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박정희 3공화국 떠받친 정치 슬로건… 1965년 한일협정으로 역풍
▲ 광복 20년밖에 안된 시대
정신적 문화의 보존 욕구가
1963년·1967년 대선에서
박정희 당선의 헤게모니로
▲ 한일협정 체결 목격한 대중들
‘박정희 민족주의’에 의구심
70년대 반민주주의로 공고화
박정희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광복 70년간 진행된 논쟁 이슈 중 가장 치열하면서도 정치적인 쟁점을 이뤄왔다. 물리적 시간에서 박정희 시대는 1979년에 끝났지만, 사회적 시간에서 박정희 시대는 현재진행형이다. 발전국가, 권위주의, 군사문화 등 박정희 시대를 이룬 구성물은 우리 사회에 여전히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담론의 측면에서 첫번째로 만나는 박정희 시대의 뜨거운 쟁점은 ‘민족적 민주주의’였다. “시체여! 너는 오래전에 이미 죽었다. 죽어서 썩어가고 있었다. 넋 없는 시체여! 반민족적 비민주적 민족적 민주주의여!” 1964년 5월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에서 당시 서울대 학생이었던 시인 김지하가 쓴 장례식 조사(弔詞)인 ‘곡(哭) 민족적 민주주의’의 첫 부분이다.
비서구사회에서 민족주의, 민주주의, 발전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독립국을 이끌었던 3대 이념이었다. ‘민족적 민주주의’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결합시킨 말이다. 그런데 1964년 당시 대학생들은 왜 민족적 민주주의의 장례식을 치러야 했을까.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는 학생들이 주도했던 1960년 4월 혁명의 핵심 이념이지 않았던가. 민족적 민주주의 논쟁은 1960년대의 박정희 시대를 이해하는 중요한 한 통로를 제공한다.
박정희·윤보선·김종필(왼쪽부터) |
■ 논쟁의 진행 과정
민족적 민주주의를 본격적으로 제시한 이는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그는 1963년 10월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 후보에 대항해 민족적 민주주의를 주창했다. 정치학자 강정인(서강대 교수·정치학)에 따르면, 박정희는 서구식 민주주의를 우리 실정에 맞게 수정·변형한 ‘행정적 민주주의’(군정 단계), ‘민족적 민주주의’(제3공화국), ‘한국적 민주주의’(유신체제)로 이어지는 담론을 제시했다.
군정에서 민정으로 가는 1963년 대선은 민족적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일대 격돌한 선거였다. 역사학자 오제연(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에 따르면, 박정희와 김종필이 제시한 민족적 민주주의가 자주와 자립 지향의 강력한 민족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였다면, 윤보선과 야당이 제시한 자유민주주의는 순수한 자유민주주의였다. 박정희는 자유민주주의를 불투명하고 이질적인 민주주의라고 비판한 반면, 윤보선은 민족적 민주주의에 대해 민족적 이념을 망각한 가식의 민주주의라고 비판했다.
선거 과정이 치열해지면서 서로에 대한 비판 수위도 높아졌다. 박정희와 김종필은 윤보선을 ‘민족 이념이 결핍된 사대주의자’로 공격했고, 윤보선과 야당은 박정희를 ‘중립주의자·반미주의자·공산주의자’라고 반격했다. 주목할 것은 당시 여론의 흐름이었다. 논쟁이 진행되면서 박정희는 민족적 민주주의자로 인식됐고, 민족주의에 호감을 갖고 있던 적지 않은 이들은 박정희를 지지하게 됐다. 1960년대 초반이라는 당대의 관점에서 볼 때 민족주의는 대체로 진보적 사상으로 받아들여졌다. 20세기 전반의 식민지 경험을 돌아볼 때 민족주의는 강렬한 유토피아적 에너지를 갖고 있던 이념이었다.
민족적 민주주의가 시험대에 오른 것은 박정희 정부의 한일협정 체결 과정에서였다. 특히 학생운동을 주도한 대학생들은 한일협정 체결 추진에 반대했고, 나아가 민족적 민주주의를 비판했다. 1964년 5월20일 서울대생을 포함한 3000명의 대학생들은 동숭동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 앞서 말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거행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반정부운동으로 바뀌었고, 6월3일 1만여명의 대학생들이 박정희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자 정부는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6·3항쟁은 이렇게 일어났다.
1965년 한일협정 체결 이후 민족적 민주주의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967년 대선에서 박정희는 다시 한 번 민족적 민주주의를 언급했다. 하지만 이때의 민족적 민주주의는 경제개발에 따른 자립을 중시하는 언설로 나타났다. 1960년대를 통틀어 볼 때, 민족적 민주주의는 조국 근대화, 새역사 창조, 민족중흥, 자립경제 등의 의미를 담은 ‘산업화 민족주의’에 가까운 것이었다. 민주화보다 산업화가 당시의 시대정신이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67년 대선 이후 민족적 민주주의는 다시 부상하지 않았다.
1964년 5월20일 서울대 학생들이 문리대(현재 동숭동 마로니에 공원)에서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이 주창한 ‘민족적 민주주의’의 장례식을 거행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긴장
역사적으로 근대 사회에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는 내적인 긴장관계를 가진다. 그것은 민족주의에 담긴 특징, 즉 대외적 민족자결을 부각시키는 이념이자 대내적 체제유지를 위한 헤게모니 장치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민족주의는, 한편에서 세계적 차원에서 진행되는 국가 간 경쟁을 고려할 때 유용한 담론의 의미를 갖지만, 다른 한편에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권위주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박정희 정부의 민족적 민주주의는 당시 국민들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민족적 민주주의를 앞세운 1963년과 1967년 두 번의 대선에서 박정희 후보가 당선된 사실을 돌아볼 때, 민족적 민주주의는 그 나름의 헤게모니를 발휘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서구사회에서 민족주의의 대중적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던 까닭은 물질적 생활에서 서구에 대한 모방이 성공적일수록 정신적 문화에 대한 보존의 욕구는 되레 강화된다는 점에 있었다.
단일 민족으로서의 오랜 역사와 일제 강점기의 민족해방 투쟁에 대한 기억은 민족주의에 배타적인 의미를 부여하게 했다. 이 민족주의가 1960년대에 발전주의와 결합해 경제성장을 위한 산업화 민족주의로 나타났다면, 민주주의와 결합해서는 민족적 민주주의로 담론화된 셈이었다. 민족적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두 이념에서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라기보다 민족주의였고, 광복을 이룬 지 20년이 채 되지 않은 1960년대 초반의 상황은 이 민족주의에 유리한 시대적 환경을 제공했다.
문제는 담론과 현실의 긴장에 있었다. 민족주의를 적극적으로 표방했음에도 한일협정 체결을 목격하면서 대중들은 박정희 정부의 민족주의에 대해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다. 1967년 대선에서 박정희 후보가 윤보선 후보에게 승리한 것은 민족적 민주주의에 있었다기보다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가시적인 성과에 있었다. 민족적 민주주의는 3선 개헌을 거쳐 10월 유신에서 한국적 민주주의로 변질됐으며, 결국 절차적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반민주주의의 공고화로 귀결됐다.
▲ 박정희 정권 비판자에서 박근혜 지지자로… 김지하의 아이러니 1960~70년대 시인 김지하(사진)의 삶은 박정희 시대의 민주화운동을 상징한다. 1959년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한 그는 1960년 4월 혁명 후 학생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1964년 5월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 거행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에서는 ‘곡(哭) 민족적 민주주의’를 작성했고,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되자 지명수배자가 돼 은신생활을 하기도 했다. 김지하가 시인으로 알려진 것은 1969년 시 전문지 ‘시인’에 문학평론가 김현의 소개로 <녹두꽃> 등 5편이 ‘지하’라는 필명으로 게재된 이후였다. 1970년대에 들어 그는 주목할 만한 시를 계속 발표했다. 특히 1970년 월간지 ‘사상계’ 4월호에 <오적>을 발표함으로써 큰 관심을 모았다. “시(詩)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 내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전에 끌려가 / 볼기를 맞은 지도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 / 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목댕이 오물오물 수물수물 / 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으니, 에라 모르겄다”로 시작하는, 특권층의 권력형 비리와 부패상을 판소리 가락으로 비판한 <오적>은 그의 시적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준 작품이었다. < 오적>이 1970년 6월1일 신민당 기관지인 ‘민주전선’에 다시 게재되자, 경찰이 신민당사를 수색해 ‘민주전선’ 10만부를 압수함으로써 <오적>은 필화사건을 넘어 정치적 사건으로 커졌다. 또 6월26일 일본 ‘슈칸아사히(週刊朝日)’에 소개돼 김지하라는 이름은 일본에서도 상당한 관심을 모았다. 이 해에 그는 ‘시인’ 6·7월호에 시인 김수영이 구사한 풍자의 의의와 한계를 밝히는 평론 ‘풍자냐 자살이냐’를 발표하기도 했다. 1970년 <오적>으로 구속된 이후 그는 1974년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1980년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1980년대 이후 그는 민중시인·민주투사에서 생명사상가로 전환했다. 1991년 5월 조선일보에 기고한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로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2012년 12월 대선에선 박근혜 후보를 지지해 역사의 아이러니를 생각하게 했다. |
<2015-07-07> 경향신문
☞기사원문: [광복 70주년 특별기획 – 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14) 민족적 민주주의 논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