이어서 1발을 박정희를 향하여 발사하였다. 김재규는 팔목에 총상을 입고 화장실 쪽으로 피신하려는 차지철에게 다시 한 발을 쏘고, 연달아 박정희의 머리에 또 한 발을 발사하여 두 사람을 모두 절명시켰다.


■ 남산 아닌 육본으로 갔다가 체포


이상이 궁정동 사건의 요약이다. 당시 현장에 불려온 두 여인이 총격을 당한 박정희를 부축한 일, 방 안의 총성을 신호로 박선호가 응접실에서 대기 중이던 청와대 경호처장과 부처장을 사살하는 한편, 김재규의 비서관, 경비원, 운전기사 등은 청와대 경호실 요원 2명을 사살한 일도 그 후 알려진 대로였다.


오후 7시43분경, 김재규는 현장에서 뛰쳐나와 미리 중정 차장보 김정섭과 함께 별채에 대기시켜 두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게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면서 박흥주까지 한 차에 태우고 정승화의 권유로 중정이 있는 남산 아닌 육군본부로 갔다. 국무위원과 군 수뇌들이 모인 다음 국무회의를 소집하고 국방부로 장소를 옮기는 과정에서 김계원의 귀띔으로 범행을 알게 된 국방장관과 육군참모총장의 명령에 따라 김재규는 27일 오전 0시40분 체포되었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그날 새벽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는 위와 같은 요지의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시해사건은 김재규가 집권을 노려 일으킨 범행이며 군이나 미국 CIA의 개입은 전혀 없었다”고 부연하였다.


■ 내란목적살인죄로 계엄군법회의에


육본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중령 전창렬, 소령 이병옥, 대위 차한성)는 11월26일, 김재규, 김계원, 박선호(중정 의전과장), 박흥주(중정부장 수행비서), 이기주(중정 궁정동 식당 경비원 조장), 유성옥(중정 궁정동 식당 운전사), 김태원(위 식당 경비원) 등 7인을 내란목적살인죄 및 내란미수죄로, 유석술(위 식당 경비원)은 증거은닉죄로 기소하였다.


이 사건을 맡은 군법회의 심판부는 재판장 육군중장 김영선, 심판관 육군소장 유범상, 이호봉, 오철, 법무사 육군준장 신현복(2회 공판부터 대령 황종태) 등이었다. 변호인단은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막강했다. 김재규 피고인에 대하여 김제형, 이돈명 등 변호인 21명(재판 도중 한때 김재규의 사선 변호 거부로 국선 변호인 안동일, 신호양 등), 피고인 김계원에 대하여 이병용 등 2인, 그밖의 전 피고인에 대해서 변호인들이 선임되어 있었다.


첫 공판(12월4일)에서는 인정 신문, 공소장 낭독, 진술거부권 고지 등이 있은 뒤 변호인단을 대표하여 김제형 변호사가 발언에 나섰다. “이 사건은 역사의 심판, 국민의 심판만이 있을 뿐, 현행 실정법 체계 안에서는 부적당한 재판인지 모른다. 그러나 법제도상 어쩔 수 없다면 재판과정의 절차적 적법성이라도 철저하게 보장되어야 한다.” 이어 김정두 변호사가 발언에 나섰다. “이번 비상계엄은 헌법상의 선포 요건을 갖추지 못한 면이 있다. 따라서 이 계엄군법회의는 피고인을 재판할 권한이 없다. 특히 현역 군인 군속이 아닌 김재규 피고인에 대해 군법회의에 재판권이 없다. 그에 대한 공소사실은 계엄 선포 이전에 행해진 것이므로 이 사건을 군법회의에서 재판하는 것은 헌법 제24조2항에 위반된다. 따라서 군법회의의 재판권에 대한 재정신청을 제기하는 바이다.” 그러나 대법원 전원합의부는 같은 달 27일, 위 재정신청을 기각하였다. (<법조 50년야사>, 법률신문사, 2002)


■ “김재규 장군…” “호칭 삼가라”


그러나 변호인들은 초반부터 강수를 연발하였다. 2회 공판(12월8일)에서는 사실심리에 들어가기 전에 변호인과 검찰관의 의견 대립으로 네 번이나 휴정이 되풀이되었다. 공판정에서의 녹취 요구, 비상계엄하에서 현역 군인(박흥주)은 단심으로 끝낼 수 있다는 군법회의법 규정의 위헌성 문제, 재판부 기피신청, 변호인에 대한 퇴정명령, 검찰관의 피고인들에 대한 분리심리 신청 등으로 쌍방은 날카롭게 대립하였다. 변호인 중에는 “본인은 김재규 장군의 변호인으로서…”라고 피고인을 깍듯이 예우하였다가 재판부로부터 경고를 받기도 하였다. 즉 법무사가 “변호인단에게 한 가지 경고하겠습니다. 피고인들은 검찰관에 의해 적법하게 공소가 제기된 자들이므로, 장군이라든가 부장이라는 호칭은 삼가기 바랍니다.” 이에 변호인도 물러서지 않았다. “재판이 유죄로 확정되기 전에는 피고인의 인격도 존중되어야 하므로 그런 존칭을 써도 무방하리라는 생각에서 장군이라는 호칭을 썼습니다.” 이번에는 검찰관이 거들고 나섰다. “…여기서 역사나 국민의 심판 대상이 된다고 하는 말은 곧 혁명으로 이끌어 가려고 하는 것에 하나의 동조 발언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 개인 보신 야망론 대 민주회복 대의론


이 사건에서 모두 궁금하게 여기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는 김재규의 범행 동기요, 둘째는 미국의 개입 여부였다.


공소장에 의하면, ‘김재규는 중정 부장으로서 자신의 정국 수습책이 거듭 실패하여 그 무능함이 노출되어 박 대통령으로부터 질책을 당하고, 인책 해임설이 나돌아 불안을 느끼는 한편, 군 후배이자 연하인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의 오만방자한 태도와 월권적 업무 간섭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은 차지철만을 편애하는 데 불만을 품고… 대통령 등을 살해한 후 정권을 잡을 것을 기도하고…’라고 하여 범행 동기를 김재규의 사적 감정에 의한 살인 및 집권 기도로 범죄 구성을 하였다. 그러나 김재규의 답변은 전혀 달랐다. 그는 비공개 재판에서 박 대통령 살해 동기로 ‘민주회복 혁명론’을 내세웠다.


김재규는 자기와 동향(경북 선산) 출신이며 육사도 동기(2기)일뿐더러 자신을 권력자로 입신시켜 주기까지 한 박정희에 대하여 시종 ‘대통령 각하’란 존칭을 써가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리를 버려야 했던 까닭을 막힘없이 진술해 나갔다. 그는 “유신체제 완화, 통일주체대의원이 아닌 국민 직선에 의한 대통령 선거, 긴급조치 해제, 1979년 9월의 부마사태 등과 관련된 건의를 거듭하면서 체제에 대한 국민의 저항과 국민의 불신을 말해주었으나 대통령은 물러설 줄을 몰랐다”며 자신의 ‘대의’(大義)를 내세웠다. (김재홍, <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 책보세, 2012)

법무사가 물었다.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서는 대통령을 살해할 수밖에 없었다?” 김재규, “예, 대통령 각하와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이라는 문제는 숙명관계가 되어 있었습니다.”

법무사, “대통령 각하만 희생되면 자유민주주의는 곧 회복된다, 이런 동기에서 했다?” 김재규, “대통령 각하께서 건재하시면 자유민주주의는 회복 안된다, 이 관계는 대통령 스스로가 그런 식으로 몰고 가셨다, 이런 말씀입니다.”


그 밖에도 김재규는 1980년 1월28일자 ‘항소이유보충서’ 말미에 ‘10·26 혁명의 동기의 보충’이라는 항목을 달고, 공개된 법정에서는 밝힐 수 없었지만 꼭 밝혀둘 필요가 있다면서, 최태민 목사가 총재, 박근혜양이 명예총재로 있는 구국여성봉사단과 관련된 부정과 원성을 거론하고, 육사생도로서는 용납될 수 없는 박지만군의 탈선 등에 관한 언급을 하여 주목을 받았다.



<2015-05-10> 경향신문

☞기사원문: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31) 김재규의 10·26 사건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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