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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으로 본 현대사](37) 문익환 목사 방북 사건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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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평양 갈 거야’ 시 쓴 뒤 결행…‘5공 청산 궁지’ 여권에 공안몰이 빌미


■ ‘이건 진담이라고’ 예고한(?) 북행길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이건 진담이라고(…)”.


문익환 목사가 1989년 첫 새벽에 쓴 신년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의 첫 연(聯)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는 일제 때 북만주 간도에서 태어나 윤동주 시인과 명동소학교 동문으로 친하게 지내면서 자신도 시를 써왔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중학교 때 신사참배를 거부했다가 퇴학을 당했는가 하면, 일본과 만주 그리고 해방 후에는 서울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유학했으며, 6·25 전란 중에는 판문점 휴전회담과 도쿄의 유엔군 사령부에서 통역으로 근무한 특이한 경력도 있다. 귀국한 뒤에는 신학대학 교수, 교회 목사, 성서 번역가로 조용한 삶을 살아가던 중, 1975년 봄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에 공분을 느끼고 민주화운동에 투신하여 재야 지도자로 열정을 쏟았다. 3·1민주구국선언사건(1976)과 김대중내란음모사건(1980)으로 투옥된 바 있으며,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의장을 맡아 재야민주화운동의 지도자로 활약 중이었다.


그래도 시는 어디까지나 문학작품이지, 그것을 북행을 예고하는 ‘진담’으로 여긴 사람은 없었다. 다만, 그 시의 다음과 같은 마지막 연을 읽고 나서, 그 처연(凄然)함에 마음이 끌린 사람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난 걸어서라도 갈 테니까/ 임진강을 헤엄쳐서라도 갈 테니까/ 그러다가 총에라도 맞아 죽는 날이면/ 그야 하는 수 없지/ 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가는 거지”.

■ ‘문 목사 평양 도착’에 놀란 남쪽에선


그해 3월25일 오후, 문익환 목사는 북한 당국이 제공한 조선민항 특별기편으로 베이징을 출발, 평양 부근의 순안비행장에 도착했다. 일본에서 합류한 정경모(재일동포 문필가), 서울에서 뒤따라 온 유원호(사업가)가 일행이었다. 비행장에는 정준기(북한 부총리 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주석), 여연구(여운형의 딸) 등 북한 측 요인들이 영접을 나왔다. ‘평양으로 가고 말겠다’는 그의 연두시(年頭詩)는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었던 것이다. 총에 맞지도 않고, 바람처럼 넋으로 가지도 않고, 멀쩡한 육신으로 갔던 것이다. 그는 평양 도착 성명에서 “제가 금단의 땅이던 이곳을 찾아왔다는 것, 김일성 주석과 더불어 서로가 민족의 일원으로서 뜨겁게 부둥켜안고 민족의 빛나는 미래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는 것, 그 상징적인 뜻을 생각한다는 것만으로 저는 기쁨을 억누를 수가 없습니다”라고 자신의 심경을 밝혔다. 또 “말로 하는 대화가 아니라 가슴과 눈으로 하는 대화를 하려고 왔다”는 말도 했다. 문 목사의 평양 도착 소식은 당일로 국내에 알려졌다. 조선중앙방송이 오후 7시 북한 당국의 발표문과 아울러 문 목사의 도착 성명을 육성 녹음으로 방송하였던 것이다. 정부는 그날 자정 무렵, 신문사와 방송국에 이 뉴스를 알리면서, 정부의 사전허가를 받지 않은 방북임을 강조하였다. 온 나라가 경악에 휩싸였다. 정부와 여당(민정당)은 ‘문익환 목사 등의 평양 밀행은 김일성 집단의 일관된 대남 분열정책의 소산’이라며 그들 일행이 귀국하는 대로 구속 수사할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다.



일러스트|박건웅


■ 김일성과 회담, 조평통과 공동성명 등으로


검찰은 문 목사의 방북행위를 국가보안법 제6조 2항(잠입 탈출)과 제8조 1항(회합 금지) 위반으로 의법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문 목사가 지난 (3월)19일, 한양대 전민련(全民聯) 집회에서 방북 의사를 밝혔는데도 공안당국이 이를 간과한 것은 치명적인 허점을 드러낸 것’이라며 문책론을 제기하는 측도 있었다. 문 목사가 출국 전에 만난 인사들은 대부분 ‘시기’나 ‘정부 허가’ 등을 이유로 방북을 만류하였다. 그러나 문 목사로서는 일본에 거주하는 정경모를 통해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허담 위원장의 초청장과 아울러 김일성과의 회담 언질까지 받아놓은 기회를 살려 남북 사이의 분단의 벽을 넘어서기 위한 민간통일운동의 물꼬를 터야겠다는 일념이 앞섰다. 정경모와의 연락은 유원호가 일본에 왕래하면서 담당했다.(정경모, <시대의 불침번>, 한겨레출판, 2010)


문 목사는 평양도착 다음날인 26일에는 평양 봉수교회의 부활절 예배에 참석, 특별 강론을 하였고, 27일에는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이 이루어졌다. 두 사람은 남과 북의 체제 차이를 공존시키는 연방제 통일방안 등을 비롯해 남북한 사이의 여러 현안을 논의하였다. 이어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허담과의 회담, 묘향산 보현사 관광, 김일성과의 2차 회담(4월1일)이 있었다. 다음날에는 조평통 허담 위원장과의 2차 회담을 갖고, ‘쌍방은 어떠한 경우에도 분열의 지속을 목적으로 하는 두 개의 조선정책을 반대하고 끊임없이 하나의 민족 그리고 통일된 나라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한다’는 등 9개 항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문익환, <걸어서라도 갈 거야>, 실천문학사, 1990)

■ 엄벌론과 환영론의 극한 대립


이처럼 바쁜 일정을 마친 문 목사는 4월3일, 항공편으로 북한을 떠나 귀로에 베이징과 도쿄에 들렀다. 그는 귀국 전, 내외신과의 인터뷰를 통해 “나의 방북은 민족통일의 실현에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며 “나는 재판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남북관계를 원만히 펴도록 이번만은 구속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또 ‘남북교류는 정부 간 대화를 민간 대화로 보충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그의 방북은 국내 여론을 둘로 갈라놓았다. 하나는 규탄 엄벌론이었다. ‘문 목사의 월북은 국민에 대한 배신이자 국가에 대한 반역’이라는 것이었다(민정당). 다른 한편에는 옹호론도 있었다. ‘문 목사의 입북은 민족통일을 앞당기는 전기가 될 것으로 보아 이를 환영한다’는 입장이었다(진보정치연합). 정계의 야권과 재야 민주세력 일부에서는 방북 자체보다는 그 시기에 문제가 있었다는 아쉬움을 보이기도 했다. 여소야대의 6공(노태우 정권)에서 막 5공(전두환 정권) 청산(비리 규명) 작업이 진행 중이었는데, 정부와 여권에서 문 목사의 방북을 빌미로 공안정국을 조성해 국면전환에서 오는 손실이 막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학원가에서는 문 목사 귀환 환영집회를 준비하는 움직임이 번지고 있었다.

■ ‘지령에 의한 탈출’ 구속에 접견 금지 파문


문 목사는 4월13일 낮 김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기내에서 국가안전기획부 요원에 의해 유원호와 함께 안기부로 연행되었다. 문 목사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관원들이 와락 달려들어 억센 팔로 끌어내렸다’는 것. 그는 예상대로 구속되었다. 반국가단체 구성원과의 연락·회합·지령에 의한 탈출, 반국가단체에 대한 동조 찬양 등의 죄목(국가보안법 위반)이 구속영장에 올라 있었다. 그런데 안기부는 문 목사가 구속된 지 1주일이 넘도록 가족은 물론 변호인의 접견까지도 금지했다. 언론과 법조계를 비롯한 사회 각계에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위법행위’라는 비난이 높아졌다. 한 신문은 “문 목사의 변호인단(한승헌 황인철 조준희 홍성우)은 문 목사의 유치장소로 기재된 서울 중부경찰서로 가 접견을 신청했으나 거부당하자 공안합동수사본부장인 이건개 대검 공안부장을 방문, 공식 항의하였다”고 사회면 톱 뉴스로 보도했다(경향신문 1989년 4월19일자). 그만큼 이른바 공안사범에 대한 위헌적인 접견금지 관행이 심각한 이슈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이런 곡절을 거쳐 변호인단은 같은 달 22일 오후, 중부경찰서에서 문 목사를 접견했다. 그는 “나는 불기소를 바라지만, 기소해도 좋다. 전 국민, 전 세계를 향해 우리의 통일문제를 얘기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 공안정국 회오리에 5공 청산은


같은 해 5월2일, 안기부는 ‘문익환 목사 등 입북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안기부는 “이 사건은 재일 북한정치공작원 정경모(65)에게 포섭된 연락공작원 유원호(59)와 친북 일본인 야스에 료스케(安江良介·54) 등이 소위 ‘민중대표’와의 남북정치협상이라는 명분 아래 국내 과격 통일론자들을 밀입북시켜 남한 내부를 교란시키고 북한 측의 대남 선전선동전술을 적극화하려는 책략에 의해 발생한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입북에 앞서 평민당 김대중 총재, 민주당 김영삼 총재 등 야당 지도자와 전민련 공동대표 이부영씨, 고문 백기완씨 등에게 미리 통보했다”고 부연하였다.

이 사건의 수사를 맡은 공안합동수사본부는 문 목사의 동생 문동환 평민당 부총재(목사), 민주당 김상현 부총재, 김덕룡 의원, 민정당 이종찬 사무총장, 그리고 김대중 평민당 총재 등을 참고인으로 조사하는 등 정치권으로 광범한 수사를 확산했다. 그 무렵 ‘한겨레신문’ 북한 취재기획 사건으로 안기부에서 구속 수사를 받아오던 리영희 논설고문도 위의 문 목사 사건과 같은 날(5월2일) 서울지검으로 송치되면서 정권 차원의 공안 몰이는 극에 달했다.

그리고 5공 청산 등으로 궁지에 몰리던 여권은 국면전환을 통하여 국내 진보민주세력에 대한 역공의 기틀을 잡게 되었다. 이에 김대중 평민당 총재는 ‘문 목사의 방북사건을 기회 삼아 노태우 정권이 재야인사들에 대한 탄압을 자행하고 있다’고 비판했다(<김대중 연보 1>, 시대의 창, 2011). 그런 공안정국은 5공비리 조사특위의 활동과 5공 청문회의 성과 등의 마무리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문 목사 입북 사건은 서울지검 공안1부 안강민 부장검사에게 배당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공안사건에 대한 검찰 조사는 안기부 수사 결과를 ‘다시 보기’해서 정리하는 정도로 마무리되기 일쑤였다. 이 사건도 그런 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2015-06-21> 경향신문

☞기사원문: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37) 문익환 목사 방북 사건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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