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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가 남긴 역설적 기회속에 반쪽 세계시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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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직후인 1953년 8월13일 전국 보육시설에 수용돼 있는 고아들의 운동회가 열렸다. 전쟁으로 인해 모두가 가난해진, 역설적인 평준화가 이뤄지자 신분 상승의 욕망이 교육열을 통해 터져나왔다. 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광복 70년, 책읽기 70년] ② 한국전쟁기의 책과 지식풍경

한국전쟁은 지식과 사상의 다채로움과 중간지대를 제거했다. 좌·우의 심문을 통한 구별짓기는 곧바로 죽음으로 이어졌다. 한 노인이 막대기에 태극기와 인공기를 함께 달고 진주한 군인들을 맞이했다는 이야기는 당시 민중들의 생존의 고달픔을 보여준다. 종북몰이의 과정에서 국민의례로 충성 증명을 요구하는 작금의 우리 사회는 한국전쟁의 망탈리테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 걸까?

한국전쟁은 삶의 터전은 물론 사회구조와 계층질서를 파괴하였다. 파괴로 인한 인민 대다수의 빈민화는 역설적으로 사회적 지위의 평준화를 초래했다. 폐허의 공터 속에서 계층상승과 이동의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진 것처럼 보였다. 파괴가 남긴 역설적 기회 속에서 꿈틀거렸던 생존과 상승의 욕망은 우선 교육열을 통해 터져나왔다.

■ 교육열과 전시 대학

많은 외신들이 한국전쟁 중의 3·4부제 수업, 한 학급에 100명 이상을 수용한 교실의 광경을 놀라움과 함께 타전했다. 전시의 와중에 초등학교 학령 아동 대부분이 정규수업을 받고 있다고 전하는 보도도 있다. 과장되었지만, 당대 교육열의 열도만은 짐작할 수 있다.

전시 대학은 교육열의 정점이었다. 서울의 대학들은 남쪽으로 피난 내려와 1951년 4월 부산·광주·전주·대전 등 4개 도시에 ‘전시연합대학’을 설치한다. 1951년 9월부터 각 대학은 단독으로 임시대학을 개설하였다. 서울대와 연희대(연세대)는 부산에, 고려대는 대구에 임시학교를 열었다. 1951년 10월에는 각 지방 중심지에 경북대, 전남대 등의 거점 국립대학들도 설립되었다.

입영면제 혜택을 준 전시 대학은 기득권 계층 자제의 병역기피 수단으로 악용되었다. 하나 전시 대학열은 분명 지식에 대한 갈증도 포함하고 있었다. 또한 지방의 거점 국립대들은 지역 사회의 독자성·자율성을 형성해가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이후 4·19와 산업화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전시 팽창으로 증가한 대학생 집단은 사회 변화의 중추로 등장하게 된다.

북한 역시 미래 세대에 대한 교육에서 남한에 뒤지지 않는 열의를 보였다. 북한 정권은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복구사업을 시작하며 민족간부와 과학기술 분야에 대한 지원을 시작했다. 김일성종합대학을 비롯한 각 대학과 각종 양성기관이 복구되고, 후방으로 재배치되었다. 1952년 초부터는 전선의 대학생과 교원 출신 군인들을 학교로 불러들여 학업을 재개했다. 1952년 12월에는 부수상 홍명희를 원장으로 하는 과학원을 창립하였다.

■ 혼돈의 책읽기

그렇다면 이 시기 사람들은 무슨 책을 어떤 경로를 통해 구해 읽었을까? 미증유의 혼란기였던 만큼 당시 지식의 풍경 역시도 혼돈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비평가 김현이 <한국문학의 위상>에서 묘사하는 국민학교 5학년 때의 전시 독서 풍경은 흥미롭다. 그의 동네에는 유식한 피난민들이 할 장사가 없어 벌여놓은 헌책방들이 숱하게 많이 있었다. 이 책방을 통해 그는 “이형식에서 오유경에게로, 허숭에서 임꺽정에게로, 그리고 오필리아에서 파우스트로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독서를 했다.

알다시피, 김현이 호명하는 이름들은 이광수의 <무정> <흙>, 김내성의 <청춘극장>, 홍명희의 <임꺽정>, 셰익스피어의 <햄릿>, 괴테의 <파우스트>의 주인공들이다. 조숙한 소년 김현은 친일파 이광수의 작품으로부터 적군의 부수상 홍명희의 <임꺽정>, 당대의 베스트셀러인 김내성의 <청춘극장>과 셰익스피어와 괴테 등의 서구문학을 넘나들면서 이후 대비평가가 될 문학적 소양을 쌓아갔다.

이 시기 대학생이었던 리영희도 흥미로운 증언을 남겼다. 그는 한국어로 된 김내성의 <백가면>, 방인근의 <마도의 향불>, 이광수의 <무정> <유정>, 박계주의 <순애보> 등과 더불어 셰익스피어와 영시 및 일본어판 세계문학독본 등을 읽는다. 통역장교로 복무하면서는 일본에 휴가 가는 미군 인편으로 일어판 <전쟁과 평화>와 영어판 도스토옙스키 작품을 구해 읽기도 한다.

부산으로 쫓겨간 대학들이

좌판처럼 판을 벌이고

지식인 난민들은 헌책방을 차렸다

대학생인 리영희는

김내성, 이광수 소설과 함께

일어판 ‘전쟁과 평화’와

영어판 도스토옙스키를 읽었다

한강다리를 끊고 도망갔던 이들이

서울로 돌아오자

남았던 이들은 알리바이 책을 내고

친일 최재서는 맥아더 전기를 쓰고

자유진영의 주체로 되살아났다

그의 지적 세계에는 일본어 독서와 한국어의 대중문학 독서, 영어를 매개로 한 구미 지식의 독서가 공존하고 있다. 그의 독서편력은 당대 지식과 책읽기의 혼종적 양상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내밀한 의식의 속살을 드러내는 일기를 일본어로 쓰고, 문학잡지 <인카운터>를 읽으며 세계를 호흡했던 김수영의 경우도 당대 지식인의 언어와 독서의 양태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 시기 기층대중들은 딱지본 소설과 ‘언문소설’들을 여전히 즐겨 읽었다. 춘원과 김내성의 작품 그리고 김용제의 <김삿갓 방랑기>와 같은 대중물이 유행하는 한편에서는 일본어 문고판으로 세계문학 및 지성사가 읽혔고, 금단의 좌익 지식도 꾸준히 유통·흡수되었다. 또한 <성조지> 등에서 미국 소식이 발췌 번역되어 읽혔고, 일본과 미국의 베스트셀러 목록 등에 대해서도 지속적인 관심이 기울여졌다.

서울이 인민군에게 함락된 직후인 7월2일, 정판사 위폐사건(조선공산당의 위조지폐 발행 사건)으로 정간되었던 <해방일보>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선인민보>도 속간되었다. 학생들을 모아 ‘교양강좌’를 열고 <해방일보>와 <조선인민보>를 교재로 선전을 벌인 뒤 자연스럽게 ‘궐기대회’로 넘어가 전원을 의용군에 자원하게 이끄는 대중집회들이 잇따랐다. 역사학자 김성칠은 국영백화점 간판이 걸린 ‘화신’에 문을 연 이북에서 온 책들을 파는 서적부에 들러 역사잡지 <역사의 제문제>, 단행본 <조선어문법> 등을 샀다고 일기에 적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인민군 치하의 서울에서는 <당사>니 <선집>이니 하여 술이 두껍고 값이 싼 책들이 많지만 “당원이 아니면 팔지 않는”, 정치적 지식에 대한 철저한 차별 대우가 존재했다.

그렇다면 낙동강 전선의 이남이었던 피난지 대구, 부산의 출판 풍경은 어떠했을까. 이곳 피난지에서 한국문화사에서 잊을 수 없는 중요한 잡지들이 여럿 새로 나왔다. 1951년 <희망>이 창간되고, 1952~53년에 <학원> <사상계> <여성계> <자유세계> <신태양> 창간이 뒤따랐다. 문교부 산하의 ‘국민사상연구원’의 기관지 <사상>이 4호 만에 폐간되자, 장준하는 <사상계>로 제호를 바꾸어 재창간한다. 장준하 부부가 잡지를 리어카에 싣고 서점에 배포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 잡지는 미국의 용지 제공을 받았으며, 초기에는 전혀 반정부적인 논조를 띠지 않았다. 이후 반공과 자유민주주의론의 설파를 통해 <사상계>는 한국현대사에서 민주주의를 대변하는 잡지의 대명사로 자리잡게 된다.




전쟁 중인 1952년 6월7일 기독교세계봉사회가 나눠준 음식을 들고 있는 어린이들 모습. 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 도강파와 잔류파(비도강파)

승만과 그 핵심 수하들은 정부를 믿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녹음방송을 남기고 도망갔다. 이들 ‘남하한 애국자’(도강파)들의 실상은 직장을 사수하라고 국민을 속이고 한강 다리를 폭파하며 자기들만 도망간 비겁자거나 아니면 그 국가의 명령을 어기고 직장을 이탈한 자들이었다. 그랬던 그들이 돌아와 정부의 명령을 충실히 따른 잔류자들을 부역자로 심문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박완서는 반공주의자들 안에서도 ‘도강파라는 특권계급’이 생겼으며 “친일파의 정상은 그렇게 잘 참작해주던 그야말로 성은이 하해와 같던 정부가 부역에는 그다지도 지엄할 수가 없”었다고 탄식한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 함락과 그 이후의 고난의 도피 생활을 묘사한 책들이 나왔다. 1950년 9월28일 서울 수복 직후에만 세 편의 수기가 출판되었다. 먼저 유진오, 모윤숙, 이건호, 구철회의 체험을 묶은 공저 <고난의 90일>(수도문화사, 1950)이 출판되었다. 이후 모윤숙은 <나는 이렇게 살았다-수난의 기록>(을유문화사, 1950)이라는 별도의 단행본을 펴냈으며, 기자들의 종군기인 <동란의 진상>(을유문화사, 1950)도 출판되었다. 이외에도 양주동·오제도 등 9인의 저명인이 인민군의 서울 점령 90일 동안 겪은 일을 엮은 <적화삼삭구인집>(국제보도연맹, 1951) 등이 이 시기를 증언하고 있다.

이들 잔류파들은 부역 심판의 광풍 속에서 자신들의 결백을 체험 수기를 통해 증명하고자 했다. 한편에는 자신들을 곤경에 밀어넣고 도망간 도강파에 대한 울분과 항변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외에도 국방부 정훈국 등에서 간행된 <전선문학선> <전쟁과 소설-현역작가 5인집>(계몽사, 1951), <전시문학독본>(계몽사, 1951), <전시한국문학선-시·소설> 등의 일련의 전시문학도 당대의 특색을 드러내는 독서물로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 친일에서 반공으로

한국전쟁은 모두에게 불행이었을까. 요시다 시게루의 말처럼 한국전쟁은 패전 일본에는 “신이 내린 선물”이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일본은 전후 부흥을 이루었다. 그들은 ‘대동아’를 대체한 ‘자유아시아’에서 미국을 대행하는 패자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국내의 친일파들은 어떠했을까? 친일문학의 대명사인 <국민문학>을 주재했던 최재서는 해방 이후 일체의 문필활동을 접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국전쟁을 맞으면서 <매카-더 선풍>(향학사, 1951)과 <영웅 매카-더 장군전>(작은 사진·일성당서점, 1952) 등 두 편의 맥아더 장군 전기를 각각 집필, 번역하면서 공적 영역에 재등장한다.

<매카-더 선풍>은 “지하실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동경방송에 나오는 ‘매카-더 콤뮤니케’를 듣던 작년 칠월 이래 매카-더 장군은 나의 생활의 일부였다”고 고백하는 서문으로 시작된다. 최재서는 피난하지 못한 인민군 점령의 지하에서 은신하며 동경에서 들려오는 푸른 눈의 쇼군 맥아더의 ‘옥음’을 유일한 희망으로 붙잡고 있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친일의 과오를 반공으로 씻어내고, 그는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정치적 주체로 갱생할 수 있었다. 두 편의 맥아더 전기는 이를 위한 일종의 글쓰기의 제의였다. 이후 그는 1950년대 <사상계>와 <새벽>의 중요 필진으로 활약했으며,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들의 희생을 기리는 에세이를 통해 냉전 자유진영에서 민주주의의 옹호자로 거듭나게 된다. 최재서의 사례에서 보듯이, 한국전쟁은 많은 친일인사들이 일본이라는 과거를 지우고 미국/서구라는 새로운 진영에 완전히 안착하게 된 중요한 계기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 새로운 시민은 냉전과 반공으로 제약된 반쪽짜리 세계시민이었다.

정종현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HK 교수

<2015-5-28> 한겨레

☞기사원문: 폐허가 남긴 역설적 기회속에 반쪽 세계시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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