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한일협정이 왜 문제지?
이번 8화에서는 한일협정을 다룹니다. 지금까지 연재한 한일과거사문제를 마무리짓는 부분이라 내용이 다소 길어졌습니다. 법률적인 설명에다 통계까지 있어 조금 어렵고 지루할 수도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최근 모 신문사에서 ‘친절한 기자 씨’를 동원(?)하여 사건 내용을 쉽게 풀어 설명한 사례에서 힌트를 얻어 나름대로 쉽게 이야기를 해 보려 합니다. 물론 잘 된다는 자신은 없지만 열심히 노력해 보겠습니다. |
1. 한일협정 문서공개의 뒷이야기
2005년 1월 17일, 오후 1시, 참여연대가 운영하던 느티나무 카페에서 기자회견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기자회견을 주관하거나 참여했지만, 그날처럼 많은 언론사의 플래쉬를 받아본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 날 외교통상부는 캐비넷 속에 꽁꽁 숨겨두었던 한일협정 관련 문서를 공개했습니다. 아침 10시에 외교통상부가 공식적으로 외교문서를 공개한다고 발표했고, 오후 1시에는 시민단체가 모여 공개된 문서에 대해 분석과 평가를 하는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시간적으로 보면, 몇 천 쪽이 넘는 문서를 분석할 여유가 없었겠죠. 실은 이틀 전에 외교통상부로부터 문서를 스캔한 파일을 입수하여 내용을 분석한 상태였습니다.(아, 이건 공식적으로 받은 겁니다) 회의록 5건이었지만 한일협정 관련문서 전체 가운데 꽤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이 문서를 분석하느라 장완익 변호사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김은식 당시 사무국장과 저는 꼬박 이틀 밤을 샜습니다.
기자회견장은 저희들과 강제동원 피해자들, 그리고 기자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이 꽉 찼습니다. 부산대에서 국제법을 가르치던 김창록 교수를 비롯하여 영산대의 최영호 교수와 일본의 한일협정 연구자 오타 오사무 선생 등은 회견에 참석하지 못하는 대신 검토의견을 전자우편으로 보내왔습니다.
l 2005.1.17. 한일협정 외교문서 공개에 따른 피해자단체·시민사회단체 기자회견
문서를 분석한 결과가 어땠는지 궁금하시죠? 내용을 말씀드리기 전에 외교통상부가 이 문서를 공개하기까지의 사연을 먼저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1990년대 들어 한국 사회가 민주화됨에 따라 일본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강제동원피해자들의 보상소송도 활기를 띠었습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제기한 소송을 비롯하여 미쓰비시와 신일본제철, 후지코시 등 전범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이 일본 변호사들과 시민단체의 지원을 받아 활발하게 추진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사법부는 여러 이유를 들어 피해자들의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들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바로 피해자들에게 ‘권리’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일본 사법부는 한국인들의 권리가 1965년 한일협정으로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이제 소송의 대상을 한국 정부로 옮겨와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매우 애매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해결되지 않았다는 말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정작 강하게 해결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만약 해결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한국정부의 직무유기인 셈이지요. 한일협정에 대한 한국정부와 일본정부의 해석이 다르고, 이에 따라 피해자 개인이 마땅히 받아야 할 미불임금이나 저금 등을 어디서 받아야 할지를 정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검토 끝에 소송을 한국으로 가져오기로 했습니다. 일본 정부가 모두 해결되었다고 하니 한국 정부의 입장이 무엇인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마침 미쓰비시중공업이 부산에 출장소를 내고 있어, 이를 근거로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습니다. 이 소송에서도 한국 정부는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재판부가 그러면 ‘한국 정부가 한일협정 때 개인청구권을 어떻게 다뤘는지 관련 문서(회의록 등)라도 내놔 봐라’고 열람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한국 정부는 거부했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사실 법을 악용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규정에는 30년이 지난 외교문서는 모두 공개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국가안보, 국가이익 및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할 우려가 있을 경우 ‘예외상황’을 적용해 공개하지 않기도 하지요. 대부분 원칙보다는 예외상황을 더 자주 적용해서 문서를 공개하지 않으니 요즘 유행하는 말로 ‘비정상의 정상’적인 행정이라 할까요.
아무튼 정부의 이런 태도는 피해자와 변호단을 자극하여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럼 좋다. 내 권리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알기 위해서라도 한일협정 문서를 공개하도록 소송을 하겠다.’
l 2002.6.28 정보공개 요청에 대한 외교통상부의 회신 공문
“이렇게 해서 2002년 10월
‘한일협정 문서공개 소송’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소송에서 외교통상부는 “문서를 공개하면 국내에 반일 감정이 일어나 우호적인 한일 관계를 해치고, ‘북일교섭’에서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이유를 들며 문서를 공개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황당하죠.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일관계를 전담하는 한국 외교통상부 동북아1과는 일본 외무성의 한국 지부냐?’라고 물었습니다. 일본이 주장할 법한 말을 한국 정부가 하고 있으니 말이 안 되는 거죠.
1심 재판부는 판결에서 문서를 지정하여 공개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외교통상부가 법원의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고 고등법원에 항소했습니다. 그런데 이후 갑자기 한국정부가 입장을 바꿔서 한일협정관련 문서를 전면 공개하고 항소를 취하했습니다. 일찍부터 강제동원피해자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결단으로 문서가 공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일 노대통령의 지시가 없었다면 문서가 공개되는데 또 얼마나 기다려야 했을 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국민의 알 권리에 관한 한 노무현 대통령을 계몽군주에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시대는 여전히 봉건적인 시대인데 군주가 계몽되어 계몽적인 정책을 폈다는 말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냐고요. 계몽된 군주가 죽으면 정책이 ‘도로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노대통령이 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행정부의 문서를 생산에서부터 관리, 그리고 공개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인 정비를 했습니다. 그렇기에 엄청난 양의 문서를 만들어냈던 거죠. ‘기록’의 시대인 조선조 이후 이렇게 기록문화가 창성했던 유례가 없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정보’ 자체가 권력이라고 할 정도로 중요시 됩니다. 과거 군사정권에서는 문서도 많이 만들지 않았지만, 만들어도 잘 보관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보여주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정보를 공개할수록 정권이 무슨 일을 하는지 사람들이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쁜 짓을 하기 어려운거죠. 그래서 가능한 숨기고 싶어 합니다. 그렇기에 민주화가 진전될수록 문서공개의 수준도 확대됩니다. 국민의 알 권리와 행정의 투명성이 보장되는 것이 민주주의 확대의 지표가 되기도 합니다.
2. 문서 분석결과
이야기가 많이 샜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분석 결과가 궁금하시죠?
5개의 공개문서를 검토한 결과는 당시 박정희 정부가 강제동원피해자의 개인청구권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잘 모르겠다’였습니다. 공개 된 문서가 대부분 3급비밀 수준의 문서로 고급 정보를 다루지 않았습니다. 특히 개인청구권 문제를 한일 양국이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혀줄 것으로 예상한 회의록(예 청구권법적문제소위원회) 등은 제목만 있고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진실을 알기에는 매우 제한적이었습니다.
다만 한일협정의 성격과 청구권 자금에 대한 양국 정부의 인식 차이(청구권과 경제협력자금), 그리고 개인청구권 문제에 대한 한국정부의 태도(국내에서 알아서 처리할 계획) 등 전체적으로 논의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는 정도만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이 문서를 통해 확인한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박정희 정부는 개인청구권 문제를 매우 소홀하게 취급했습니다. 최종 타결을 위한 협상에서 청구권 소멸 문제에 대한 법률적 검토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긴 했지만, 이후 어떻게 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최종적인 정치적 타결에 전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개인청구권 문제에 눈 돌릴 여유도 없었겠지만, 개인의 권리를 크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권력자의 철학도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둘째, 공개된 문서를 통해서는 소멸된 청구권과 소멸되지 않은 청구권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협상의 최종단계인 1945년 6월 1일부터 22일까지의 회의록이 빠져 있어 어떠한 논의들이 오고 갔고 어떻게 법률적인 검토가 이루어졌는지 전혀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양국의 협정안을 놓고 일본측은 제2조 청구권 소멸조항에 대해 강고한 입장을 취했고, 한국 측 수석대표는 재일재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으니 일본측 안을 수락할 지, 어느 정도 수정할 지에 대해 법적인 면에서 신중하게 검토하고 훈령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지시가 내려졌는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셋째, 청구권 자금에 대한 양국의 인식 차이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정부는 협상 마지막까지 청구권자금이 경제협력 자금이라고 주장했고, 한국정부는 배상적 성격을 갖는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김종필-오히라 각서에서 부터 이동원-시이나 합의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최종 협정문을 만들 때까지도 지속되었습니다.(제7차 한일회담 청구권관계 회의 보고 및 훈령 1965)
위 내용 중 피해자들이 가장 관심을 가졌던 것은 누구의 권리가 어디까지 해결되었나 하는 문제였습니다. 이는 한국정부가 일본정부에게 제시한 <한일간 재산 및 청구권협정 요강 8개항>(1952년 2월 21일 제출, 이른바 8개 청구항목) 가운데 5번 항 “한국 국민(법인 포함)의 일본 및 일본국민(법인 포함)에 대한 일본국채, 공채, 일본은행권, 피징용 한국인 미수금 및 기타 한국인의 청구권을 변제할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제6차 한일회담 청구권 관계자료 1963(한일회담 일반청구권 문제. 1963.3.5 외무부)’에는 한국정부가 제기한 8항목에 대한 구체적인 액수가 나옵니다. 그 중 한국정부는 피징용 한국인의 미수금으로 피징용자(군인·군속 포함)의 임금, 연금, 수당 등 약 2억 3,700만 엔을 제시했고, 피징용자의 피해에 대한 보상으로 사망자, 부상자, 생존자에 대해 3억 6,400만 달러를 제시했습니다. 이에 일본정부는 피징용한국인 미수금의 경우 쌍방이 납득하는 금액을 기초로 검토를 계속하고 싶다는 입장을 밝혔고, 군인·군속 242,341명, 조선인 노동자 667,684명이 강제동원되었다고 밝혔습니다.
한국정부가 계산한 이 금액이 무엇을 근거로 해서 나왔는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이른바 8개 청구항목을 만들어 구체적인 금액을 산출하면서 각종 자료를 활용한 것은 분명한데, 참고한 기초자료의 목록만 남아 있어 많은 아쉬움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한국정부가 협상에서 배상금을 요구할 때 구체적인 근거를 갖고 이야기해야 설득력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한국정부가 당연히 조사를 했을텐데, 안타깝게도 조사에 사용한 기초자료를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족문제연구소가 일찍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조선총독부 등 일본 자료를 기초로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배하면서 얼마만큼 수탈해갔는가’를 조사한 바 있습니다. 이 문제는 뒤에 다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위의 자료만 보더라도 한국정부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피해 보상액만으로 3억 6,400만 달러를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협상 결과는 3억 달러였습니다. 다른 모든 것을 계산하지 않더라도 결과는 터무니없는 액수였습니다. 그러니 한일협정에 대해 전 국민이 반대하고 나선 것입니다. ‘민족의 자존심을 싸구려 돈 몇 푼에 팔아먹었다’는 비난이 결코 헛말이 아니었습니다.
금액뿐만 아니라 협정의 성격도 문제였습니다. 한일협정은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기본조약) 외에 청구권협정 등 4개의 부속협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협정의 성격은 바로 기본조약에 담겨 있는데, 한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기본조약에 당연히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가 담겨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잘 아시다시피 그런 내용은 전혀 언급되지 않고, 그저 한 나라가 두 나라로 분리되었다가 다시 서로 교류를 체결하는 식으로 처리되었습니다. 그러니 당시 일본에서는 청구권의 성격, 즉 무상 3억 달러의 성격을 ‘독립축하금’이라고 비아냥거린 것입니다.
3. 청구권 협정의 그늘진 면
박정희 정권이 민족의 자존심과 이익을 뒤로 하고 계엄령을 선포하면서까지 반대여론을 억누르며 협정을 강행한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돈이 절실하게 필요할 정도로 정권이 위기에 몰렸기 때문일 수도 있고, 미국의 강력한 요구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해외수집자료 중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RA)의 소장 문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관련 문서들은 1965년 한일협정 체결을 전후하여 전개된 한·미·일 삼국간의 비밀협상 과정과 불법정치자금 수수, 독도문제 등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주로 미 CIA의 정보 보고 및 주한·주일 미대사관과 미국무성간에 오고 간 전문, 주한미대사관 비망록, 미 국가안전보장회의 문서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를 통해
한일협정 타결에 미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압력을 가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미국은 극동전략과 원조부담을 줄여야 하는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에 노골적으로 한국과 일본의 외교문제에 간섭했습니다. 미국은 한국에 대해 배상의 의미가 있는 청구권을 강조하지 말고 총액도 축소할 것을 강요하며 구체적 액수까지 조정했습니다. 한일 간의 협상에 문안까지 제시하는 등 선의의 중재자라기보다는 고압적 지배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관련 문서들은 미해결 과제로 남아있는 강제동원피해자 문제의 발단이 일괄 타결을 선호한 박정희 정부에서 부터 시작되었음을 증명해주었습니다. 사무엘 버거 전 주한미국대사의 미국무성 전문보고에 의하면 박정희 정부는 배상 요구보다는 원조를 포함한 일괄 처리에 관심이 있었으며 증거 자료가 없는 일부 청구권에 대한 포기의사를 먼저 일본 측에 전달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관련 문서 중 가장 주목을 끌었던 문건은 ‘한일관계의 미래’라는 제목의 1966년 3월 18일자 미 중앙정보국 특별보고서였습니다.
‘일본 기업들이 1961~1965년 사이 당시 한국의 민주공화당 총 예산의 2/3를 제공한 바, 각 개별 기업의 지원 금액이 각각 1백만 달러에서 2천만 달러에 이르며 6개의 기업이 총 6천 6백만 달러를 지원했다. (…) 민주공화당은 또한 일본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한국기업으로부터도 돈을 받았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정부방출미 60,000톤을 일본에 수출하는 과정에 개입한 8개의 한국회사가 민주공화당에 115,000 달러를 지불했다.’
l 1966.3.18. 미 중앙정보국 특별보고서(2012, 식민의 유산, 유신의 추억)
CIA 보고서의 내용대로라면 박정희 정부는 국교 수립 이전 적대적 관계에 놓여있던 일본의 기업자금을 토대로 수립되었으며 자금지원에 대한 보상을 위해 굴욕적인 한일협정 체결을 서둘렀던 것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일본 정부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짐작되는 일본기업들은 박정희 소장이 쿠데타를 일으킨 1961년부터 한일협정이 체결된 65년까지 지속적으로 민주공화당에 정치자금을 제공했습니다. 일제 36년 수탈의 대가로 받은 돈이 무상 3억 달러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한일협정 체결 이전에 박정희 정부는 그 1/5이 넘는 거액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한일회담이 굴욕적인 협상이 아니라 ‘대표단이 최선을 다한 협상’이라거나 한국정부가 다소 양보하더라도 ‘경제적 실리라는 전략적인 선택’을 했다는 식의 일부 평가는 전혀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 실리를 선택했다고 하지만 그것이 정말 실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누구의 실리인가요. 정권의 실리인가요 국민의 실리인가요.
경제개발에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이런 주장은 이승만 정부나 장면 정부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논리입니다. 앞선 정부와의 차이는 박정희 정부의 경우 탄생에서부터 정권의 정통성과 합법성이 매우 취약했다는 점입니다. 미국이 이 약점을 파고들며 집권을 인정하는 대신 한일협정을 강요한 것이며, 박정희 정부가 국내의 반대여론을 무시하고 계엄령 하에서 비준을 강행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한일협정이 갖는 태생적 한계를 잘 보여줍니다.
4. 협정에서 다루지 않은 것들
아, 목소리가 다소 높아졌네요. 이해해주십시오. 다시 청구권 문제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정부는 ‘한일협정으로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를 모두 해결했으니, 한국정부에게 가서 따져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국정부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도대체 누구 말이 맞는 걸까요. 일본정부의 말이 맞다면 한국정부나 피해자들이 억지를 부리는 게 되지 않겠습니까. 거꾸로 한국정부의 말이 맞다면 어떤 것이 해결되었고, 어떤 것이 해결되지 않았는지가 문제로 남습니다.
“반인도적 범죄와 같은
중대한 인권침해 행위는
국가 간의 조약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한국정부의 말을 들어보기 전에 먼저 밝혀둘 게 하나 있습니다. 국제 규범에 따르면 반인도적 범죄와 같은 중대한 인권침해 행위는 국가 간의 조약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일본정부의 주장을 받아들이더라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지요,
국제법상 중대한 인권침해와 강행규범(Jus Cogens)을 위반한 위법행위의 피해자에 대해 ‘가해국의 책임을 면하게 하는 조약은 무효다’라는 국제법상의 법리가 확립되어 있습니다. 1999년 8월 26일 국제연합 인권소위원회가 <무력분쟁하의 조직적 강간, 성노예 및 노예유사관행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여, 중대한 인권침해가 있는 군대’위안부’와 같이 무력 분쟁하의 조직적 강간 등으로 인한 성폭력 피해자가 보상을 받을 권리는 평화조약 등을 통해서도 소멸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또한 강제노동은 국제법상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 범죄행위이므로, 강제노동 피해자들의 구제를 받을 권리가 박탈되어서는 안 됩니다. 일본은 1932년 강제노동을 금지하고, 예외적인 경우에도 건강한 성년 남성으로 한정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강제노동조약’을 비준하였습니다. 따라서 한일청구권협정의 청구권 포기조항을 일본군’위안부’ 문제나 어린 소녀들에 대한 강제노동에 적용하는 것은 국제법상으로도 허용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본정부와 사법부는 인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보편적인 기준조차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 점을 분명하게 해둔 다음, 한국정부의 입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일본정부가 한일협정으로 모든 것을 완전하게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했다고 주장해 온 데 비해 사실 한국정부는 다소 애매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러나 2005년 8월 26일 ‘한일회담 문서공개 후속대책 관련 민관공동위원회'(이하 민관공동위)가 청구권 문제에 대한 의견을 발표하면서 그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노무현 정부는 한일협정 문서를 전면 공개한 뒤, 강제동원피해자들을 지원하기 위한 사전 조치로 청구권협정에 대한 정부의 입장을 밝혔습니다. 민관공동위원회의 발표는 청구권협정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밝혔을 뿐만 아니라 한일 간의 과거청산 문제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제공하는 판단이었던 만큼 그 의미가 매우 큽니다. 기념비적인 내용이어서 다소 길지만 소개하겠습니다.
한일회담 문서공개 후속대책 관련 민관공동위원회 발표 내용 ① 한일청구권협정은 기본적으로 일본의 식민지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간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② 일본군’위안부’ 문제 등 일본정부·군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청구권협정에 의하여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고, 일본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있다. ③ 사할린동포, 원폭피해자 문제도 한일청구권협정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④ 한일협정 당시 한국정부는 일본정부가 강제동원의 법적 배상.보상을 인정하지 않음에 따라 ‘고통 받은 역사적 피해사실’에 근거하여 정치적 차원에서 보상을 요구하였으며, 이러한 요구가 양국간 무상자금 산정에 반영되었다. ⑤ 청구권협정을 통하여 일본으로부터 받은 무상 3억불은 ‘개인재산권(보험, 예금 등), 조선총독부의 대일채권 등 한국정부가 국가로서 갖는 청구권, 강제동원 피해보상 문제 해결 성격의 자금 등’이 포괄적으로 감안되어 있다. ⑥ 청구권협정은 청구권 각 항목별 금액결정이 아니라 정치협상을 통한 총액 결정 방식으로 타결되었기 때문에 각 항목별 수령금액을 추정하기 곤란하지만, 한국정부는 수령한 무상자금 중 상당금액을 강제동원 피해자의 구제에 사용하여야 할 도의적 책임이 있다고 판단된다. ⑦ 한국정부는 일제 강점하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외교적 대응 방안을 지속적으로 강구해 나가며,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해서는 UN 인권이사회 등 국제기구를 통해서 문제제기를 계속한다. |
명쾌하죠. 역대 정권 중 이처럼 한일협정에 대해 분명하게 태도를 밝힌 정부가 없었습니다. 우선 한일협정의 성격에 대해 식민지지배 배상을 다룬 것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근거하여 두 나라가 분리되면서 발생한 재산권, 즉 서로 주고받을 권리를 정산한 협정이라고 했습니다. 다음으로 반인도적 불법행위는 계속 추궁하겠다고 했으며, 권리를 정산할 때 원폭피해자나 사할린 동포 문제는 해결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다시 말해 당시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협정 과정에서 앞서 말한 ‘8개 항목’ 중 5번 항에서 다루지 못한 문제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지난 회에서 말한 BC급 전범 문제도 포함되겠지요.
만약 한국정부의 주장대로 협정 과정에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었다면, 국제법상 ‘사정 변경의 원칙’에 따라 한국정부가 피해자를 대신하여 일본정부에 새롭게 협상을 펼치는 것이 국가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가 됩니다. 또한 일본군’위안부’ 문제처럼 해석상의 차이가 일어나 피해가 지속되고 있다면 역시 국가가 피해자를 대신하여 협상을 해야 할 의무도 있습니다.
2011년 8월 30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109명이 한국정부를 상대로 낸 헌법소원에서 한국 헌법재판소가 내린 판결도 국가의 이러한 의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2011년 8월 30일 헌법재판소 판결 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피해구제를 요구하고 있고, ② 일본정부는 한일협정으로 모두 해결되었다 주장하나 한국정부는 해결되지 않았다고 하여 서로 해석을 달리함에 따라 외교상의 분쟁이 발생하니, ③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해야 할 의무와 한일청구권협정 3조의 분쟁시 해결 규정을 지킬 의무에 따라 한국정부는 일본정부를 상대로 협상을 하라고 판결하였습니다. |
그리고 첫 화에서 소개한 2012년 5월 24일의 대법원 판결 역시 민관공동위원회의 의견 표명에 힘입어 나온 것입니다. 미쓰비시중공업과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한 두 소송은 대법원이 함께 다룬 데다 법률상의 쟁점도 같아 피해 사실만 제외하면 법률상의 문제는 같았습니다. 앞의 기사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식민지와 청구권 문제에 대한 재판부의 법적·역사적 인식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대법원은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 일본판결이 “우리나라의 국내법 질서가 보호하려는 기본적인 도덕적 신념과 사회질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서 승인할지를 판단해야 한다고 전제했습니다. 그런데 일본판결은 일본의 식민지배가 합법적이라는 전제 하에 일제의 국가총동원법과 국민징용령도 유효하며, 따라서 강제동원·강제노동도 합법적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일본 판결 이유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므로..그 효력을 인정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렇다면 대법원이 대한민국 헌법 정신을 근거로 일제강점기의 강제동원을 불법이라고 판단한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는 무엇일까요. 그건 여러분들도 한번쯤 보셨을 제헌헌법과 현행헌법의 전문에 나와 있습니다. 제헌헌법 전문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상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건립함에 있어서’라고 되어 있고, 부칙 제100조에서는 ‘현행법령은 이 헌법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한 효력을 가진다’
고 밝혔습니다. 즉 일제시대와 미군정기 때 시행되었던 온갖 법률들 가운데 헌법 정신에 비추어 맞지 않는 것(예를 들어 치안유지법이나 국가총동원법 등)은 폐기하고, 일부 민법처럼 시행되어도 괜찮은 것은 계속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청구권협정에 대한 대법원의 판단입니다.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라… 한일 양국 간의 재정적.민사적 채권. 채무관계를 정치적 합의에 의하여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고 규정한 뒤. “일본의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나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점등에 비추어 보면, 위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에 대하여는 청구권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이 소멸하지 아니하였음”
대법원은 청구권협정의 성격을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매우 획기적인 판단이죠. 그것도 보수적인 대법원이 이런 판단을 내렸다는 사실에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한일 간의 과거청산 문제에서 두 가지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던집니다.
첫째, 1965년의 한일청구권협정이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이 아니라 단순한 영토 분리에 따른 재산 협정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국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박정희정권이 협정을 강행하면서 내부적으로는 ‘배상’을 받았다고 주장한 논리를 법적으로 부정한 것입니다. 둘째, 강제동원·강제노동 등 불법행위는 청구권협정에서 다뤄지지 않았고, 따라서 그 피해에 대한 책임은 여전히 일본(정부와 기업)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명쾌한 판단 하나가 피해자들이 가슴 속에 맺혔던 한을 풀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고 법적 구제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5. 한일협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 2005년의 ‘민관공동위원회’가 밝힌 의견서가 갖는 의미를 아시겠죠?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이 일본군’위안부’와 강제동원 피해 문제에 대해 매우 중요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게 하는데 근거를 제시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문제가 많은 한일협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한일협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몇 가지 방안이 있습니다. 첫째, 한일협정을 전면 개정하는 것입니다. 이건 이론적으로는 가능한데 현실적으로는 실현가능성이 거의 없죠. 문제제가 차원이라면 가능합니다. 둘째, 한일협정의 내용은 그대로 두되 한일 양국이 해석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서로 해석이 다르죠. 따라서 상호 협의하여 함께 해석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이건 전자보단 약간 더 현실성이 있죠.
그러나 둘 다 일본이 응하지 않을 겁니다. 한국정부도 의지가 없고요. 한일관계가 단순히 한일관계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의 국제질서와 연결된 문제여서 현실성은 매우 약합니다.
그렇다면 한일협정의 성격은 그대로 두되 해결하지 못한 문제만 분리시켜 해결하는 방안도 있습니다. 협정 당시에는 논의하지 못한 문제를 다시 협상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국제법상 ‘사정변경의 원칙’을 응용하는 것이죠. 이 원칙을 적용하여 문제를 해결한 외국 사례를 잠깐 보겠습니다. 독일은 나치 독일의 프랑스 국민 박해문제를 놓고 1960년 체결한 조약에 근거해서 프랑스에 배상금을 지급했습니다. 그러나 약 20년 후 프랑스가 강제징집자 등에 대한 문제가 새롭게 제기되자 독일에 추가 배상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독일은 1981년 3월 독불 이해증진 명목으로 ‘독불이해증진재단 에 대한 출연조약’을 만들어 2억5천만 마르크를 출연하였습니다. 협정을 부분 개정한 것은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정치적 타결을 이끌어 낸 것입니다.
일본정부야 전혀 의사가 없겠지만, 한국정부가 일본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도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한다면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물론 지금 돌아가는 사정을 보니 그저 상상에 지나지 않긴 합니다만.
최근 어처구니없는 동영상이 떠돌아다니고 있어 황당해 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의 아베정부가 한일협정 때의 무상 3억 달러 자금으로 포항제철(현 포스코)과 경부고속도로를 만들어 한국의 경제발전에 공헌했다는 주장을 담은 동영상을 만들어 전 세계에 퍼뜨렸습니다. 참으로 뻔뻔하죠. 남의 나라를 침략해 주권을 강제로 빼앗은 것을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는 식의 주장을 대놓고 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막가자는 거죠. 그런데 한국정부는 뭘 하는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걸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속 터집니다.
벌써 20년이 지났네요. 1996년, 식민지배 합리화론이 학문이라는 치장을 하고 국내에 유포되기 시작할 때 민족문제연구소가 고려대 한국사 대학원생들과 함께 일제하에서 어느 정도 수탈이 있었는지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식민지배 합리화론의 핵심은 식민지 지배기간 동안 일본은 조선에 상당한 자금을 투여했기 때문에 수탈보다는 발전에 기여했다는 주장입니다. 실제로 패전까지 공채, 보충금, 일본인 민간자본 등을 합해 총 70억 엔 정도가 일본에서 들어왔습니다. 그 돈이 무엇을 위한 돈이었는지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 논쟁과는 별도로 ‘그럼, 일제가 실제로 얼마만큼 수탈해갔는가’만 일본 자료를 통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매우 일차적인 차원에서 통계를 확인해보려는 것입니다. 일제가 조선을 지배하면서 수탈하거나 고갈시킨 재산이 얼마인지 전체적인 규모를 알려주는 자료는 아직 없습니다. 뒤에 제시한 두 개의 표는 일본정부의 통계자료를 근거로 자금과 물자의 수탈 규모를 정리한 것입니다.
재정과 금융 부문에서는 각각 48억 엔과 303억 엔이 유출되었으며, 물자수탈액은 약 148억 엔이 됩니다. 총 599억 엔을 1945년의 1달러 당 15엔으로 환산하면 약 33억 달러가 됩니다. 1965년에 받은 무상 3억 달러는 턱도 없는 금액임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1962년에는 달러당 360엔이었기 때문에 3억 달러라는 액수를 식민지배의 배상으로 받았다라고 말하기에는 낯 뜨겁죠. 물론 한국정부도 조사는 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자료는 일본이 가지고 있고, 한국에 있는 자료조차 전쟁으로 많이 없어져 제대로 된 통계를 내지 못했을 겁니다. 지금 다시 옛날 통계를 보니 계속 보완하고 수정할 필요가 있네요.
그런데 이렇게 돈 이야기 하는 것 참 재미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한일협정을 말하면서 가장 중요한 사실을 놓칠 때가 많습니다.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배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는지를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몇 가지 사례를 보면, 동학농민전쟁 때 학살당한 수 만 명의 농민군은 제외하더라도 의병전쟁 때의 피살자 최소 17,000여 명(조선주차군사령부, 조선폭도토벌지), 3·1운동 때 사망자 7,500명, 부상자 15,000여 명, 수감자 47,000 여 명(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1920년의 간도학살사건 당시 살인 3,106명, 체포 238명, 강간 76명, 소각 2,507호(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때의 한국인 피학살자 1,500~2,700명(강덕상, 관동대진재), 1945년 8월 24일 우키시마호 폭침으로 한국인 승선객 3,735명 중 524명(일본정부 공식 발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한국인 원폭피해자 약 4만 명(한국보건사회연구원 1991년 보고서), 그리고 일제의 감옥에서 죽었거나 밀정에게 살해당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피해배상은 아예 거론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죽음을 돈으로 말한다는 것 자체가 모욕이지만, 제대로 된 국가라면 당연히 일본정부와 협상할 때 추궁했어야 할 내용들입니다.
이런 문제를 제대로 제기하지 않았고, 협정문에 반영하지 못했기에 한일협정이 굴욕적인 협정이며, 매국협정이라는 비난을 듣는 것입니다. 다행히 한국 사법부가 한일협정의 청구권협정을 식민지배의 배상을 다룬 것이 아니라 재산에 관한 권리를 다룬 협정이라 해석함에 따라 언제든 이 문제를 제기할 여지는 남겨 둔 셈입니다.
“올해가 한일협정 체결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러나 식민지배가 남긴 상처는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남북은 분단되어 있고, 피해자들이 요구하는 사죄와 배상은 실현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황은 더 나빠져만 가고 있습니다. 수십년 간 식민주의를 극복하고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노력해왔던 한일 간의 시민연대가 더욱 더 강화되고, 나아가 국제적인 협력이 절실히 요구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끝으로 이번 프로젝트를 후원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최근 일본이 ‘근대문화유산’으로 신청한 장소들 중에는 전범기업인 일본제철의 야하타 제철소, 미쓰비시 계열의 탄광과 조선소 등 강제동원 피해의 현장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강제동원피해자인 90대의 노인들과 재판을 벌이며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기업의 시설이 ‘세계의 유산’으로 지정되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2015.5.11. 관계자와 면담(Yajima tsukasa 촬영)
5월7일~12일, 독일의 베를린과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린 ‘야스쿠니반대독일행동’에서 여러분의 후원금으로 제작한 영상DVD와 영문 책자를 1차로 배포했습니다. 그리고 일정 중에 한국과 일본, 독일의 참석자들이 공동으로 ‘일본 전범기업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문제에 대한 의견서’를 의장국인 독일의 외무성에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이 자료들은 유네스코 21개 회원국에게도 메일로 전달했습니다.
저희는 일본의 주변국에 대한 침략과 식민지지배, 한국인·중국인·대만인과 연합국 포로에 대한 노예노동의 기록을 함께 남기지 않는다면 일본의 ‘근대산업유산’이 유네스코에 등재되는 것에 반대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명확히 밝혔습니다. 이후에도 국제노동기구(ILO)와 유엔 인권위원회 등에도 관련 자료를 제출하려 준비하고 있습니다.
처음 이 연재를 시작할 때 저희 관계자와 필진들은 여러가지 고민을 했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는 ‘시민들이 우리의 싸움에 관심을 가져줄까, 원고 개인의 재판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줄까’하는 점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피해자이기 때문에 오히려 ‘피해를 입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더욱 고립시키게 되는 것은 아닐까하는 걱정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첫 연재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피해를 당한 본인이 죽는다고 해서 피해사실이 사라지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는 사회와 역사가 기억하게 되고 책임을 추궁하는 힘은 더욱 매서워 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희들의 노력이 올바른 한일관계를 만들고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앞으로도 ‘일제강제동원피해’ 문제에 관심을 가져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여러분들의 깊은 성원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영상의 엔딩에 들어갈 후원자 명단과 관련하여 메일로 개별적으로 연락드리겠습니다.
<필자소개>
한국근현대사를 전공하는 연구자로 일제의 지배정책과 친일, 강제동원피해자, 일본역사왜곡 등 과거청산 문제와 씨름하면서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집행위원장, 한일시민선언실천협의회 운영위원장과 과거청산 전문잡지 『역사와 책임』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기억을 둘러싼 투쟁』 『기로에 선 촌락』을 썼으며 『친일인명사전』을 비롯하여 『친일파란 무엇인가』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책임을 묻는다』 『일제 식민지 지배의 구조와 성격』 『일제하 전시체제기 정책사료총서』 『친일파99인』 등을 함께 기획하고 썼다.
- 12801597.jpg (87.36 K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