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무영친일행적비추진위 “군포에 있는 <이무영작품비>, 부끄럽다”
▲ 군포 능안공원에 있는 <이무영 작품비>. 1999뇬 12월, 군포시는 친일작가 이무영을 기리기 위해 작품비를 건립했다. ⓒ 유혜준 |
군포시가 건립한 <이무영 작품비>가 논란이 되고 있다. 군포시는 지난 1999년 12월, 능안공원에 친일 소설가 이무영을 기리기 위해 <이무영작품비>를 건립했다. 당시 군포시장은 김윤주 시장이었다.
군포시가 <이무영작품비>를 건립한 것은 그가 1939년부터 1950년까지 군포에서 거주하면서 작품 활동을 해왔기 때문이다. 이무영은 1935년, 군포를 배경으로 한 <군포장 깍두기>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무영이 일제강점기에 문학 활동을 통해 적극적으로 친일 행위를 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문제가 되고 있다. 이무영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지난 2009년에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면서 그의 적나라한 친일행적이 공개됐다.
이무영은 이광수나 최남선처럼 민족진영 작가였지만 일제의 협박과 회유에 굴복해서 친일로 변절한 것이 아니라 성장과정부터 ‘철저한 친일’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꾸준한 문학 활동을 통해 일본의 식민정책을 선전하면서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특히 이무영은 조선에서 최초로 일본어로 쓴 소설 <청기와집>을 발표, 조선예술상 총독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일제강점기 그의 문학 활동을 짚어보면 그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일제에 협조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런데도 그는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기 전까지 추앙받는 농민문학가였다.
때문에 이무영의 출생지인 음성군은 오랫동안 다양하게 이무영 기념사업을 지원해왔다. 하지만 음성 지역 시민사회단체가 그의 친일 행적을 이유로 지원 중단을 요청하자 2012년부터 예산지원을 중단한 바 있다. 또한 그의 이름을 붙였던 도로 이름도 바꿨다.
하지만 군포에서는 <이무영작품비>가 건립된 이후 이무영의 친일 행적에 대한 어떠한 논란도 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문제 제기조차 없었다. 이번에 능안공원의 <이무영작품비>가 논란이 된 것 역시 군포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문제제기 때문이었다.
“문학비 옆에 친일행적비 세워야”
▲ <이무영 작품비> 뒷면 ⓒ 유혜준 |
의왕지역 시민단체 관계자가 우연히 능안공원에 들렀다가 <이무영작품비>를 발견하고 민족문제연구소에 제보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무영작품비>와 관련, 군포 사람들이 해결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입장이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군포 지역의 일부 뜻있는 사람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여 ‘친일작가 이무영 친일행적비설치시민추진위원회(아래 이무영친일행적비추진위)’를 구성했다. 이무영친일행적비추진위는 <이무영작품비>를 현재의 자리에 그대로 두고 그 옆에 이무영의 친일 행적을 낱낱이 알리는 ‘친일행적비’ 건립을 추진하기로 했다.
정인환 이무영친일행적비추진위 대표는 “대표적인 친일 작가 이무영을 기리는 문학비가 군포시에 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이무영의 친일 행적을 올바르고 정확하게 알리기 위해서 문학비를 그대로 놔두고 그 곁에 친일행적비를 세워야 한다”라고 설명했다.
정 대표는 “이무영의 친일 행적이 낱낱이 밝혀졌는데도 군포시가 이를 방치하고 있는 것은 문제가 있다”라며 “올바른 역사의식을 정립하기 위해서라도 군포시에서 적극적으로 친일행적비 건립에 나서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특히 정 대표는 “군포시에서 <이무영작품비>를 세웠으니, 군포시가 속죄차원에서 친일행적비도 세워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이무영작품비>와 관련, 당시 군포시 문화체육과에 근무했던 관계자는 “<이무영작품비>는 김윤주 시장의 지시로 건립된 것이 아니라 이무영을 기리기 위해 문학비를 건립해야 한다는 지역신문의 주장을 시에서 받아들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군포시는 2009년, 이무영의 친일 행적이 논란이 된 뒤에도 군포시민과 함께하는 ‘길 위의 인문학’ 행사를 통해 이무영의 작품 <군포장 깍두기>의 배경이 된 지역과 능안공원의 <이무영작품비> 등을 찾아 이무영을 기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2015-07-10> 오마이뉴스
☞ 기사원문: “군포시, 친일작가 이무영 친일행적비 건립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