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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검열은 ‘먼 곳에의 그리움’을 부추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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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서울 장충단공원에 차려진 길거리 서점에서 어린이들이 바닥에 주저앉아 만화책을 읽고 있다. 모든 것이 부족한 시대, 사람들은 더 강렬하게 읽을 것을 원했다. 사진작가 한영수 작품집 <꿈결 같은 시절>에서


[광복 70년, 책읽기 70년] ⑥ 독재정권시대 번역서 열기 

■ 1960년대 중후반의 독서문화
 

1964~65년은 한-일 국교 정상화 문제로 정치적으로 무척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박정희 정권이 졸속적인 한-일 회담을 추진하자 학생·시민이 대규모 저항에 나섰다. 지금껏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는 독도나 위안부 문제 등에 관한 빌미가 대부분 이때 생겼다. 

그러나 경제영역에서는 좀 달랐다. 경제개발 정책이 효력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 파급 효과는 출판계에도 닥쳤다. <출판연감> 1966년본은 “1965년은 한국 출판사상 최고”였다고 평가한다. 한 해 발간된 책의 종수로 보면 그해의 실적은 해방기보다 9배, 그리고 전년에 비해 무려 2배로 신장했다. <출판연감>의 편자는 “해방 후 20년 동안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꾸준히 노력한 보람이 있어, 기획에서 장정, 그리고 제책에 이르기까지 장족의 발전”이 성취됐다고 환호했다. 

거시적으로는 경제성장과 인구팽창, 독자층의 성장이 모두 함께 가던 한국 출판자본주의의 호시절이 본격화된 초입이었다. <주간한국>(1964) <창작과 비평>(1966) <선데이서울>(1968) 같은 새로운 형태의 잡지가 성공하고, 삼성이 중앙일보사를 만들어 출판 시장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성장하던 독자층의 요구는 단지 국산 출판물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애초부터 한국 현대문학과 독서문화는 항상 태평양 연안이나 유라시아 대륙의 출판 강국에서 나온 책들을 번역하거나 번안하거나, 또는 때로 몰래 수입하거나 베끼거나 해서 이뤄져왔다. 표절과 모방, 검열은 일종의 상수였다. 

■ 번역서와 법 

1980년대 초에 서울 시내 미국문화원, 영국문화원, 일본문화원의 도서열람실은 <타임> <뉴스위크> <문예춘추>(文藝春秋) <중앙공론>(中央公論) 같은 시사잡지들을 보려는 대학생들로 붐볐다 한다. 이들 잡지는 국내 서점에도 나와 있었지만, 서점에서 팔리는 건 표지만 멀쩡할 뿐 검열당국에 의해 몇 페이지씩 찢어져 없어지거나 군데군데 먹칠을 당해 있기 일쑤였다. 대학생들은 국내 언론에선 ‘실종된’ 한국의 진실을 찾기 위해 훼손되지 않은 잡지를 볼 수 있는 외국 문화원을 찾았던 것이다. 특히 그들이 보기 원했던 것은 광주항쟁의 진실이나 12·12 등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무작스런 칼질은 전두환 군부가 처음이 아니었다. 전두환 군부는 청산되지 못한 박정희 체제의 찌꺼기로서 유신의 언론·출판 정책을 흉내 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유신의 언론·출판정책 또한 일제강점기 이래의 검열체제를 창조적(?)으로 모방·계승한 것이었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외국 책들과 맺어온 ‘공식적’ ‘법적’ 관계는 간행물 일반에 관한 법률과 ‘외국 간행물 수입 배포에 관한 법률’에 의해 양쪽으로 규정되어 왔다. 이 법들은 대한제국기의 신문지법·출판법과 해방기의 미군정령 88호를 ‘조상’으로 두고 박정희 정권이 쿠데타 이후 새로 시행(1961.12.30)한 법을 모법으로 했다. 2002년에 폐지되기 전까지 두 법은 ‘국헌’과 ‘풍기’를 위협하는 수없이 많은 외국 서적과 잡지에 대한 방파제가 되어 ‘냉전의 문화풍경’을 빚어냈다. 대부분의 대한민국 사람들은 거대한 ‘불온’사상과 표현의 자유의 물결이 마치 없는 척 청맹과니처럼 살았던 것이다. 

너덜너덜 가위질한 외국잡지

외국문화원에 몰린 대학생들은

원문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일찍 생을 마감해 소녀로 남은

전혜린은 전설이 되고

반짝이는 에세이집은 불티났다 

카뮈의 이방인을 밤새 읽은

문학소녀가 자살충동을 느낀 것도

먼 곳에서 허기를 채웠던

그 시절 우리의 풍경이었다

■ 전설의 전혜린 

그처럼 냉전시대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나라의 하나였기에, 오히려 ‘먼 곳에의 그리움’은 더 컸다. 이국에 대한 낭만적·문학적 동경을 상징하는 ‘먼 곳에의 그리움’(Fernweh)은 전혜린이 남긴 수필의 제목이다. 1965년 32살의 나이로 자살한 전혜린은 평균에서 가장 멀리 벗어나 있는 삶을 산 예외적인 여성의 하나였다. 1934년생인 그녀는 일제에 의해 이식된 근대문화와 식민지 최상층 엘리트가 가진 돈과 문화자본에 의해 길러졌다. 그녀의 예외성과 천재성의 사회적·가정적 토대는 친일 관료이자 수재로 유명했던 아버지 전봉덕에게 있었다. 전혜린은 서울대 법학과를 다니고 독일 유학을 갔다 와서 전공을 문학으로 바꿨고, 죽음 당시엔 성균관대 교수로서 활발한 문필활동을 하고 있었다.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표지.


그녀는 다른 ‘천재’들과 비슷하게 요절함으로써 ‘전설’이 되었고 1980년대 이전까지 모든 한국 문학소녀(가끔 문학청년도)의 우상이자 아이콘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녀의 독자들이 남아 있다. 때로는 여전히 ‘소녀’인 채로. 전혜린은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966)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1968) 같은 전설적인 에세이만 남긴 게 아니라 헤르만 헤세, 루이제 린저 등 독일과 프랑스 문학의 번역·소개자로서 큰 영향을 끼쳤다. 그녀가 번역한 <데미안>과 <생의 한가운데> 등은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서구적인 교양과 실존 정신의 정화로서 광범위한 청소년과 독서계층에 의해 읽혔다. 전혜린은 당시의 대한민국에선 불가능했던 개인주의나 여성주의적 해방의 어떤 아련한 표징이기도 했다. 

■ 카뮈팬 자살 사건 

사실 불문학·독문학은 실존주의 철학과 함께 그전부터 강렬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혁명’이 무르익던 1960년 여름, 서울 경기여고 2학년에 다니던 두 여고생의 동반자살 사건이 세상에 충격을 주었다. 언론은 자살 동기를 엉뚱하게도 프랑스 문학가 알베르 카뮈에게서 찾아냈다. 자살한 최정숙양이 카뮈에 심취했던 감성이 풍부한 문학소녀였다는 것이다. 4·19 때는 부상당한 학생들이 누워 있던 서울대학병원에 2개월 동안 찾아다니며 하이네 시집을 읽어주기도 했다 한다. 똑똑하고 정열적인 소녀는 ‘그러나 집에만 오면 말을 잃은 채 까뮈의 <이방인>을 밤을 새워 읽으며 마음에 드는 구절은 몇 번이고 되뇌었고’ 그녀의 유품 중 ‘사르트르의 책에 여기저기 줄이 그어져 있었다’ 한다. 하이네·사르트르·카뮈의 세계와 서울의 삶은 격차가 컸던 모양인지, 그녀는 ‘죽음의 행복’, ‘죽음의 즐거움’이란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다 한다. 함께 죽음을 결행한 최미자양 역시 ‘문학소녀’였다. 최양은 내성적이어서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책 읽는 것을 좋아했고, 역시 외국 소설과 카뮈의 <이방인>에 심취했었다 한다. 성적이 좋은 문학소녀였다는 점 외에 두 여고생은 두 집 살림을 하는 아버지 때문에 가정불화를 겪고 있다는 점에서도 같았다 한다. 최정숙양은 극약을 먹고 자살하기 전날 일기는 모두 소각하고 다른 동급생에게 ‘죽으면 하얀 옷에 봉선화를 가슴에 꽂아다오’라는 말을 남겼다. 

사건 이후 카뮈가 논란거리가 되었다. <이방인>과 실존사상이란 뭐관대 어린 여학생들이 동반자살을 기도하게 했는가? 그 정도로 위험한 것인가? 문교부 편수관 홍웅선은 여학생들이 카뮈 같은 책을 ‘올바르게’ 이해했다면 자살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라 주장했다. 고등학교에서 책을 마구 사들이니까 ‘카뮈나 사르트르 같은 것이 섞이지 않겠느냐, 교사들이 먼저 그런 책을 제대로 읽고 학생들의 독서를 잘 지도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당연히 이런 관료적 발상에 대해 논란이 일었다. 당시 카뮈나 사르트르는 세계적으로 엄청난 영향력이 있는 작가들이었고, 기성세대나 관료에게 실존철학은 불온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었던 것이다. 

‘먼 곳’의 문학과 철학은 정신적 허기를 채우는 중요한 양식이었는데, 문제는 한국의 문화와 삶이 지나치게 가난했다는 점이겠다.


교복 차림의 고교생들이 길거리에서 양담배를 팔고 있다. 사진작가 한영수 작품집 <서울, 모던타임스>에서


■ 미국, 그리고 일본으로부터 

유럽으로부터의 영향에 비하면 미국과 일본은 좀더 복잡하고 덜 고상한 것이기도 했다. 이때에도 한국 출판인들은 미국과 일본의 베스트셀러 동향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장사가 될 만한 책을 수입하느라 바빴다. 

1960년대 중·후반에 미국에서 들어온 문학서로는 펄 벅, 샐린저 등의 소설과 이언 플레밍의 대중소설 007 시리즈가 중요했다. 특히 영화 007 시리즈가 전세계적으로 히트를 치면서 열풍이 일자, 한국에서도 청소년과 남성을 중심으로 007 소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냉전 시절의 서방과 소련의 첩보전을 배경으로 한 이 소프트코어 포르노는 한창때 한국의 지방서점들까지 매점매석에 나서게끔 했다. 

해방 후에도 일본 문화와 문학은 언제나 모든 교양계층과 대중독자층에 영향을 미쳤다. 상당수의 한국 출판인과 작가 또한 일본산을 ‘참조’했다. 때로는 일본산 대형 베스트셀러가 독서시장을 뒤흔들어 놓았고, 몇몇 일본 본격문학 작가들은 작가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일본 문학·문화에 대한 중역과 은밀한 모방의 시대였다. ‘신경숙’은 태두도 혼자도 아니었던 것이다. 

흥미로운 모순은, 1960년대가 4·19, 5·16이 촉발한 민족주의의 시대이면서 동시에 일본 문화 및 문학 수입의 시대였다는 점이다. 미시마 유키오, 다자이 오사무 등의 소설이 포함된 <일본전후문제작품집> 같은 책이 ‘본격 문학’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이시자카 요지로의 <가정교사>, 미우라 아야코의 <빙점>, 고미카와 준페이의 <인간의 조건> 등 대중소설이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런 소설을 먼저 수입하느라 출판사들이 치열하게 경쟁했다. 마치 근래에도 무라카미 하루키와 몇몇 일본 작가를 한국 작가들이 모방하거나 출판사가 거액의 선인세를 주며 경쟁했듯 말이다. 

원조경제 시대를 졸업하려던 1960년대 한국의 문화적 신식민지성은 새로운 출판자본주의의 상황과 결합하고, 또 한편 엄청난 기세로 성장하던 일본 자본주의에 의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최근의 사태들은 한국 문화에서 검열이 (거의) 사라지고 웬만큼 자생적으로 성장하고 나서도 문화적·지적 식민지 상황이 극복하기 어려운 것임을 보여준다. 차라리 번역이라도 정당하게 대우해주는 것이 표절 같은 일을 막는 최소한의 일이다. 

천정환 성균관대 국문과 교수 

 <2015-07-09> 한겨레 

☞기사원문: 지독한 검열은 ‘먼 곳에의 그리움’을 부추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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