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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으로 본 현대사](36)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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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사형수가 대통령, 대통령이 사형수 된 나라… 격동 거치며 역사 바로잡혀 나간 대한민국”

■ 전향 간첩 망언에 2심 최후진술 거부


DJ에 대한 1심 사형 판결에 국내 언론은 비상계엄하의 족쇄를 벗어나지 못했다. 반면, 해외 여러 곳에선 놀라움과 비난의 목소리가 비등했다. 미국의 에드먼드 머스키 국무장관은 “미합중국은 김대중씨에게 극형이 내려진 데 대하여 심히 우려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서독의 겐셔 외무장관은 유럽공동체의 회원국들에게 한국 정부에 항의할 것을 권고했다. 그 밖에도 동독, 베이징, 모스크바의 당국이나 언론들도 한국의 군부를 비난했다.


항소심(재판장 유근환 소장)에서 군 검찰은 조총련계 간첩에서 전향했다는 윤여동이란 사람을 증언대에 불러 앉혔다. 일본의 ‘한민통’이 반국가단체이며 DJ가 그 수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부(副)부장 동지께서’ 운운하는 등으로 북한식 어투를 써가며 ‘DJ 사형’에 북을 치고 나섰다. 이에 참다못한 김상현이 질타하는 목소리로 외쳤다. “여기가 어느 나라 법정인데, 언어 순화조차 안된 간첩을 내세워 민주인사를 해치는 증언을 시키다니, 도대체 이게 될 말이오?” 그러자 문익환도 일어서서 “이건 내란이다! 내란!”이라고 고함을 쳤다. 거의 동시에 다른 피고인들도 일제히 일어나 “이게 뭐냐”며 재판부에 항의했다. 법정은 순식간에 소란에 휩싸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검찰 측은 윤여동을 비호하여 도망치듯이 뒷문으로 빼돌렸다. 피고인들은 재판을 거부하는 뜻으로 전원이 2심 최후진술을 거부했다. 11월3일, 항소심 선고공판이 열렸다. DJ에게 1심과 마찬가지로 ‘사형’이 떨어졌다. 일부 피고인들에게 감형도 있었고, 소위 관할관의 사후조치에서 석방자도 나왔지만 별로 의미가 없는 쇼에 지나지 않았다.


일러스트 | 박건웅


■ 육군교도소 이발소에서 본 ‘레이건 당선’ 기사


2심의 ‘DJ 사형’ 판결에 맥이 빠져 서울구치소로 돌아온 우리는 바로 육군교도소로 이감하게 되었다. 남한산성 밑에 있는 육군교도소 감방은 사면 벽에 창은 고사하고 바늘구멍만 한 틈도 없는 완전 먹방(전등이 없다면)이었다. 그러니까 하늘도 바깥도 전혀 볼 수 없는, 영화나 소설 속의 공간이었다. 그래도 전부터 거기서 수감생활을 하고 있던 DJ를 비롯한 ‘내란음모’ 그룹(?)과 함께 지내게 되어서 좋았다.

그러나 문제는 DJ의 목숨이었다. 아무래도 미국의 대통령선거 결과가 기다려졌다. 인권파인 카터가 재선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감옥 안에서 그쪽의 당락을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의외로 손쉽게 그 결과를 알게 되었다. 육군교도소 구내 이발소에 갔는데 찢겨진 신문지에서 ‘레이건 당선’이란 1면 톱기사 제목이 눈에 번쩍하고 띄었던 것이다. 순간, 좀 허탈했다. DJ도 어떻게 카터 낙선 소식을 듣고, 심지어 ‘하느님이 나를 버리셨단 말인가?’라며 슬퍼했다고 자서전에서 쓰고 있다.

그 무렵 그는 부인 이희호 여사로부터 이런 편지를 받는다. ‘내일에 대한 희망을 꼭 가지세요. 바다 가운데서 구해주신 그 하느님께서 지금도 당신 곁에 계시니, 이번에도 꼭 구해주실 것을 믿고 기도하세요.’ -1980·11·21. (이희호, <내일을 위한 기도>, 여성신문사, 1998).


■ 집단 옥중 단식-상고 기각-DJ 무기 감형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육군교도소 안의 우리는 불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최악의 경우를 생각지 않을 수 없었던 우리는 DJ에 대한 사형 판결에 항의하는 뜻으로 (DJ 모르게) 전원 단식에 들어갔다. 5일간 성공적으로(?) 이어지던 단식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DJ가 동참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중단하고 말았다. 그의 생명을 살리자는 단식이 도리어 그의 생명을 위험에 빠트려서는 안되기 때문이었다. 대법원 상고는 ‘내란음모’ 그룹만 하고, 나머지 ‘계엄법 위반’ 그룹은 아예 상고를 하지 않았다. ‘DJ 사형’ 말고는 더 이상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해가 바뀌어 1981년 1월23일,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왔다. ‘상고 기각’으로 DJ에 대한 사형 판결은 확정되고 말았다.

절망했던 우리는 그날 오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는 소식에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세계 언론과 지도자들 그리고 양심적인 시민운동단체의 강력한 압력이 주효했던 것이다. 카터 대통령은 후임자인 레이건에게 ‘김대중 구명’을 중요한 인수인계 사항으로 당부했고, 레이건은 전두환과의 회담 전제조건으로 DJ 감형을 관철시켰던 것이다(전두환은 그로부터 5일 뒤인 1월28일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을 위해 출국한다). 그리고 1월31일, DJ는 청주교도소로 이감되었으며, 2심에서 풀려나지 않은 다른 사람들도 한 사람씩 지방 교도소로 실려 갔다. 이해동, 김종완 그리고 나, 세 사람은 합수부가 석방 조건으로 제시한 ‘준법 각서’ 작성을 거부한 다음날, 역시 지방 교도소로 분산 이감되었다.


■ DJ 경호, 비서진들의 수난과 저항


1980년 7월4일의 계엄사 발표에 ‘김대중을 비롯한 37명을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에 구속 송치할 방침’이란 말이 나온다(동아일보 1980년 7월4일자). 보통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이라고 하면 앞서 언급한 DJ 등 24명 그룹을 연상하는데, 나머지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DJ의 장남과 비서진 그리고 경호원 등이었다. 그들은 앞서의 24명보다 더한 고문을 당하고 비열한 수모에 시달렸으며, 재판도 수도경비사령부 군법회의에서 따로 받아 언론이나 세인의 주목을 제대로 받지 못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법정에서 투사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역사는 언젠가는 진실을 밝혀줄 것이다. 기필코 정의가 승리할 것이다. 언젠가 당신들도 오늘 이 사실에 대해 심판을 받을 것이다.” 김옥두의 이런 강성 발언에 검찰관은 법정모욕죄로 추가 기소를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그러자 피고인들은 “추가 기소해서 우리도 사형시켜라”며 굽히지 않고 대들었다(김옥두, <희망으로 되살아난 5·17의 피와 눈물>-앞서 나온 <김대중 내란음모의 진실>). 1심에서 한화갑, 김옥두는 징역 4년, 박성철 전대열 김대현 김홍일 권혁충 오대영 함윤식은 각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항소심에서는 형이 조금씩 줄어들었을 뿐, 한 사람도 석방은 되지 않았고 대전교도소로 이감되어 복역을 했다.


■ 전두환 ‘내란 유죄’로 23년 만의 ‘재심 무죄’


전두환은 1981년 2월25일, 이른바 ‘대통령 선거인단’ 투표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3월3일 취임식을 치른다. 그리고 DJ는 다음해 12월23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직후 ‘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 뒤 정치 상황의 격동은 길게 설명할 겨를이 없거니와, 요약건대 전두환 정권 말기인 1987년의 ‘6월 민주항쟁’으로 ‘6·29 선언’이 나오고,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는데(10월12일 국회 의결, 같은 달 27일 국민투표로 확정), 그 뒤 실시된 13대 대통령선거에서 야권 후보 단일화의 실패로 6공의 노태우 정권이 등장한다.

그 뒤를 이어 1992년 김영삼 정부(문민정부)가 들어선 뒤에 ‘5·18 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1995년 12월21일 공포)되어 소위 신군부가 ‘12·12’와 ‘5·18’ 전후에 저지른 ‘헌정질서 파괴행위’의 공소시효를 정지시킴과 아울러 ‘5·18 민주화운동’ 관련자 등에 대한 특별 재심의 길이 열렸다.

이 ‘5·18 특별법’에 따라 전직 대통령인 전두환은 1996년 8월27일 반란 및 내란 수괴 등 죄목으로 서울형사지방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는다(노태우는 징역 22년6월). 반면에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피고인들(당시 현직 대통령이던 DJ는 재심 청구를 미룸)은 2003년 1월, 서울고등법원에서 전원 (재심)무죄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피고인들의 원심 판시 각 행위는 전두환 등의 이러한(12·12 군사반란행위 및 5·17 이후의 내란행위) 헌정질서 파괴범행을 저지하거나 반대함으로써 헌법의 존립과 헌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였다고 할 것이다”라고 판시 이유를 밝혔다(1999 재노 22, 2000 재노 2 내란음모 등 사건 판결).

DJ는 대통령 퇴임 후에 재심을 청구하여 2004년 1월29일 역시 서울고등법원에서 앞서 사건의 판시와 같은 이유로 무죄 판결을 받는다(2003 재노 19 국가보안법 위반 등 사건 판결). 그러니까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다 고문으로 사건을 조작하고 사형 등 혹형을 내린 전두환 등이 오히려 반란 및 내란죄 등으로 처단되었으니 먼 훗날이 아닌 당대에서 법의 심판으로 역사가 바로잡힌 기록을 남긴 셈이었다. 사형 선고 23년 만에 재심 법정에 나온 DJ는 이렇게 진술했다. “민족과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하다 역적으로 몰려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람들은 수백년이 지나야 오명을 벗는데, 나는 당대에 이런 기회를 갖게 됐다. 법의 정의를 바로 세우고, 후세에 교훈을 남기기 위해 좋은 판결을 해주기 바란다.”

2009년 11월13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고 김대중 한국 대통령을 추도하는 모임’에서 나는 이런 말로 추모사의 첫머리를 열었다. “대통령이 사형수가 되는 나라, 그리고 사형수가 대통령이 되는 나라, 한국은 이러한 격동을 거치면서 역사가 바로잡혀 나가는 나라입니다.”

<2015-06-14> 경향신문

☞기사원문: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36)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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