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협정 50주년, 박 대통령 “가장 큰 장애 요소인 과거사” 언급하는 등 과거사 덮고 가겠다는 두 정상… 복잡한 국제관계 속 과거사는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견제할 카드인데도 한국 정부는 활용할 생각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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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은 한-일 국교 정상화 기념 축사에서 “과거사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자”고 했다. 지난 6월22일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 기념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는 박 대통령. 청와대사진기자단
한-일협정 체결 50주년을 맞은 6월22일 오전 일본 참의원회관 회의실. 민주당의 아이하라 구미코 의원 주선으로 후생노동성 관료와 2차 협의를 했다. 옛 일본 군인·군속 출신의 한국인 유골 조사와 봉환 문제를 다뤘다. 딱 하루가 모자라는 1년 만에 후생노동성 관료들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주제로 만난 것이다. 1시간 남짓한 이 만남에서 후생노동성 담당관만 바뀌었을 뿐 상황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이 세상 관료들의 만국 공통어만 지루하게 되풀이되는 자리. 지난해와 변함없이 ‘필요할 경우 한국 정부와 협의하겠다’는 상투적이고 공허한 말만 회의실을 맴돌았다.
<산케이신문>도 놀란 아베의 미 의회 연설
같은 날, 한-일 양국 수뇌는 한-일협정 50주년을 기념하는 식장에 나와 ‘축사’를 했다. 아베 신조 총리는 축사에서 “우리는 많은 전략적 이익을 서로 공유하고 있다. 현재의 북동아시아 정세를 감안하면 일-한 양국의 협력 강화는 양국은 물론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안정에도 더없이 소중하다”고 했다. 침략과 식민지배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고, 오로지 안보를 위해 한-일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뿐이다. 한-일 간의 ‘과거사 문제’는 아예 무시했다.
놀랍지도 않은 것이 이런 태도는 지난 4월29일 아베 총리가 미국 의회에서 연설한 내용에서도 확인되었다. 2차 세계대전 뒤 일본이 국제사회에 공헌한 내용만 잔뜩 늘어놓은 채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전쟁으로 몰아간 과거사는 일본을 자랑하기 위한 장식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뻔뻔한 발언에 놀랐는지 <산케이신문>조차 ‘국내용’으로나 할 법한 연설을 미 의회에서 했다고 비판했다. 아베에겐 동아시아가, 그리고 과거의 상처가 아예 안중에 없다.
박근혜 대통령의 축사는 어떤가. “국교정상화 50주년인 올해를 한-일 양국이 새로운 협력과 공영의 미래로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전환점”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가장 큰 장애 요소인 과거사의 무거운 짐을 화해와 상생의 마음으로 내려놓을 수 있도록 만들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추상적이고 공허한 말의 잔치를 거둬내고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 추궁이나 미해결 문제는 덮고 가자’이다. 기대한 바 없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이 축사는 박근혜 정부의 그간 국정 운영에서 확인됐던 무지·무능·무책임이라는 ‘3무’가 외교정책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65년과 2015년이라는 시간 사이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 가운데 한-일 관계를 규정하던 이른바 ‘65년 체제’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65년 체제’란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에 수립된 미소 냉전 체제의 하위 체제, 즉 분단 체제 구축이라는 과제로 인해 식민주의 청산 과제가 미봉적으로 해결되거나 억압되는 체제였다.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미-일과 미-남한 대 소련과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북한이라는 대결 구도가 수립됨에 따라 한국과 일본 사이에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 추궁 문제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되었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미국을 매개로 한 한-미-일 의사(擬似) 삼국동맹 체제(미-일 동맹과 한-미 동맹)였다. 그러나 이것이 완전한 동맹 체제로 형성되지 못한 이유는 식민지배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채 봉합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1980년대 후반 들어 ‘65년 체제’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냉전 체제의 해체와 경제 교류의 확대 및 다각화가 진행되는 한편, 한국의 민주화로 인해 그동안 국가권력에 의해 억압당했던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 추궁의 목소리가 커져나갔다. 이러한 균열은 최근 들어 더욱 확대되었다. 미국 경제의 상대적 쇠퇴와 중국 경제의 눈부신 약진,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군사적 역할 확대를 요구하는 미국의 정책 변화, 북핵 문제 해결의 교착상태 장기화, 영토분쟁과 역사인식 갈등 심화 등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적 갈등과 협력의 양상이 복잡하게 바뀌고 있다. 즉, 이전처럼 단일한 방정식과 해법이 아니라 복수의 방정식과 해법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65년 체제’ 균열, 복수의 방정식·해법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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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한-일 국교 정상화 기념 축사에서 “지금까지 50년간 우호의 역사를 돌이켜보고 앞으로 50년을 내다보자”고 제안했다. 지난 6월22일 도쿄에서 열린 한-일 국교 정상화 기념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는 아베 총리. REUTERS
한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동북아시아의 복잡한 방정식을 권혁태 성공회대 교수(일본학)는 역사인식과 영토 문제, 외교안보 문제, 경제 문제라는 세 차원에서 분석한 바 있다. 동북아는 협력·대립·경쟁의 구도가 세 차원에서 복잡하게 교차하는 상황에 있으며, 협력(외교안보와 경제)과 대립(영토·역사인식), 경쟁(환율·경제) 사이의 힘의 구도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했다. 여기에 미국의 동북아 전략까지 시야에 넣으면 상황은 더 난해하다. 상황이 복잡하다는 것은 그만큼 현재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말하며, 반대로 이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각국의 목소리를 키울 수 있는 카드를 예전보다 많이 가졌다는 이야기다. 예컨대 한국엔 대일 과거사 문제가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견제할 수 있는 유효한 카드인 셈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는 그 카드들을 활용할 역량이 없다. 변화된, 그리고 변화할 정세를 이해하고 대처할 인식도 의지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주권국의 최고 책임자로서 책임 있게 문제를 해결하거나 미래를 제시하지도 못한다. 미국의 요구에 충실히 응하는 것 외에 다른 가능성을 아예 생각하지 않는다. 하기야 전시작전권까지 동맹을 위해 반납하는 ‘호구’들에게서 무얼 기대할까. 한반도의 미래를 볼 때 매우 불행한 일이다.
2012년 8월 미국 공화당의 리처드 아미티지와 민주당의 조지프 나이가 초당파 공동보고서를 냈다. ‘아미티지-나이 제3차 보고서’라고도 불리는 이 보고서는 ‘일본이 이류 국가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여러 가지 훈수를 두고 있지만, 최종 목적은 미-일 동맹 강화에 있다. 이 보고서는 한-일 간 역사 갈등에 대해서도 한마디 거들었다. 미-일 군사동맹 강화에 한-일 간 역사 갈등이 장애 요소로 작용하고 있으니, 일본 정치인에게 극단적인 발언을 삼가고,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중지하라고. 이 메시지는 일본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도 과거사 문제를 그만 제기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다.
참의원회관 앞, 민주주의 지키려는 절박함
“미국은 중국이 대두하는 상황에서 아시아 회귀 전략을 내세우고 이를 위해 한국과 일본에 ‘관계 개선’을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관계 개선이 식민주의의 청산과 전후 보상의 실현을 막고 또다시 미루는 것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 지난 6월20일 도쿄에서 한일시민선언실천협의회(한국)와 일한관계바로잡기캠페인(일본)이 공동으로 주최한 행사에서 채택한 ‘2015 한일시민공동선언- 식민주의를 청산하고, 함께 동아시아의 평화로운 미래를 열어가자!’의 한 구절이다. 이 우려가 한-일 양국의 축사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국회 참의원회관을 나오는데 전국에서 올라온 시민단체들이 국회를 ‘포위’하고 아베의 해석 개헌을 저지하기 위해 집회를 열고 있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이렇게 다양한 이념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한목소리를 낸 게 그다지 흔치 않다. 그만큼 일본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의식이 컸기 때문이리라. 한낮의 뙤약볕에서 퍼져나오는 외침 속에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절박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눈인사를 나누며 돌아오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귀국하는 비행기에서도 그 무거움은 사라지지 않고 더 커졌다.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도쿄=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
<2015-06-29> 한겨레21
☞기사원문: 한-일 정상, 한-일 관계의 가장 큰 ‘장애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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