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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사이드 진실을 좇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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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종청소 광기의 역사, 진실과 마주해야 상처 치유”


“악을 숨기거나 부인하는 것은 상처를 지혈하지 않고 계속 피 흘리게 하는 것과 같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달 12일(현지시간) 아르메니아 학살 100주기 특별미사에서 참혹한 역사를 직시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20세기는 ‘학살의 100년’이었다.

1915∼1923년 오스만 제국(터키의 전신)에 의해 아르메니아인 최대 150만명이 떼죽음을 당한 것을 시작으로 1940∼1945년 제2차대전 중 나치 독일이 약 600만명의 유대인을 살해한 홀로코스트, 1994년 르완다 후투족이 경쟁관계의 투치족을 최대 100만명 학살한 사건 등 광기 어린 집단 살육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역사학자 라파엘 렘킨이 제노사이드(genocide·집단학살)라는 용어를 만들 정도였다.


터키 아르메니아계를 대변하는 아고스지를 창간한 흐란트 딘크(왼쪽). 그의 조카인 마랄 딘크 아고스 기자.
/슈피겔 제공

이에 유엔은 1948년 ‘민족, 인종, 종교, 국가 등 특정집단을 겨냥한 의도적이고 체계적인 학살행위를 금지한다’는 협약을 맺었다. 하지만 제노사이드는 계속됐다. 사담 후세인 이라크 정권은 1980년대 18만명 이상의 쿠르드족을 살해했고 1990년대 유럽 발칸반도를 휩쓴 민족·종교 갈등에 따른 무력충돌로 20만여명이 희생되기도 했다. 금세기도 지난 세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중동에선 이슬람국가(IS)의 타 종파·종교인 학살이 자행되고 미국에선 흑백 갈등, 유럽·아프리카에선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증)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큰소리치는 가해자, 침묵 강요받는 피해자


교황이 꼽은 3대 제노사이드의 진실을 규명하고 이를 세상과 후대에 전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사람들이 있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감내해야 하는 이들은 “지난 상처를 괜히 헤집지 말라”는 주변의 만류와 “증거를 대라”는 가해자의 무시·협박을 무릅쓰고 역사의 진실과 마주하려는 용기를 보여준다.


마랄 딘크(여)는 터키 이스탄불에서 아르메니아어와 터키어로 발행되는 주간지 ‘아고스’ 기자다. 그의 큰아버지 흐란트 딘크가 설립한 아고스는 터키에서 유일하게 아르메니아계 소식을 전하고 100년 전 제노사이드 증언 등을 싣는 언론사다. 하지만 아고스 편집장이기도 했던 흐란트 딘크는 2007년 1월 “거짓된 보도로 국가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이스탄불 대로에서 16세 소년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그의 조카 마랄 딘크는 “8년 전에 비하면 터키 사회 분위기가 상당히 나아진 편”이라고 귀띔한다. 제노사이드를 주제로 한 세계 학술대회가 이스탄불에서 열리고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오르한 파무크가 스위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3만명의 쿠르드인과 100만명의 아르메니아인이 터키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말할 정도로 공론화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나치 전범 추적 단체 ‘사이먼 비젠탈 센터’를 설립한 사이먼 비젠탈(왼쪽). 사이먼 비젠탈 센터를 이끄는 에프라임 주로프 이스라엘사무소 소장.
/ 타임스 오브 이스라엘 제공


나치친위대(SS) 출신으로 93세의 나이에 지난달 21일 독일 북부 니더작센주 뤼네부르크 지방법정에 선 오스카 그뢰닝과 1962년 이스라엘에서 교수형에 처해진 ‘아우슈비츠의 악마’ 아돌프 아이히만은 닮은점이 많다. 둘다 끝까지 “도덕적인 죄는 모르지만 법적인 죄는 없다”고 항변했으나 나치 전범 추적 단체 ‘사이먼 비젠탈 센터’(SWC) 감시망에 포착돼 법의 심판대에 섰다.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 건축가 사이먼 비젠탈(1908∼2005)이 세운 이 단체는 1977년 설립 후 지금까지 1100명 이상의 나치 전범들을 법정에 세웠다. 에프라임 주로프 SWC 이스라엘 사무소장은 지난달 13일 공개한 연례보고서에서 “지난 14년 동안 나치 전범 102명이 유죄를 선고받았고, 98명이 기소됐으며, 전 세계에서 3500여명을 추적하고 있다”고 밝혔다.



1994년 르완다 내전 당시 집단학살 사건 자료를 수집하고 학살 주범들을 추적 중인 알랭 고티에(왼쪽)와 르완다 난민 출신 부인 다프로자. /
BBC 제공


◆“진실과 마주해야 상처 치유할 수 있어”


프랑스 동북부 랭스에 살고 있는 알랭·다프로자 고티에 부부는 15년째 르완다 학살사건 가해자들을 추적하고 있다. 부인인 다프로자는 1994년 후투족에게 일가친척을 잃고 혈혈단신 프랑스로 건너온 르완다 난민이다. 2001년 남편과 함께 파리에 ‘르완다를 위한 시민 대표 고소인 모임’을 설립했다. 유럽에 있는 르완다 전범자나 피해자들로부터 제보를 받아 학살 주범들의 행방을 찾고 혐의를 입증할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르완다 내전 당시 피해자들에게 ‘고문기술자’로 불렸던 파스칼 심비캉과 전 르완다군 장교 등 학살 용의자 25명을 제소했다.


다프로자는 “르완다에 가보면 ‘인종청소부’들이 의사, 성직자, 고위 관리로서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다”고 성토했다. 그는 “늦게나마 희생자들의 존엄성을 되찾아주고 싶은 마음뿐”이라고 말했다고 영국 BBC방송은 전했다.

1965년 인도네시아 군부가 ‘공산주의자’라는 미명 하에 자국민 100만명을 학살한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액트 오브 킬링’으로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도 제노사이드만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지난해 신작 ‘침묵의 시선’을 들고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아 “진실을 마주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야만 세상의 변화를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


송민섭 기자 stsong@segye.com

<2015-05-01> 세계일보

☞기사원문: [뉴스 인사이드] 제노사이드 진실을 좇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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