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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시간 차이만 있을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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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인터넷뉴스 초청 비전향 장기수 박종린선생 간담회 가져

지난 6월 5일 서산인터넷뉴스 접객실에 아주 귀한 손님들이 찾아왔다. 1959년 간첩으로 남파되었다 검거돼 34년 6개월을 복역후 1993년 형집행정지로 출소한 비전향 장기수 박종린 선생을 비롯한 민족문제연구소 이달호박사, 통일불교전국연합 김경운공동의장, 통일뉴스 류경환특파원이 호국의 달을 맞이하여 서산인터넷뉴스 초청 간담회를 가졌다.


박종린선생의 건강은 크게 나빠보이지는 않았지만, 오랜 옥중생활이 말하듯 백발이 성성한 83세 노인의 모습이었다.




위안부 문제를 비롯하여 독도 영유권 문제, 남북대치와 이산가족문제는 우리사회 밑바탕에 깔린 암울한 역사의 자화상이자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이기도 하다. 남북 최초의 역사적 합의였던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지 43년이 지났지만, 기대와는 달리 이산가족의 아픔은 해를 달리할수록 더해가고만 있다. 한분 두분 고령으로 ‘만남’ 이라는 평생의 한을 못풀고 세상을 떠나고 있는게 작금의 현실이다.



이산가족이야말로 분단사회가 얼마나 비인도적이며, 혈육을 갈라놓은 잔혹한 천형[天刑]의 산물임을 말하고 있다. 전후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이산의 아픔을 겪고 있는 세대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박종린 선생은 얼마 안남은 이산1세대의 산증인이자, 남북 분단의 아픔을 함께한 역사적 서술자이기도 하다.



이산가족마다 숱한 사연이 있겠지만, 1953년 휴전으로 인한 이산가족말고도 박종린선생처럼 전후 이산가족도 존재한다. 전쟁이 끝난지 6년후 선생은 북에 100일도 안된 딸을 남겨둔채 남파되었다가 남한당국에 체포되었다. 유신독재 시절에도 사상전향을 거부하며 34년간 복역하다 1993년 병보석으로 출소하였다. 무엇이 그토록 선생을 잡고 있었기에 그 오랜 세월을 견디어 냈을까? 선생은 자신이 남한에 온 것은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서가 아니라 조국통일을 위한 것이라는데 대해서는 아직도 변함이 없다.

비록 출소할때는 문서처리상 전향 형식을 취할 수 밖에 없었지만, 선생의 사상이 바뀐건 결코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런 이유로 선생은 2000년 1차 송환 대상자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출소한 선생에게 피붙이 하나 없는 남녘땅은 막막하기만 했다. 다행히 한 기독교 목사와 인연이 되어 전남 무안의 중고교 매점에서 일하게 되었고, ‘통일 할아버지’ 로 불리며 손주같은 학생들과 함께 하며 마음의 안식을 삼을 수 있었다. 평생을 악하지 않게 또 통일을 위해 산 것으로 비춰지다보니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지금은 인천에서 범민련 경인연합 고문으로 활동하며, 통일운동에 전념하고 있다.


선생은 통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단 시간에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어으며‘북에 두고온 딸하고 만나서 살다가 죽었으면 하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지만, 현재 정세로 봐서는 요연한 일이라며, 통일을 위해 작은 보탬이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것을 북녘에 있는 딸이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 이라고 전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분단의 세월을 살아가고 있는 이산가족의 마지막 희망은 정치권에서 말하는 적대적 또는 사상적 통일이 아닐 것이다. 어느 한 정권의 몰락이나 이로 인한 흡수통합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피는 물보다 진하다’ 는 말처럼 지극히 인간적인, 또 개인적인 이유가 있을뿐 어디에도 ‘다른 생각’ 은 존재치 않아 보였다.


비전향수는 우리와 같은 말을 하고, 같은 얼굴을 가진 ‘틀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약간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지만 한민족이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같은 마음이였다.

<2015-6-11> 서산인터넷뉴스

☞기사원문: “통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시간 차이만 있을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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