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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한일협정 버금가는 졸속외교 우려된다 – 한일협정 체결 50년, 한일 정상의 덕담외교를 지켜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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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

1965년 6월 22일 한일 양국이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한일기본조약)’을 조인한 때로부터 반세기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한일관계는 50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이 무색하게 선린으로 성숙하기는커녕 퇴행을 거듭하며 과거로 회귀하고 있다.


일본군‘위안부’의 강제성을 인정한 1993년의 ‘고노 담화’와 일제의 침략전쟁과 식민지배를 공식 사죄한 1995년의 ‘무라야마 담화’는 한일관계 재정립의 초석이라 할만 했다. 미래지향적 한일관계가 다시 파탄에 이르게 된 데는 보수정권의 등장에 따른 일본의 우경화와 함께 동아시아 역학구도의 변화가 작용하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50년 전의 한일협정이 한일 간에 지속적으로 갈등을 일으켜온 원천이라는 사실은 잊혀진지 오래다. 한일협정은 그 배경이나 조문의 내용에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미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의 군사정권은 각기 다른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 한일관계 정상화를 추진했지만 그 과정과 결론은 매우 비정상적이었다.

우선 미국은 한미일동맹 구축으로 냉전체제의 최전선을 공고히 하고자 하였으며, 이에 따라 사실상 한일수교를 강박하였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미국의 주문도 있었지만 전후청산과 시장확대 그리고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회복이라는 현실적 욕구도 작동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정통성 결여로 인해 미국의 요구를 즉각적이고 전폭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으며, 취약한 권력을 유지 강화하기 위해 경제개발의 재원 확보와 정치자금의 조성이 시급했다. 삼자간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셈이다.


그러나 한국 쪽은 추진단계에서 이미 정당성과 도덕성을 상실해 대등한 협상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협상에 직간접적으로 간여한 자들 중 다수가 일제관료나 일본군 출신이었으며, 일본의 파트너와 심리적 주종관계에 놓여 있었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의 대규모 정치자금 수수 내용이 담긴 미국 CIA 특별보고서 한일관계의 미래(1966. 3. 18). [자료사진 – 민족문제연구소]


또 음모적인 협상 커넥션의 가동은 자연스레 불법과 부정으로 연결되었다. 미 CIA 특별보고서(한일관계의 미래 1966. 3. 18.)는 “일본기업들이 1961∼1965년 사이 당시 한국의 민주공화당 총 예산의 2/3를 제공한 바 … 6개의 기업이 총 6천 6백만 달러를 지원했다”고 박정희 정권의 대규모 정치자금 수수를 기정사실화 했다.

그렇다면 일본은 한국에서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마자부터 친일정권 수립을 목표로 조직적으로 정치자금을 조성하여 한국의 국내정치에 꾸준히 개입했다고 할 수 있다.


최소한의 명분마저 상실한 이러한 상황에서 대일협상이 당당하고 공정하게 진행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무상원조 3억 달러라는 초라한 협상 성적표를 받아든 이면에는 이렇게 상상을 초월하는 매국적 거래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국가 간 규범과 국민적 상식으로는 당연히 불법적 범죄행위에 기반한 협약은 그 자체로 무효로 보아야 한다. 한일협정은 교섭과정에서도 일본의 진보세력이 외면하고 대다수 한국민들이 치열하게 반대하는 가운데, 일본 우익세력과 한국의 친일세력 간의 야합으로 태어난 사생아라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상용어로 정착한 ‘굴욕적 한일협정’이라는 말이 정권을 공격하기 위한 공연한 정치적 수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태동 과정이 음모적이었던 만큼 조약 문안이 명쾌할 수 없었으며 이는 지금까지 양국 사이에 해석을 둘러싼 갈등을 야기하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일본은 지금까지도 한국병합을 합법이라고 해석하며 한국은 불법이며 무효라고 간주한다. 일본은 유무상자금의 성격을 경제협력자금(심지어 독립축하금)이라고 주장하였으며, 한국은 청구권자금으로 배상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해석했다.


일본(사법부)은 청구권이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는 일관된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나 한국(사법부)은 개인 청구권이 존재한다고 판단한다.


일제침략 70년 식민지배 35년간을 넘어서서 국가관계를 정상화하는 조약으로서는 모호함과 부실함이 정도를 넘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한일 양국의 인식 차이는 극복하기 힘들만큼 간극이 커 보인다. 가해자가 없는 식민지배와 배상이 없는 화약(和約)이 있을 수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피해규모에 동떨어진 보상액이나 개인 청구권에 대한 침해, 반인도적 범죄행위에 대한 책임 실종 등 문제가 하나 둘이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한일협정은 적대관계 해소와 국가 간 수교를 위한 정상적인 조약이라 하기에는 부적절한 측면이 적지 않았다.


2005년 8월 참여정부의 ‘한일회담 문서공개 후속대책 관련 민관공동위원회’는 한일협정은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따른 국가 간의 권리 정산이며, 일본군‘위안부’ 문제 등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한 일본의 법적 책임이 남아있고, 사할린동포 원폭피해자 문제가 포함되지 않았다고 명쾌하게 정리했다. 더불어 무상자금 배분과 관련하여 강제동원피해자에 대한 한국정부의 책임도 인정했다. 처음으로 한일협정의 성격과 한계를 명확히 규정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이해에 도달하면 당연히 한일기본조약의 개정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한일협정 폐기에서부터 재협상 또는 재해석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침략전쟁과 식민지배로 입은 직접적인 피해는 물론 분단과 내전으로 인한 엄청난 피해가 일본의 탓이라고 확신한다. 나아가 일본이 단기간에 경제부흥을 할 수 있었던 주요 요인도 한국전쟁으로 인한 활황 때문이었다고 본다.


반면 아베를 비롯한 전후 일본의 우파 정치인들의 역사인식은 일본제국주의 시기나 한일협정 때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대동아전쟁’은 침략전쟁이 아닌 아시아해방전쟁이다. 도쿄 전범재판은 승자에 의한 일방적인 단죄이다. 식민지는 일본에 의해 근대화하였으며 전후에도 일본의 원조를 기반으로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즉 일본은 결코 침략자나 가해자가 아니며 선의의 피해자라는 의미이다.




▲ 박근혜 대통령이 22일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 리셉션에 참석해 “과거사의 무거운 짐을 화해와 상생의 마음으로 내려놓을 수 있도록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사진출처 – 청와대]


6월 22일 서울과 도쿄에서 동시에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 리셉션이 열렸다. 참으로 놀라운 일은 한일 양국 정상이 상대국 대사관이 주최한 행사에 교차 참석하여 한일관계의 미래에 대해 덕담을 늘어놓은 것이다.


“과거사의 무거운 짐을 화해와 상생의 마음으로 내려놓을 수 있도록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50년간의 우호 발전의 역사를 돌이켜보고 앞으로 50년을 내다보며 함께 손을 잡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자.”


엊그제까지 냉랭하기 짝이 없었던 상황을 기억하는 이들은 당혹감을 넘어 아연실색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최근 한국 외교는 전혀 유연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외교부 장관의 방일이 4년 만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적성국 간에도 외교는 이루어지는 것일진대 지나치게 경직된 자세는 청와대의 심기와 무관하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그런데 도대체 이렇게 표변하게 된 사정은 무엇일까. 아무 것도 달라진 것도 없고 오히려 일본 측 도발의 빈도와 강도만 더해 가고 있는데 급속히 노선을 바꾼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었을 법하다.


먼저 한일협정 체결이 박정희 정권의 소산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비록 계엄령 선포 등 강권을 발동하여 이루어진 한일수교이긴 하나 박정희주의자들에게는 경제성장의 단초를 마련한 위대한 업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1962년 김-오히라 이면 합의의 주역으로 협상 타결을 위해 “제 2의 이완용이 되어도 좋다”던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자신감 넘치는 회고(중앙일보 6월 22일자 인터뷰)가 이를 반증하고 있다.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고픈 현 정권이 어떻게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본질적인 배경을 찾다보면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에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된다. 50년 전과 마찬가지로 역시 미국의 개입이 결정적이다. 미국 외교라인의 결례에 가까운 한일화해 강압과 일방적인 일본 편들기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일본정부의 안보법제 추진과 평화헌법 개정 시도, 한미일군사동맹 강화는 한일협정 전후 상황을 빼다 박았다. 과거 소련의 자리에 중국이 들어섰을 뿐, 한국의 존재감은 그 때나 지금이나 초라하기 짝이 없다. 일본은 아태지역 패권 유지에 있어 미국의 대리인을 자임하며 영일동맹 이래 전통적인 해양세력으로 재부상하기 위해 국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편으로 인맥과 예산을 총동원하여 역사수정주의와 군사대국화에 대한 우호적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국제사회 특히 미국의 정치권과 학계에 노골적인 로비도 서슴지 않고 있다.


박근혜 정권은 2년 반의 강경외교 끝에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채 정책 방향을 선회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이 달라질 가능성이 전무한 데다 미국의 압박이 가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제 2의 한일관계정상화에 대한 정지작업은 이미 이루어졌고 지금은 여론을 떠보고 각색하는 단계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양국 외교 수장의 회담에서 메이지시대 산업시설의 세계유산 등재시 조선인 강제노동 사실 명기에 합의한 사례나 ‘위안부’ 문제가 타결 직전이라는 외신 보도, 정상회담이 거론되기 시작하는 등 일련의 현상들은 준비된 시나리오 없이 진행될 사안들이 아닌 것이다.

우려스런 점은 이러다가 덜컥 한일협정에 버금가는 졸속 외교가 현실화하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벌써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교섭과정의 쟁점들을 공공연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 중에는 예컨대 ‘평화의 소녀상’ 철거와 같은 몰염치한 요구도 들어있다 하니 피해자와 시민사회로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을 게 뻔하다.


또 ‘위안부’ 문제가 일제의 야만성을 인권 차원에서 드러내는 상징적인 요소이긴 하지만 한일과거사 전체로 볼 때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앞서 지적한 한일협정에 포함되지 않은 강제동원피해자 문제 외에도 독도 야스쿠니신사 시베리아억류자 BC급전범 관동대진재 재일동포 등 해결하지 못한 한일과거사 현안들이 산적해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따라서 특정사안에 대한 일부 진전을 과대포장하거나 대단한 양보라도 얻어낸 듯이 선전하며 어정쩡한 타협으로 면죄부를 발행할 때는 만만치 않은 후폭풍이 따를 것임을 각오해야 한다고 본다. 그야말로 장고 끝에 악수를 두는 과오를 저지르지 않기를 빌 뿐이다.


아베 총리는 전후 70주년 담화를 각의 결정이 아닌 개인 발표 형식으로 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얄팍한 술수이며 혼네(本音)는 따로 있음을 삼척동자도 알 것이다.


적극적 평화주의니 보통국가니 아무리 분식해도 아베의 뇌리에는 군국일본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망상만이 가득 차 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부정적 확신은 전적으로 일본 정부와 정치인들로부터 비롯하였다. 그들의 진정성을 다시 믿어보기에는 우리 모두가 이제 너무 지쳐 버린 것이다.


동아시아 평화공동체의 이상이 신기루처럼 사라져가는 가운데 일본군의 군화발 소리가 음산하게 다가오고 있다. 환청인가? 그랬으면 좋겠다.



<필자소개>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부위원장을 겸하고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친일재산 국가귀속업무를 진행했다. 친일문제와 한일관계 등 근현대 과거사청산과 통일시대의 역사문화운동이 주요한 관심 분야이다.

법정에 선 역사정의,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쟁점과 의의, 74년 조직(세칭 ‘인혁재건위’)사건의 운동사적 의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특별법 개정의 의미와 쟁점 등의 글이 있고, 『일제협력단체사전』, 『친일인명사전』 집필에 참여했다.

경희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 민족문제연구소 초대 사무국장, 경희대학교 사학과 겸임교수를 역임했으며, 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이사를 맡고 있다.

<2015-06-23> 통일뉴스

☞기사원문: 한일협정 버금가는 졸속외교 우려된다 – 한일협정 체결 50년, 한일 정상의 덕담외교를 지켜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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