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간 여의도 1.5배 토지 귀속…관련소송 96건중 94건 확정
“노른자위 친일토지 산재 추정, 상시기구서 환수 재개해야”
(서울=연합뉴스) 전성훈 기자 = “친일재산 청산 작업을 통해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고 사회정의를 구현하겠다.”
2006년 8월 18일 친일재산조사위원회(이하 조사위)가 현판식을 하고 공식 출범할 당시 김창국 위원장의 업무 개시 일성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 귀속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구성된 조사위는 2010년 7월 활동을 마감하기까지 만 4년간 친일인사 168명의 토지 2천475필지, 약 1천300만㎡(공시지가 기준 1천267억원 상당)를 환수하는 성과를 올렸다. 한강 둔치를 포함한 여의도 면적의 1.5배에 달한다.
법무부에 따르면 친일재산 환수 관련 소송 96건 가운데 94건이 확정됐고 2건은 1·2심 판단을 받은 뒤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확정된 소송 가운데 정부가 승소한 것은 91건으로 승소율은 97%에 이른다.
계류 중인 두 건은 일제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은 이해승의 후손이 제기한 민사·행정소송으로 이르면 올해 상반기에 확정 판결이 내려질 예정이다. 그렇게 되면 장장 10년간 지속한 친일재산 환수 작업이 마무리되는 셈이다.
하지만 아직도 상당한 규모의 친일재산이 전국에 숨어 있다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이 때문에 정부가 상시 기구를 만들어 친일재산 환수 작업을 재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 미완의 청산 작업…노른자위 땅 친일재산 명맥 유지
해방 후 70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짧은 기간 친일인사 직계 가족이 소유한 여의도 1.5배 규모의 토지를 국고로 환수한 것은 적지 않은 성과다.
조사위 활동에는 한계도 있었다. 환수 대상이 비교적 추적이 쉬운 부동산에 국한된데다가 이미 제3자에게 처분된 토지는 환수 자체가 어려웠다.
친일 행위로 획득한 토지인지가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조사위의 환수 대상에서 제외된 토지도 상당수 있다.
이 때문에 친일인사가 보유했던 재산에 비해 실제 환수 규모는 미미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을사오적’ 가운데 하나인 이완용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완용은 일제 강점기 여의도 면적의 1.9배인 1천573만㎡(1천309필지)를 소유했다. 토지를 포함한 보유 재산이 현재 시가로 600억원에 달했다.
국가 귀속이 결정된 땅은 1만928㎡(16필지)에 불과했다. 공시지가 7천만원 남짓한 규모다.
이완용은 1920년 전후로 보유한 토지를 일본인 등에게 대거 팔아넘겨 엄청난 돈을 챙겼지만 그 재산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 길이 없다.
이완용과 함께 국민적 지탄을 받는 친일인사 송병준도 마찬가지다. 송병준은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사법·경찰권 위임 등의 내용이 담긴 한일신협약 조인에 참여한 ‘정미칠적’ 가운데 한명이다.
그는 일제시대 857만㎡의 토지를 보유한 대부호였지만 국가로 귀속된 땅은 공시지가 4천700만원 상당의 2천911㎡(9필지)에 그쳤다. 송병준 역시 1930년대 집중적으로 토지를 팔아 현금화하면서 재산 추적이 쉽지 않았다.
조사위에 참여했던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은 “50여명의 조사인력이 4년간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아직도 친일인사의 후손들이 보유한 노른자위 땅이 상당수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말했다.
◇ 헌재 “친일재산 보장은 정의에 어긋나”…환수에 정당성 부여
정부의 친일재산 환수 작업에 대한 후손들의 저항은 강력했다. 이들은 조사위가 국가 귀속 결정을 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민사·행정소송 등을 통해 ‘조상 땅찾기’에 나섰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유정수·이경식, 중추원 부의장 출신 민병석·민영은, 황국신민화 교육 자문기구인 조선교육회 부회장으로 일한 민영휘, 일제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은 이해승 등 대표적인 친일파의 후손들이 대거 소송에 동참했다.
이들은 주로 물려받은 토지가 친일행위의 대가로 획득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며 환수의 부당함을 주장했다.
정부와 친일파 후손 간 법적 공방이 가열되던 2011년 3월 특별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합헌 결정은 친일재산 환수 작업이 속도를 내는 전환점이 됐다.
민영휘·이정로·민병석 등 친일인사 후손 64명은 특별법이 소급입법 및 연좌제를 금지한 헌법에 어긋난다며 제기한 헌법소원 사건에서 헌재는 “친일재산 보유를 보장하는 것 자체가 정의 관념에 위배된다”며 환수 작업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특별법 합헌 결정은 친일재산 환수 작업을 둘러싼 논란을 잠재우고 이후 이어진 관련 소송에 지대한 영향을 줬다.
헌재는 2013년 8월 ‘한일합병의 공으로 작위를 받은 인물’로 한정한 재산 귀속 대상을 ‘친일행위의 정도와 관계없이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인물’로 대폭 넓힌 개정 특별법에 대해서도 합헌 결정을 내려 친일 후손들의 법적 저항에 쐐기를 박았다.
그해 11월에는 조사위가 친일 행위의 대가로 보기 어렵다며 환수 대상에 포함하지 않은 민영은 후손의 땅을 친일재산으로 보고 국고 귀속을 결정한 법원 판단도 나왔다.
법원이 이유 불문하고 국가의 손을 들어준 것은 아니다. 특히 친일 후손들이 토지를 제3자에게 매각한 경우 사례별로 판단이 달랐다.
법원은 제3자가 해당 토지가 친일재산이라는 것을 모른 채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고 취득한 경우 재산권 보호 원칙을 엄격하게 적용했다.
조사위는 특별법 시행 전후로 토지를 제3자에게 처분한 친일파 후손들을 상대로 부당이득금 반환 청구 소송을 다수 제기했지만 실제 반환된 금액은 미미한 수준이다.
◇ “친일재산 환수작업 재개해야”…상시기구 설치 필요
조사위는 2010년 7월 자진 해산 결정을 내렸다. 특별법에는 4년간 한시적으로 활동한 뒤 기간을 2년 연장할 수 있다고 규정했지만 조사위는 스스로 활동기간 연장을 포기했다.
조 사무총장은 “당시 정치·사회적 상황을 고려해 기간 연장이 어렵다고 봤고 이미 국가 귀속으로 결정된 토지만이라도 지킬 필요가 있다는 내부적 판단이 있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하지만 그 이후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친일재산 조사·자문·환수를 총괄하는 상설기구를 설치해야 한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조사위처럼 활동 시한이 정해진 임시기구로는 제대로 된 친일잔재 청산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특별법이 친일인사가 일제에 협력해 획득한 재산은 물론 상속·증여·매각·양도 등의 방식으로 빼돌린 재산도 포괄적으로 귀속 대상으로 규정한 점에 비춰보면 지금까지 환수된 재산이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조사위도 활동 종료 당시 이런 점을 염두에 둔 듯 “국가 귀속 결정을 내리지 못한 친일재산이 추가로 발견될 수 있다는 점에서 친일재산의 처리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별법 시효가 여전히 살아있어 정부의 의지만 있다면 상설기구 설치가 어렵지 않다는 게 시민사회단체들의 주장이다.
정부의 여러 부처가 참여하는 전담팀을 구성하는 것도 대안으로 거론된다.
조사위 활동 종료 이후 각종 친일재산 환수 소송을 도맡은 법무부를 중심으로 행정자치부·경찰청·지방자치단체 등이 참여하는 ‘정부 합동 조사단’이 하나의 예다.
조사위 사무처장을 지낸 장완익 변호사는 “각 지방자치단체가 관할 지역에 산재한 친일재산을 찾아내면 법무부가 소송을 담당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며 “정부의 의지만 뒷받침되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2015-06-25> 연합뉴스
☞기사원문: <광복 70년> ‘미완의 청산 작업’ 친일재산 환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