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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으로 읽는 70년](12)한·일 국교정상화 청구권 자금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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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일본 ‘독립축하금’·한국 ‘청구권 자금’…결국 ‘배상’은 하지 않았다

ㆍ1945년 이전 협약 “무효 시점 각각 해석” 두루뭉술 합의

ㆍ일 “종전 이전 무효…한일협정 자금은 배상금 아니다”

ㆍ배상 문제 불거지자 “한국이 유일 정부 아니다” 발빼기


35년간 식민지였던 한국이 제국주의 일본과 관계 정상화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른 식민지와는 달리 이웃 나라에 식민지화되었으며, 수천년 동안 독립된 왕조를 유지하고 있다가 무력을 동원한 강제에 의한 조약으로 식민지가 된 한국으로서는 35년간의 박탈감이 너무나 클 수밖에 없었다.

해방과 함께 시작된 세계적 차원에서의 냉전체제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 정상화가 불가피할 수밖에 없었다. 안보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경제재건을 위해서도 한·일관계의 정상화가 필요했다.

문제는 한국과 일본에서 관계를 정상화할 수 있는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무엇보다도 과거에 대한 양국 간의 인식 차가 너무나 컸다.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식민지 시기의 피해에 대해 배상받고자 했다. 이승만 정부는 일본에 의해 입은 피해를 목록으로 꼼꼼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일본도 배상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미군정이 압수한 일본인의 사유재산에 대한 보상이었다.

게다가 일본 측 협상 대표였던 구보다는 식민지 시기에 한국에 투자도 하고 근대화도 시켜주었는데, 왜 배상을 해야 하느냐고 주장하기도 했다. 지금 아베 총리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일본 극우 세력들의 주장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 한·일 양국 대표가 1965년 6월22일 일본 도쿄 총리 관저에서 국교정상화 조인식을 갖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을사늑약·한일합방조약은 무효

배상을 둘러싼 논란은 이렇게 식민지 시기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1945년 이전에 있었던 조약의 해석에 대한 의견 차이에서 나타났다. 1965년 한·일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있었던 조약들을 무효로 해야 하는데, 이에 대한 양국의 견해가 달랐던 것이다. 문제가 된 조약은 1905년의 을사늑약과 1910년의 한일합방조약이었다.

한국 정부는 두 조약이 모두 체결 당시부터 무효라고 주장했다. 두 조약이 모두 자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본의 무력 시위 속에서 강제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국제법적으로 자의가 아닌 강제에 의해 조약이 맺어질 경우에 이는 모두 무효였다. 을사늑약은 1963년 유엔의 국제법위원회에서 ‘국가 대표에 대한 개별적 압박’에 의해 ‘효력을 발휘할 수 없는 조약’의 하나로 규정되었다.

일본의 입장은 달랐다. 두 조약은 그 자체로서는 무효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 측에서 모두 자발적으로 서명을 했기 때문에 무효가 아니고, 그렇다면 일본에 의한 보호통치(1905~1910년)와 식민지 지배(1910~1945년)는 모두 유효한 조치가 된다. 이렇게 될 경우 일본에 의한 한국의 지배는 국제법적으로 합법적인 것이 된다.

1945년 이전 조약의 해석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만약 그 조약들이 자체로서 무효일 경우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배상을 요청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배상을 요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 식민지였던 국가들이 제국주의 본국으로부터 배상금을 받았던 경우는 없었다. 오히려 대부분은 식민지 시기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국가들은 영연방(Commonwealth Countries)을 결성해 지금까지도 그 틀을 유지하고 있다. 일본이 배상한 국가들은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이 5년여를 점령했던 동남아시아 국가들이었다. 하지만 한국뿐 아니라 이웃 국가에 의해 폭력적으로 식민지 지배나 점령 통치를 경험한 국가들은 식민지 시기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아일랜드, 알제리, 폴란드, 핀란드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 한·일, 청구권 자금 성격에 이견


조약 해석에 대한 한·일 정부 사이의 논쟁에서 기가 막힌 묘수가 나왔다. 양국 정부가 각각 자신의 의견대로 해석하기로 한 것이다. 즉, 한국 정부는 조약이 맺어지는 순간부터 무효로, 일본 정부는 일본 제국이 해체되는 1945년부터 무효로 해석하자고 한 것이다. 그래서 조약의 원문에서는 1945년 이전의 조약을 ‘이미(already) 무효’라고 규정하면서 특별한 시기적 조항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은 배상금 대신 독립축하금을 주었고, 한국은 ‘청구권 자금’이라고 명명하면서 배상금의 성격을 포함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1965년의 시점에서 본다면 청구권 자금이 배상금이 아니었다는 점에서는 일본의 입장이 관철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배상금이 아님으로 인해 현재 일본 정부도 입장이 곤란해졌다. 왜냐하면 위안부 문제 등 일본 정부, 군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한 책임이 청구권 협정으로 모두 해결됐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청구권 자금은 배상을 위한 자금이 아니었다. 일본 정부는 1995년 무라야마 담화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식민지 지배에 대해 반성과 사과의 뜻을 밝히면서도, ‘합법이었지만, 잘못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법적 책임은 없다’는 애매한 입장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2011년과 2012년 한국의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의 배상 판결은 청구권 자금의 애매한 성격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또 다른 문제는 대한민국의 지위 문제였다. 한국 정부는 대한민국을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해달라고 한 반면, 일본 정부는 유엔 승인안에 근거해 유일한 정부로 인정하겠다고 주장했다. 즉, 1948년 5월10일 선거가 이루어진 지역에서만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주장이다. 이것도 결국은 일본의 주장이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한국과 일본의 시민사회는 모두 한일협정에 반대했다. 한국의 시민사회는 굴욕적인 협정에 반대한 것이고, 일본에서는 북한과도 협정을 맺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한국의 경우 한일협정 반대 시위는 정권 자체를 위협할 정도로 큰 규모로 일어났다. 주한미군사령관의 허가 아래 군대를 동원해 위수령을 선포(6·3사태)해서야 진압이 이루어졌다. 한일협정에 반대했던 야당뿐만 아니라 위수령에 찬성했던 미국도 이 시위로 인해 박정희 정부가 붕괴할 수도 있다고 판단할 정도로 심각한 위기였다.

한국과 일본의 시민사회가 모두 동북아시아의 발전과 협력을 위해 한·일관계 정상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그럼에도 반대 시위가 일어났던 것은 그 협정을 통해 풀어야 할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또 한국에서의 한일협정 반대 시위에서는 한일협정에 미국이 개입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이 밖에도 한일협정은 한·일 간에 풀어야 할 문제들이 모두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채 조인됐다. 한일협정은 기본관계 조약 외에 재일동포, 문화재, 해상분계선, 경제협력에 대한 조약이 함께 체결되었는데, 1965년 이후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일협정에서 합의한 모든 이슈에 대해 양국 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해상분계선 문제로 1995년 일본은 한일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였으며, 1998년 잠정공동수역안이 체결되었지만, 해상분계선과 독도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경제개발이 시급했던 시기에 청구권 자금으로 일본으로부터 받은 돈은 소중하게 사용됐다. 그러나 눈앞의 긴급한 사안을 해결하기 위해 정작 한국과 일본 정부 사이에 논쟁이 되는 이슈들에 대해 합의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50년이 지난 지금 한·일관계는 최악의 상태에 다다라 있고 후유증도 계속되고 있다.

<2015-06-22> 경향신문

☞기사원문: [광복 70주년 특별기획 – 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12)한·일 국교정상화 청구권 자금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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