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6부→행정3부→행정5부→행정7부(인사)→행정7부(인사)→행정7부
2011년 증손자인 동아 사장 항소
재판부 6번 바꿔가며 8번째 변론
주장만 듣고 선고 기약없이 미뤄
“학병 선동을 위해 존경받는 인촌의 이름으로 기자와 편집자가 기사를 왜곡·조작했다.”(이용구 변호사)
“그는 일본 군국주의 부활의 상징인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사상적 영향을 받은 것이다.”(김경현 행정자치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전문위원)
25일 서울 서초동 서울고법 제1별관 306호 법정. 원고와 피고는 한 사람의 행적을 두고 다른 평가를 내놨다. 재판의 ‘주인공’은 <동아일보>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1891~1955)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하자, 증손자인 김재호 동아일보 사장이 이를 취소하라며 소송을 냈다.
1심 법원인 서울행정법원은 김성수의 활동에 대해 “일본제국주의의 강압으로 이름만 올린 것으로 보기는 어렵고, 그 활동 내역도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것으로 봄이 상당하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태평양전쟁 때 “충용무쌍의 황병(일본 천황의 병사) 되라”는 내용의 기고 활동 등으로 일제의 침략전쟁에 동조하고 동포들을 전쟁터로 내보내는 데 적극 협력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2011년 11월 항소 뒤 재판은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서울고법은 사건을 질질 끌었다. 지난 2월에도 선고기일이 잡혔다가 갑자기 미뤄졌고, 법원 인사로 시간을 더 끌게 됐다. 사건은 이 법원 행정6부(재판장 임종헌)→행정3부(˝ 이대경)→행정5부(˝ 김문석)→행정7부(˝ 조용호)→행정7부(˝ 민중기)를 거쳐 6번째 재판장에게까지 넘어갔다.
이날 행정7부(재판장 황병하) 심리로 열린 8번째 변론기일에서 양쪽은 각자의 주장을 담아 20분씩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행자부 쪽은 김성수와 후쿠자와 유키치의 관계를 집중 조명했다. 일본 근대화 과정의 사상가인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는 탈아입구(아시아를 벗어나 서구를 지향)론을 통해 군국주의와 대동아공영권 주장의 토대를 만든 인물로 지목된다.
김 전문위원은 “김성수가 후쿠자와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발언을 비교하면 ‘개인의 재산과 목숨은 천황을 위해 바칠 때 그 가치를 발한다’(후쿠자와), ‘의무를 위해서는 목숨도 아깝지 않다’(김성수)는 등 비슷한 점이 많다”고 했다.
변호인단은 일본의 강요에 의한 행위라고 주장했다. 이 변호사는 “원심의 판단은 <매일신보>와 <경성일보>에 의존하지만, 왜곡되고 조작된 기사가 많다”며 “전시 상황에서 자기 글이 도용되면 항의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느냐”고 했다. 김성수가 총독부 외곽단체에 참여한 것에 대해서도 “당시 교장뿐 아니라 부락의 지도자까지 단체에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김 전문위원은 “객관적으로 검증된 다양하고 광범위한 친일행위를 모두 환경 탓으로 돌리고 합리화하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독립을 위해 일제에 항거하는 등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은 항일독립운동가도 있었음을 상기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재판장도 고민이 많아 보였다. 변론이 끝나면 선고기일을 잡는 게 통례인데도 날짜는 추정(추후 지정)하겠다고 했다. 결론을 내기 어려울 때 쓰는 방식이다. 재판장은 “언론 보도를 봤는데, 2011년부터 5년간 재판장도 여러 번 바뀌고 선고를 못해 그 자체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걸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선고에 대한 부담감도 내비쳤다. 그는 “한편으로 이 시점에 이 사건을 맡아서 선고를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도 있다”며 “판사는 사건을 고를 수가 없고, 자기한테 배당되면 심리할 의무가 있다. 또 심리하면 선고를 할 직무상의 임무와 의무가 있기 때문에 해야 한다”고 했다.
서영지 기자 yj@hani.co.kr
<2015-06-28> 한겨레
☞기사원문: ‘김성수 친일재판’ 다섯 번 폭탄 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