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상의 역사산책 105] 전쟁 터지자 정신없이 피난 떠난 국가지도자의 행로
▲ 이승만 대통령 부부. 금슬은 좋았지만 말년에 조국에서 쫒겨나 쓸쓸한 노년을 보낸다. |
1950년 6월 27일 밤 7시 30분경, 6.25전쟁이 터지고 이틀 후에 정신없이 남쪽으로 도주한 이승만 대통령이 대전에 나타났다. 충남도지사 관사에 자리잡은 이승만은 난데없이 방송국 관계자를 찾았다. 서울에 버려둔 시민들에게 특별방송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KBS대전방송국 유병헌 방송과장의 회고를 들어보자.
“갑자기 초대형 고급 승용차가 대전방송국 정문으로 들어왔다. 나가 보니 키와 몸집이 큰 사람이 ‘나는 이승만 대통령 각하의 지시를 받고 온 김장흥이요’ 하고 악수를 청하였다. 나는 그와 함께 차에 올랐다. ‘무슨 일로 어디까지 가는 것입니까?’ 하고 물으니 아무 대답이 없었다. 차는 얼마 후 충청남도 지사 관사 앞에 멈추었다. 김장흥을 따라 하차하니 이영진 충남지사가 현관에 서 있었다. 나는 곧바로 응접실로 안내되었는데 방에 들어가니 이대통령과 부인이 선채로 귀속말을 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크고 두툼한 손으로 나에게 악수를 해 주었다. 잠시 후 대통령은 김장흥에게 출입문을 잠그라는 지시를 했다. 문을 잠근 김장흥은 권총을 손에 꺼내 쥐고 나를 좌시하고 있었다. 이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지시를 직접 나에게 내렸다.
1. 이 방에서 절대로 나가서는 안된다.
2.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중계방송기를 이 방으로 가져오라.
3. 오늘 밤 9시에 내가 이 방에서 하는 방송을 서울로 올려 보내서 전국에 중계하여 전 국민이 듣도록 하라.
4. 누가 묻더라도 대전에서 방송한다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5. 대통령이 방송한다고 미리 누설해서도 안 된다는 것 등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우선 전화를 대전방송국에 걸어 중계방송에 필요한 방송기기를 보내도록 지시했다. 잠시 후 대전방송국에서 방송기기를 지게에 실어 보내왔다. 8시 40분에는 서울중앙방송국 조종실까지 중계선로가 개통이 되었다. 9시 정각이 되어 이 대통령이 마이크 앞에 앉았다. 방송 원고 조차 없는 생방송으로 첫마디가, “동포여러분”으로 시작되어 아군이 정부를 탈환했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서울시민은 안심하라는 요지였다. 방송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 이튿날 6월 28일 새벽에 서울이 괴뢰군의 손아귀에 넘어가는 형편이었는데, 그 방송을 수차례 방송을 했으니… 대전에서 이 대통령이 행한 특별방송은 성과를 거두기는 커녕 오히려 큰 역효과를 내고 말았다.”
이 방송이 그 유명한 ‘이승만 대통령의 6.27 특별방송’이다. 전쟁이 터지자 정부와 국회는 물론 서울시민을 버리고 도망간 대통령이 대구까지 갔다가 ‘너무 멀리 왔다’는 지적을 받고 다시 대전에 돌아와 처음 실시한 조치다. 이 방송은 밤 10시부터 11시까지 서너 차례 방송되었다.
이 방송을 들은 서울시민들은 안심이 되어 피난을 포기하고 서울에 주저앉았다. 이들을 기다린 것은 다음날 새벽 한강 인도교 폭파소리와 서울 시내로 쏟아져 들어오는 인민군 탱크와 보병들, 3개월에 걸친 적 치하의 고통스런 세월과 9.28 서울 수복 이후의 서슬푸른 부역자 조사였다.
어떻게 해서 한 나라의 최고 책임자가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6.25전쟁이 터진 후 이승만 대통령의 행적을 추적해보자.
▲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쏟아져 내려오는 인민군. |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인민군이 38선을 넘어 남한을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국군은 맥없이 무너져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날 밤 9시경 이승만 대통령은 존 무초 주한미대사를 경무대로 불렀다. 두 사람간의 대화가 재미있다. 무초 대사의 회고를 들어보자.
“이승만 대통령은 내가 공산군 손에 들어가게 되면 한국이라는 나라가 곤란하게 되고 방어능력이 이러하다 보니 내가 서울을 빠져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한국군이 이런 불의의 기습을 받고도 잘 싸우고 있다고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단 하나의 부대도 공산군에 항복하지 않고 있지 않냐고 되물었다. 나는 ‘만일에 대통령이 피신하고 그 사실이 밖에 알려지면 한국군 병사들은 한 명도 북쪽을 향해 싸우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군 전체가 전쟁을 포기할 것입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래도 이 대통령은 피난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나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알아서 하십시오. 나는 머물러 있겠습니다.’ 이러한 강경한 태도에 대통령도 서울에 머물러 있기로 작심했다. 최소한 그날 밤이라도…”
언쟁을 끝낸 두 사람은 각기 바쁘게 움직였다. 무초는 미국인을 철수시키고, 이승만은 도망갈 길을 찾았다.
▲ 인민군 탱크부대가 오토바이부대를 따라 서울로 진입하고 있다. |
대사관으로 돌아가는 무초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승만이 서둘러 피난가겠다고 한다. 그러면 한국에 머물러 있는 우리 미국인들을 어떻게 할까? 무조건 일본으로 피신시키자.”
미국은 이미 1년 전에 대사관이 중심이 되어 모든 미국인들을 일본으로 피신시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이 안에는 남녀, 아이들 할 것 없이 모든 비전투 미국인과 영국인, 프랑스인, 유엔한국위원단 임원과 중화민국대사관원이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비상연락을 받고 인천항에 집결해 배를 타고 일본으로 떠났다. 이렇게 해서 인민군이 서울에 들어오는 6월 28일까지 한 명의 실종자를 제외한 2,500명에 달하는 주한 미국인 전원이 안전하게 일본으로 대피했다.
이승만은 무초와 정반대로 행동했다. 주한 미국인들이 인천으로 모이고 있는 6월 27일 새벽에 이승만 부부는 경무대 경찰서장 김장흥을 포함한 4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서울을 빠져 나갔다. 국무위원은 물론 국회, 군 지휘관, 미국대사관 등 어디에도 탈출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서울역에 도착한 이승만은 파나마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아무도 몰라봤다고 한다.
새벽 4시에 출발한 기차는 대구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대전으로 되돌아갔다. 이미 대전에는 이승만이 도주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시민들을 버리고 탈출한 3부 요인과 고위관료들이 상당수 도착했다. 이들 가운데 누구도 서울시민의 보호계획을 세운 이도 없었고, 은행권도 그대로 두고, 정부의 중요 문서도 그대로 둔 채 자신과 가족들만 데리고 왔다.
◇이승만, 또다시 대전시민을 버리고 비밀리에 부산으로 탈출하다
▲ 임시수도 부산으로 피난간 이승만 부부가 거처하던 경남도지사 관사 |
대전에 머물던 이승만은 여기서 또다시 기이한 행각을 벌인다. 이승만은 7월 1일 새벽 3시 3명의 수행원만 데리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대전을 빠져나갔다. 아직 대전이 안전할 때였다. 인민군은 이승만이 대전을 떠난 지 20일이 지나서야 대전을 점령했다. 서울을 빠져나갈 때처럼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탈출했다.
부산을 향해 출발했는데 가는 코스가 불가사의했다. 대전-대구-부산으로 가지 않고 전라북도의 이리까지 승용차로 이동한 뒤 거기서 기차를 타고 목포로 갔다. 비밀리에 떠났기 때문에 이리역에 기차가 있을 리가 없었다. 대통령 일행은 역에서 8시간이나 기다리다 겨우 3등 객차를 두 칸 단 기관차를 구해 출발할 수 있었다.
오후 2시에 목포에 도착했으나 또다시 배를 구할 수 없어 2시간 기다리다 겨우 작은 소해정을 타고 부산으로 출발했다. 5백 톤급의 작은 소해정 제514함에 올라 19시간의 항해 끝에 부산에 도착했다. 다들 배멀미 때문에 구토를 하는 등 고통을 겪었다.
이승만이 도주하자 전쟁지휘부는 4개로 쪼개졌다. △수원의 야전사령부 △대전의 정부 △부산의 이승만 △도쿄의 맥아더 사령관으로 나뉘어진 것이다. 이승만이 이렇게 정처없이 돌아다니는 동안 대한민국의 통치권은 사실상 공백상태를 맞게 되었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피난길이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뛰어난 역사서인 <한국 1950 전쟁과 평화>에서 이승만의 행태를 이렇게 비판했다.
“6월 25일 전쟁 시작 이후, 특히 6월 27일 서울 탈출 이후 부산을 거쳐 7월 9일 대구로 이동하기까지 서울-대구-대전-수원-대전, 그리고 다시 대전-이리-목포-부산-대구에 이르는 15일 동안의 이승만의 행적은 한마디로 의문투성이였다. 단순히 우왕좌왕이라고 부르기에는 국가원수로서 너무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누란의 위기에서 이승만은 두 번의 통치 공백, 사실상의 통수권 유고사태를 빚었던 것이다. 처음엔 대구로 혼자 도망갔다가 대전에 도착할 때까지 열차에 머문 시간이 12시간 30분이었고, 두 번째는 훨씬 더 길어서 대전-부산 간 이동에 소요된 시간은 32시간이었다. 이 시간 동안 그는 아무런 군대통수 기능을 행사할 수 없었고, 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의 입만을 바라보던 각료들이 황망히 그의 행적을 추적하는 동안 정부로서는 아무런 정상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었다.”
◇‘이승만 정부의 일본 망명설’은 사실인가?
▲ 1951년 3월 15일 신성모 국방부장관(왼쪽에서 두 번째 털모자를 쓴 인물)이 서울 탈환을 위해 작전을 수행한 국군 1사단 장교들과 악수하고 있다. |
최근 일부 언론에서 “이승만 정부가 6.25전쟁 직후인 6월 27일 일본 정부에 망명을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과연 그럴까?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이승만이나 정부각료는 이날 서울을 탈출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저 인민군을 피해 남으로 남으로 달리던 시점이었다. 망명정부설이 나왔다면 아마 그 시점은 낙동강 전투에서 유엔군이 위기에 처한 8월 중순 경으로 추정된다.
당시 대구 북쪽에서 인민군 2개 사단이 낙동강을 건너 방어선 북서쪽을 무너트렸다. 심한 압박을 받은 한국군 1사단과 6사단은 미 1기병사단 뒤까지 후퇴했다. 할 수 없이 워커 장군은 8군 사령부를 대구에서 부산으로 옮길 수 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이 위기 상황에서 ‘정부를 일본으로 옮기자’고 주장을 했던 인물은 최악의 국방부장관으로 평가받고 있는 신성모로 추정된다.
무초 미국 대사가 1950년 6월 27일에 국무부에 타전한 전문을 읽어보자.
“신성모가 아침 7시에 나를 찾아와 대통령은 새벽 3시에 진해를 향해, 그리고 내각은 아침 7시에 남쪽 지방을 향해 특별열차를 타고 떠났다는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과 내각을 일본으로 보내 망명정부를 세울 수 있는지 여부를 내게 타진했다. 이에 대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국 정부는 낙동강 전선이 위험해졌을 때 일본이 아니라 제주도로 한국정부를 옮기는 방안을 검토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상황이 호전되자 없었던 일로 백지화했다.
이승만이 일본 망명을 극력 반대했다는 것은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일기에 나온다.
“무초 대사는 ‘대구가 적군의 공격권 안에 들어갔다’며 ‘정부를 제주도로 옮길 것’을 건의했다. 그의 주장은 ‘제주도가 적의 공격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최악의 경우 남한 육지의 전부가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갈 경우 망명정부를 지속시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무초가 한참 열을 올려 얘기하고 있을 때 대통령이 슬그머니 허리춤에서 모젤 권총을 꺼내들었다. 대통령은 권총을 아래 위로 흔들면서 ‘공산당이 내 앞까지 오면 이 총으로 내 처를 쏘고 적을 죽인 다음 나머지 한 알로 나를 쏠 것이오. 우리는 정부를 한반도 밖으로 옮길 생각이 없소. 모두 총궐기하여 싸울 것이오. 결코 도망가지 않겠소’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전쟁이 터지자 제일 먼저 도주한 ‘피난민 1호’와는 다른 모습이다. 그만큼 그는 미국의 힘을 믿었다. 세계 최강 미국이 한반도를 포기할 리 없다고 철저히 믿었다. 그만큼 미국을 아는 사람은 한반도에 없었다. 더구나 반일의식 만큼은 이승만은 철저했다. 몇 가지 사례를 보자.
미국이 유엔군에 일본군을 참가시키자고 요구하자 “일본군이 상륙하면 총부리를 북한군이 아니라 일본군에게 돌리겠다”고 말했다.
한일회담이 열릴 때마다 그는 대표단에게 똑같은 훈령을 내렸다. “우리 당대에 한일협정 체결은 불가능하다. 절대로 양보하지 말라.”
일본에서 축구 한일전이 벌어지면 축구팀에 엄명을 내렸다. “일본에게 지면 모두 현해탄에 빠져 죽어라.”
반일 제스추어는 이승만의 정치적 자산이었다. 이런 말이 나올 때마다 이승만의 인기는 올라갔다. 이런 인물이 일제 36년간 같은 민족을 핍박했던 친일파를 자기 슬하로 불러 중용한 것은 정말 역사적 수수께끼이다.
※[참고문헌] <한국 1950 전쟁과 평화> 박명림 연세대 교수 저 (나남 간)
<전쟁과 사회>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저 (돌베개 간)
<한국전쟁 비화> Joseph C. Goulden 저 (청문각 간)
<2015-07-09> 노컷뉴스
☞기사원문: 이승만 일본 망명?… “도망다니느라 정신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