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문 목사, 항의 퇴정 후 “10년형”… 정주영 방북과 ‘다른 잣대’
■ 정주영 방북 사례와 법의 형평성 논란
서울지검 공안1부 안강민 부장검사는 1989년 5월31일, 문익환·유원호 두 사람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기소했다. 그들이 귀국 즉시 비행기 안에서 구속된 지 49일 만이었다. 그사이 이 사건은 법정 아닌 장외에서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공안합동수사본부의 발표에서 ‘북한 정치공작원’으로 지목된 정경모는 거주지인 일본에서 방북의 자초지종을 밝힘으로써 반박하고 나섰다. 이 사건을 검찰에 송치하는 날, 안기부 1차장 안응모는 정경모를 북한 공작원으로 규정짓는 근거가 무엇이냐는 기자 질문에 “정씨의 글과 평소 태도로 볼 때 북한 공작원이라는 심증을 가질 수 있었다”고 답변했다(한겨레 1989년 5월3일자).
국회에서는 이홍구 국토통일원 장관에 대한 대정부질의에서 공방이 벌어졌다. 김대중 의원이 물었다. “정주영씨가 정부의 승낙을 받고 갔으니 통치행위라는데, 그렇게 통치행위를 확대해서 장사하는 것까지 집어넣으면 법은 필요없는 것 아닌가? 내가 정주영씨를 구속하라는 것은 아니나 그 사람은 ‘북한이 보건사회 행정이 잘 되어 있다. 농촌의 문화시설이 잘 되어 있다. 북한의 경제는 자주적 독립적이라 이렇게 훌륭하게 건설하고 있다’는 식으로 전 매스컴 앞에서 찬양했는데 문제가 없고, 다른 사람들만 처벌하면 법의 형평성은 어떻게 되는가?” 이홍구 장관의 답변은 이러했다. “법 적용이 형평의 원칙에 따라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따라서 북한에 대한 언급에 있어서 의도나 상황을 참작한 법의 적용도 절대적으로 형평을 지켜야 한다.” 김 의원은 또 노태우 정부의 ‘7·7선언’과 국가보안법 사이의 모순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추궁했다(1989년 5월23일 국회 외무통일위원회 속기록).
한편, 이 사건의 수사를 전담한 공안합수부의 적법성에 대한 찬반도 논쟁의 도마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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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 박건웅
■ 법정에서 유죄 받고 역사에서 무죄 받겠다
서울형사지방법원 합의30부(재판장 정상학 부장판사)는 그 다음달(6월) 26일 오전, 이 사건의 첫 공판을 열었다.
이날 문 목사는 공판에 임하는 자신의 심경을 말했는데 그 요지는 이러했다.
“내가 서울대 강연 갔을 때 한 학생이 자기 몸에 불을 지르고 투신해서 죽는 엄숙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의 숭고한 죽음에 값하는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강연을 가는 그날, 지금 저 뒤에 앉아계시는 아흔이 넘으신 저의 어머님께서 ‘이 얘기는 꼭 해라. 제 몸에 불 지르고 죽는 일은 제발 중단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해라.’ 그런데 나는 어머님의 그 부탁을 왜 강연 첫 머리에 얘기하지 못했나? 그의 죽음이 나의 죽음입니다. 나는 그때 죽었고 남은 생을 너를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나는 (재판을) 받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민통련 간부들을 구속하고 조사하고 수배하고…. 이런 놀음에 놀아날 수는 없지 않나요? 나는 무죄지만, 1000여명의 양심수들과 같이 유죄를 받고 역사에서 무죄를 받겠습니다. 그들을 두고 다시는 내가 먼저 나갈 수는 없습니다. (중략) 마음대로 구형하고 마음대로 언도하십시오. 그러나 저는 사법부가 인권의 보루가 되는 날을 보고 죽을 것입니다. (중략) 해방 이후 45년이 지나도록 남들이 그려놓은 38선을 지우지 못하고 있는 것은 수치이며, 실정법을 어겨가면서까지 평양에 갔다온 것은 이 민족의 비극을 청산해보고 싶은 생각에서였습니다.”
이날 변호인단은 이 사건의 수사 및 공소 제기는 문서상의 기재와는 달리 현행법상 어디에도 존립의 근거가 없는 공안합수부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어서 부적법하다는 이유로 공소 기각을 신청했다. 문 목사 사건 수사를 계기로 발족한 공안합수부는 그 설치, 권한 등에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는 기구로 검찰·경찰·안기부·보안사 등의 혼성팀이고 검찰의 독립, 책임의 소재, 민간인 수사를 할 수 없는 보안사의 참여 등 위법적인 요소가 있어 국회와 언론에서도 논란의 대상이 된 바 있다.
■ ‘평화통일’ 헌법 조항은 북을 적대시 말라는 뜻
7월10일 열린 2차 공판에서 유원호 피고인은 “북한을 보는 시각과 가치판단에 따라 반국가단체인지의 여부를 다르게 인식할 수 있다”고 진술해 주목을 끌었다. 3차 공판(7월24일)에서 문 목사는 “우리 헌법이 대통령에게 평화통일 임무를 주었다는 것은 북한을 적대시하지 않는다는 뜻인 만큼, 지금은 남북이 모두 각각의 체제만을 고집하여 통일을 요원하게 할 것이 아니라 ‘평화통일’이라는 남북 공통의 ‘문패’라도 하나 붙여야 할 단계라고 생각한다”고 진술했다.
문 목사가 자신의 연방제 통일 방안에 대해 정리된 답변을 한 것은 8월17일의 4차 공판에서였다. 그는 “상호 교류와 동화를 통해 남북 간의 격차를 줄여나가는 과도기적 단계로서 연방제를 하자는 것이 나의 생각”이라며 “북한은 그동안 남쪽의 통일 방안이 2개의 국가를 고정시키려는 것으로 보아왔으나 내가 남쪽 각 정당의 통일방안도 ‘1민족, 1국가, 2체제’로 연방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김 주석에게 설명해 단계적 연방제 통일안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낸 것이 이번 방북의 큰 성과”라고 말했다. 또 귀로에 기자회견을 통해 방북 성과를 밝힌 것도 순전히 자신의 판단에 의한 것이지 공소장 내용처럼 북의 지시를 받아서 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유원호 피고인은 변호인의 반대신문에서 “통일은 화해와 일치를 추구하는 한국 기독교의 당면과제이기 때문에 북한을 방문하게 되었다”고 자신의 방북 동기를 밝히기도 했다(8월28일 5차 공판). 그 다음 공판에서 문 목사는 “지난해 7·7선언과 대통령의 국회 연설 및 유엔 연설 등 세 차례에 걸쳐 다각적 민간 교류의 활성화 방침을 밝혔음에도 정부는 정주영씨 방북 이외에 남북작가회의, 학생회담 등 모든 남북 교류를 탄압했다”고 비판하고 “결국 통일문제를 정부에만 맡겨두었다가는 아무것도 될 수 없다는 생각에서 평양 방문 결의를 굳혔다”고 진술했다(9월4일 6차 공판).
변호인단에서는 이홍구 통일원 장관을 증인으로 신청했고 재판부는 이를 채택했다(9월11일 7차 공판). 그러나 이 장관은 9월18일의 9회 공판에 출석하지 않았고, 이에 그를 재소환해 다음 공판기일에 신문토록 해달라는 변호인단의 요구를 재판부는 묵살한 채 사실심리를 마치려고 했다. 그러자 두 피고인은 그러한 졸속 심리에 항의하는 뜻으로 재판부의 보충신문에 묵비권 행사로 불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변호인단은 재판부에 대한 기피신청을 하고 전원 퇴정했으며, 두 피고인도 검사의 구형 직전에 일방적으로 법정을 나왔다.
■ 검사보다 재판부와 더 싸운 난타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부는 피고인도 변호인도 없는 상태에서 증거조사 절차를 강행하고 검사의 구형(두 피고인에게 각 무기징역)까지 하게 하여, 훗날 항소심에서 위법 심리라는 지적까지 받게 된다. 재판부의 재판 강행에 항의하는 표시로 전원 퇴정까지 한 당일로 변호인단(앞서의 ‘접견금지’ 기사에서 거명된 4명의 변호사와 박원순·박인제·조용환 변호사)은 ‘국가보안법에 대한 위헌 여부 심판 제청 신청’을 법원에 냈다.
10월4일 선고 공판이 열릴 예정이었으나 수감 중인 피고인들이 재판부에 항의해 법원 출석(출정) 자체를 완강히 거부하는 바람에 열리지 못했다. 문 목사는 재판부에 ‘행정부에 대해 저자세가 되고 스스로 사법부의 권위를 실추시킨 재판부 앞에 나서는 것을 치욕으로 느껴 출석을 거부한다’는 이유서를 보냈다. 선고기일로 재지정된 10월5일, 두 피고인은 전날과 달리 출정에는 응했으나 문 목사가 “처음부터 얼마의 형량이 떨어지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고 말한 뒤 곧 퇴정해버림으로써 궐석재판으로 판결이 선고되었다. 국가보안법상의 지령 수수, 잠입 탈출, 회합 통신 및 금품수수죄에, 문 목사에게는 찬양 고무 동조죄를, 유원호씨에게는 자진 지원, 국가기밀누설죄를 얹어서 두 사람 모두 징역 10년, 자격정지 10년형을 받았다. 공소사실 중 극히 일부는 무죄로 되었으나 변호인단은 항소이유서에서 이것을 ‘체면치레’라고 힐난했다.
이 사건 1심 재판을 두고 변호인단의 어떤 변호사는 검사와 싸웠다기보다는 재판장하고 싸운 재판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만큼 단상단하가 난타전을 치른 셈이었다.
법원행정처에서 발간한 <법원사>에도 ‘제1심 공판은 그 해 6월25일 처음 열린 이래 모두 9차례 진행되었는데, 순탄하게 나아가지 못하고 진통을 겪었다. 방청인들의 잦은 법정 소란행위, 변호인들의 재판부 기피신청 및 집단 퇴장, 피고인들의 일방적인 퇴정에 의한 궐석상태에서의 증거조사 및 구형 등으로 이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다. 문 목사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좌경세력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를 내세워 문 목사의 귀국 전인 (4월)3일, 민족문학작가회의 부회장 고은, 전민련 조국통일위원장 이재오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하는 등 재야진보세력에 대한 기습적 수사를 감행했다. 12일에는 학계에서 민주화운동을 이끌어 온 리영희(한양대), 백낙청(서울대) 두 교수가 공안합수부에 연행되어 철야 조사를 받았다. 당국은 문 목사 방북과 관련된 조사라고 하면서 그 중 리영희 교수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했다. 그러나 구속영장을 보면 리 교수가 논설고문으로 있는 한겨레신문의 북한 취재 계획을 문제 삼고 있어서 언론 탄압이란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2015-06-28> 경향신문
☞기사원문: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38) 문익환 목사 방북 사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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