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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교수 “위안소는 일본군 설치시설, 공문서로 실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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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이 교토대 교수 “공창시설과 달라…군의 책임 부정 못해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일본 공문서를 토대로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연구해온 나가이 가즈(永井和) 교토(京都)대 대학원 교수(일본근현대사)는 “일본군 위안소가 군이 설치한 후방시설이라는 것을 군이나 경찰의 공문서로 실증했다”고 말했다.


나가이 교수는 2일 아사히(朝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1993년 8월 고노(河野)담화 발표 후 이뤄진 자신의 연구가 ‘위안소는 전지(戰地)에서의 공창시설, 즉 민간의 매춘시설이며 군에 책임이 없다’는 주장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면서 이렇게 언급했다.


그는 1937∼1938년 위안소 설립이 추진될 당시 중국 상하이(上海)의 일본군 특무기관, 헌병대, 일본총영사관이 업무를 분담하기로 협정을 체결했고, 군의 의뢰를 받은 업자가 일본과 한반도에 파견돼 ‘황군(皇軍) 위안소 작부(酌婦) 3천 명 모집’이라고 알리며 여성을 모았다고 설명했다.

나가이 교수는 당국과 군 사이에 이뤄진 협조를 잘 모르는 일부 지방 경찰이 위안부 모집 활동을 단속하려 했고 형법의 ‘국외이송목적 괴치'(拐取, 유괴와 약취) 혐의로 업자를 조사하는 일도 있었으나 결국 사정을 알고 업자를 석방했다고 예를 들었다.

그는 “육군대신이 중일전쟁 개시 후인 1937년 9월에 ‘야전 주보(酒保, 군대의 영내 매점)규정’이라는 규칙을 개정한 기록을 2004년 방위청방위연구소의 소장자료에서 발견했다”며 위안소가 군 시설인 근거를 제시했다.

1937년 9월 29일 자로 육군대신이 공표한 ‘개정야전주보규정’을 보면 ‘주보’에 ‘위안 시설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는 항목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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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이 교수는 1941년 육군경리학교교관이 집필한 교재인 ‘초급작전급양백제’에도 ‘위안소의 설치’가 업무의 하나로 기재되는 등 “위안소는 민간 업자가 불특정 다수 손님을 위해 영업하는 통상의 공창시설과 다르다”고 지적했다.


이어 “위안소는 군이 군사상의 필요에서 설치·관리한 장병전용의 시설이며 군 편성의 일부로 돼 있었다”고 강조했다.

나가이 교수는 전쟁 전에도 인권을 이유로 공창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비판이 있었고 내무성이 ‘창기(娼妓)단속규칙’을 정하기도 했으나 군의 위안소에 관해서는 그런 정도의 규칙조차 발견되지 않았다며 위안소 제도가 ‘인신매매에 의한 노예제도’였다는 비판을 받아도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을 내놨다.


또 위안부를 모집하는 과정에서 업자가 ‘좋은 일이 있다’고 여성을 속여 데려가는 ‘취업 사기’나 ‘유괴’가 이뤄졌다는 증언이 많으며 이는 형법의 ‘국외이송목적괴치죄’에 해당한다고 부연했다.

나가이 교수는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등 점령지에서는 일부 부대에 의해 납치, 유괴와 같은 강제연행이 벌어졌다는 것이 전범재판 기록 등에서 드러났고 군이 강제 연행을 명령했는지와 상관없이 군의 책임을 부정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2013년 8월 8일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이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학교에서 공개된 일본군위안소 조선인 관리자의 일기를 들어보이고 있다. 이 일기는 지난 1942년부터 1944년 말까지 버마(현 미얀마)와 싱가포르의 일본군 위안소에서 일하던 한 조선인이 작성한 것으로, 일본군위안소의 경영 실태와 일본군위안부의 생활상 등이 담겨 있다. 또 일본군이 일본군위안부를 여러 차례 조직적으로 동원한 사실 등도 남겨져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중국 상하이에서 발견된 어메이(峨嵋)로 400번지 일본군 위안소의 모습. 전쟁 당시에는 3층 건물이었으나 지금은 2층이 더 높아진 5층 서민 아파트로 변해 주민이 살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sewonlee@yna.co.kr


<2015-07-02> 연합뉴스

☞기사원문: 일본교수 “위안소는 일본군 설치시설, 공문서로 실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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