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북괴 북괴 하는데, 대통령이 김 주석 만나 ‘북괴 수령’이라 하겠소?”
■ 항소이유와 국가보안법의 문제점
이 사건의 항소심은 서울고등법원 제5형사부(재판장 안문태 부장판사)에서 맡게 되었다. 그러나 변호인단이 A4로 100장이 넘는 장문의 항소이유서에서 지적하고 촉구하고 호소하고 기대한 모든 것은 허공 속에 메아리치는 ‘산산이 부서진 이름’으로 끝났다.
항소심 판결은 변호인단이 항소이유로 지적한 원심(1심)의 다음과 같은 과오, 즉 (이하 항소이유의 요지) (1)공판절차의 위법성 (2)수사와 기소절차의 위법성 (3)실체적 판단의 위법성(북한을 ‘반국가단체’로 볼 수 있는가? 남북관계 진전으로 인한 ‘반국가단체성’의 상실, 북한의 전략 전술은 영원불변인가 등) 등의 쟁점에 대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국가보안법은 합헌적인 법률인가 하는 성찰에 있었다. 특히 당시 시행되고 있던 국가보안법(1980년 12월31일 개정)은 10·26 후의 비상계엄하에서 국회가 아닌, 따라서 아무런 입법권도 없는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전면 개정된 것이어서 당연히 무효일 수밖에 없었다. 이 ‘입법회의’는 전두환 군부가 5·18 직후 대통령령으로 설치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대통령 자문기구)에서 만든 ‘국가보위입법회의법’에 ‘근거’를 두고 출현하였으니 더 할 말이 없었다. 그 내용이 헌법상의 평화통일조항에 위배될 뿐 아니라 거기에 규정된 각종 범죄의 구성요건이 너무 광범하고 애매하여 죄형법정주의에 위반된다는 위헌론도 제기했다. (특히 문 목사 방북과 관련된 국가보안법 위반 논란에 대해서는 김창록 <문익환 목사의 방북과 국가보안법>, ‘법과 사회’, 1989·8/이희연·이한 <민족통일로 가는 장정>-문 목사 방북의 정치, 사법적 쟁점과 평가 -‘걸어서라도 갈 테야’, 실천문학사, 1990)
l 일러스트 | 박건웅
■ 국판(인쇄) 40면이 넘는 문 목사의 상고이유서
그런 중에도 항소심은 원심을 파기하고 1심보다 형량을 낮추어 두 피고인에 대하여 모두 징역 7년을 선고하였다. 원심 판결을 파기한 이유는 1심에서 변호인들이 재판부의 불공정에 항의하는 뜻으로 전원 법정에서 퇴장했을 때 ‘재판부가 그 상황에서 그대로 증거조사를 강행한 것은 필요적 변호제도에 관한 헌법 및 형사소송법의 규정을 위반하였다’는 요지였다.
앞서 언급한 국가보안법 및 그 적용상의 문제점을 따지는 항소이유를 받아들인 원심 파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문 목사 자신의 상고이유서는 더욱 간절하고 엄청나게 긴 문서로 남아있다. 나중에 책으로 출판했는데, 국판으로 40면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제목은 ‘상고이유서’였지만 자신의 방북 전후의 행위, 그 동기와 상황, 그리고 민족관·통일관을 구어체로 서술한 문서였다. 그렇다고 피고인들이나 변호인들이 대법원의 판결에 큰 기대를 건 것은 아니었다. 대법원 판결은 흔히 ‘일건 기록을 정사(精査)하건대’로 시작하여 ‘…변호인의 상고이유와 같은 위법이 있다고 볼 수 없다’라거나 ‘변호인의 논지는 독단적 견해에 불과하다’는 상투적 문구로 끝나는 것이 통례였기 때문이다. 특히 이 사건처럼 남북한을 오간 공안사건 또는 국가보안법 사건의 경우 사법부는 언제나 정권 차원의 안보의식에서 한발도 벗어나기가 어려웠던 것이 엄연한 우리의 현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법원 제3부(재판장 이재성 대법관, 주심 김용준 대법관)는 1990년 6월8일 피고인 및 검사의 각 항소를 모두 기각함으로써 원심(서울고등법원)의 판결을 그대로 확정시켰다.
■ 한 입으로는 ‘북괴’, 한 입으로는 ‘민족공동체’?
법원의 판결이야 그럴 줄 알았지만, 남북문제를 둘러싼 정권의 표리부동한 이중성과 모순은 판결문에 그대로 배접(褙接)되어 있었다. 이에 실망한 어떤 이는 오히려 피고인석의 문 목사가 1심 법정에서 한 진술이 설득력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바로 이런 말이었다. “검사님이 공소장을 낭독하는 것을 들으니 ‘북괴, 북괴’하는데, 노 대통령이 북의 김 주석을 만날 때 ‘당신 북괴 수령이오?’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있어요? 한 입으로는 북괴, 또 한 입으로는 민족공동체… 정부의 정신분열증은 전 국민에게 정신분열증을 일으키게 하고 있습니다.” “45년이나 남이 그려놓은 금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정말 부끄럽습니다. 남북은 서로 상대방을 찬양 동조해야만 통일이 됩니다. 찬양 동조를 범죄라고 처벌하면 어떻게 남북 합의가 이루어집니까?”
문 목사가 남과 북을 오가며 통일을 위한 열정을 불태울 때 그의 나이도 칠순을 넘겼는가 하면 건강도 몹시 악화되어 갔다. 그래서 변호인단은 항소심에서 그에 대한 구속집행정지 신청을 내고 석방을 요청했었다. 71세의 고령인 데다가 고혈압, 콩팥기능 저하 외에 심근경색을 초래할 수 있는 허혈성 심장질환까지 앓고 있다는 전문의의 소견서도 제출했다. 그러나 허사였다. 그 후 문 목사는 대법원에서 7년형이 확정되어 기결수가 된 지 넉 달이 되던 그해 10월에야 형집행정지로 19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는 풀려나온 뒤에도 고령과 신병을 무릅쓰고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결성준비위원장을 맡았는가 하면, 군사독재에 항거하여 젊은이들의 분신이 속출하는 가운데 강경대군(데모 진압 전경의 집단 구타로 사망한 명지대생) 등 여러 민주열사들의 장례위원장을 맡아 정국을 긴장시켰다. 그는 석방된 후 7개월 동안 정부의 재구속 경고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대학·교회·사회단체 등에서 100회도 넘게 강연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다음해(1991년) 6월 형집행정지 취소로 재수감되었다. 1976년 3월의 민주구국선언사건, 1980년 5월의 소위 김대중내란음모사건, 그리고 1985년 5월의 5·3 인천항쟁사건 등으로 구속과 형집행정지, 그리고 재수감을 되풀이해 온 그로서는 6회째의 투옥이었으며, 1993년 3월 다시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그리고 다음해 1월18일 급환으로 그 치열한 삶을 마쳤다.
■ 황석영, 임수경, 박용길 등 잇따른 방북자들
문 목사의 부인 박용길 장로 역시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맹렬한 여류 운동가였다.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통일맞이 7000만 겨레모임을 이끌어왔으며, 1995년 6월 김일성 주석의 1주기 때에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와 그 또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옥고를 치렀다.
1989년은 남한 인사의 방북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서 세상을 깜짝깜짝 놀라게 한 해였다. 그해 3월20일엔 <장길산>의 작가 황석영이 북한의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초청으로 분단 이후 남한 작가로서는 맨 처음 평양을 방문했다. 그는 북한 체류 중에 여러 행사에 참여하고 김일성 주석과도 몇 차례 만나는 등 활동을 하다가 돌아오는 길에 일본, 독일을 거쳐 미국에 머무는 등 해외에서 4년을 보낸 뒤 1993년 5월 귀국하였다. 그리고 정석대로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구속되어 실형을 받고 복역하였다.
문 목사 방북 석달 뒤인 (1989년) 6월 하순에는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에서 파견한 임수경(한국외대 학생)이 순안비행장에 모습을 드러내어 다시금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그는 7월1일부터 8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다음, 그를 데리고 귀환하기 위해 미국에서 입북한 문규현 신부와 함께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 귀환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징역 5년형이 확정되어 복역하였다.
이처럼 국내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나섰던 인사들의 방북을 놓고 그 공과를 논하는 입장도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친여 측의 ‘반국가 이적론’과 야권의 ‘통일을 위한 분단 극복론’의 대립이 그것이다. 그런데 범야당과 재야세력 가운데서도 집권 측의 공안정국 조성에 빌미를 주었다는 점에서 비판적인 견해를 내세우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공과론을 두고 방북 당사자 중의 한 사람인 황석영은 자신의 방북을 ‘분단시대 작가로서 분단 모순을 극복하고 통일을 앞당기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1989년 재야의 방북 열기는 6공 정권의 형식적인 부추김에 고무된 바도 있었고, 혹시나 함정일 수도 있다는 여론이 있었지만, 비록 함정에 빠져 정권에 역이용당하는 시행착오를 겪게 되더라도 자주 교류 투쟁은 한번쯤 거쳐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었습니다. 그래서 이후 문 목사님이나 저나 재야의 일부로부터 공안정국을 초래했다는 비난을 받게 되는데, 여러 고비를 넘어서다 보니 역시 방북투쟁은 유효했다고 생각됩니다.”
■ ‘반국가단체’와 상호 존중, 내정 불간섭이라며
노태우 정권의 대북·대공산권 정책의 변화, 즉 1988년의 이른바 ‘7·7선언’(민족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특별선언)과 공산권 국가들과의 수교 등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은 국내 인사들의 방북을 부추긴 일면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일은 국내에서는 그런 방북을 반국가적 이적행위로 엄단하면서도 정권 차원의 대북관계는 급진전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1990년 9월 북한의 연형묵 총리 등 대표단이 판문점을 넘어와 서울에서 남북고위급회담을 열었고, 그 다음달에는 강영훈 총리 등 남측 대표단 90명이 평양에 가서 남북회담을 가졌다. 이어 남북통일축구대회 개최, 음악인들의 방북, 남북유엔동시가입, 남북기본합의서(‘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의 발표 등 놀라운 변화가 잇따랐다. 특히 위 남북합의서에는 남북이 상대방 체제를 서로 존중하고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조항까지 들어 있었으니, 실로 경탄할 일이었다. 그런데도 당시 남쪽에서는 ‘종북’이라는 규탄 대신 ‘영단’이라는 칭송만 나왔다.
수사 정보기관과 법정에서 불구대천의 반국가단체라고 적대시하는 ‘북괴’가 집권자의 필요에 따라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변하여 상호 존중과 불간섭 교류를 다짐했으니, 이처럼 이중성에 능한 정권 밑에서는 국민 노릇하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개탄도 나왔다.
<2015-07-06> 경향신문
☞기사원문: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39) 문익환 목사 방북 사건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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