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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으로 본 현대사](40) 전두환 노태우 내란 등 사건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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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사형’ 받아야 할 국사범 전두환·노태우, 검찰 “반란죄 성립하지만…” 기소유예


■ ‘12·12사태’에 이은 집권 각본에 따라

이른바 ‘12·12’와 ‘5·18’ 사태는 전두환이 이 나라의 국권을 찬탈하려는 역모 범죄였던가? 본인은 물론 부인했다. 1989년의 세칭 ‘5공 청문회’에서 그는 “본인은 그 당시로서는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습니다”라고 잡아떼며, 12·12사태도 ‘대통령 시해사건 수사 도중에 발생한 우발적 사건’이었을 뿐이라고 했다. 1980년 초에는 “나는 정치에 소질도 없고, 취미도 없다”고 기자들에게 말한 적도 있다(이도성, <남산의 부장들>, 동아일보사, 1993). 이런 발언은 전에도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 같았고, 그 뒤의 일련의 거짓말 쇼도 선명한 기시감을 주는 한 편의 연속극이었다.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은 1979년 10·26 직후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어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 사건 수사를 지휘하면서 과도기의 실세로 급부상한다. 그 여세로 그는 직속상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총격전 끝에 체포 연행하는 ‘12·12사태’를 일으킨다. 이로써 군 내부의 실권을 장악한 다음, 현역 군인의 신분이면서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겸임해 이 나라 양대 정보수사기관을 한 손에 넣고 쥐락펴락한다. 다음으론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김대중 등 많은 민주인사들을 내란음모사건으로 연행(5·17) 구속한 데 이어 광주민중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수많은 시민들을 학살한다. 그는 또 통일주체국민회의(통대)에서 선출된(1979·12·6) 대통령 최규하 정부로 하여금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케 하고(1980·5·31) 자신은 그 상임위원장이 되어 사실상 국정의 전권을 독점한다. 대장으로 진급(8·5)하고 나서는 뉴욕타임스와의 회견에서 “한국은 군부의 지도력과 통제를 요구하고 있고, 새 세대의 지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으며, 이는 야망 아닌 천명에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8·11). 짜여진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대통령 최규하를 하야시킨 뒤 자신은 군복을 벗고(8·22)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통대’에서 (단일 후보로) 대통령에 ‘선출’되어(8·27) 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9·1).


l 일러스트 | 박건웅


■ 반년 사이에 두 번이나 대통령이 되다니


나아가 5공 헌법이 국민투표에서 투표율 95.5%, 찬성 91.6%로 의결되고(10·22), 이에 따라 전두환은 대통령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에서 유효투표의 90.2%를 얻어 12대 대통령으로 ‘당선’됨으로써(1981·2·25) 불과 반년 사이에 두 번이나 대통령에 ‘당선’되는 진기록도 세웠다. 5공 헌법의 시행으로 10대 국회가 해산된 뒤에는 국보위를 개칭한 국가보위입법회의로 하여금 국회의 기능을 대행케 했다(10·27). 이 ‘입법회의’는 국민의 대의기관이 아니라 대통령 전두환이 임명한 81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었는데, 1981년 4월10일까지 국회의 권한을 대행하면서 정당법, 정치자금보호법, 언론기본법, 국가보안법 등 189건의 법률안을 처리했다. 전두환의 이런 집권 수순은 박정희의 5·16에서 본받은 흔적이 역력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를 흉내낸 듯한 국가보위입법회의를 만들었고, 초법적인 조치로 집권기반을 마련한 점에서도 그러했다. 전두환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조작, 언론기관의 강제 통폐합, ‘삼청교육’, 10·27 법난(군 병력의 사찰 난입, 승려 150여명 연행)으로 악명을 샀다. 대통령의 7년 단임을 내세우고 막을 연 5공 치하에서는 유신통치의 학습효과에서 터득한 것 같은 지능적인 통제와 탄압이 전개되었다. 이에 1986년 들어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포함한 민주화운동의 봉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 대통령의 선거인단 간선제를 유지하려는‘4·13 호헌조치’ 등에 분개해 전국적으로 대규모 시위(6월 민중항쟁)가 계속되었다.


■ ‘6·29선언’과 6공의 출현


전두환은 한때 굴복의 모양새를 보이며 자신이 민정당 대통령 후보 자리를 물려준 노태우로 하여금 이른바 ‘6·29선언’이라는 시국 수습 방안을 발표케 했다. 그 내용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 복권, 시국사범 대폭 석방, 언론기본법 개폐, 인권 제도의 개선 등 매우 전향적인 것이었다. 이에 따라 대통령의 직선과 5년 단임을 핵심으로 하는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하고(1987·10·12), 국민투표(10·27)를 거쳐 공포되었다. 그러나 직선제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12·16)에서는 야권 후보(김영삼, 김대중)의 단일화 실패 등으로 민정당 노태우 정권(6공)이 출현했다(1988·2). 그런데 다음해 봄에 치러진 국회의원 총선(4·26)에서 여소야대 국회가 출현함으로써 ‘5·18 광주특위’ ‘5공 비리 조사특위’, 언론 통폐합 진상규명 등의 활동이 진전되었으나, 노태우의 민정당, 김영삼의 민주당, 김종필의 공화당이 이른바 ‘3당 합당’을 통해 거대 여당인 민자당을 출현시킴으로써 5공 청산작업의 정치적 동력이 쇠잔해지고 말았다.


노태우의 6공 정권은 ‘민족 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7선언)과 대공산권 수교 등에서는 전향적인 면을 보였으나. 문익환 목사, 황석영 작가, 임수경양의 방북 등에는 엄중 처벌로 임하는 등 이중성을 보였으며, 이런 민간 차원의 통일운동을 공안정국 조성의 구실로 역이용하는 계책도 드러냈다. 그뿐만 아니라 노동운동, 농민운동, 학생운동, 교원노조 활동 등에 대해서는 군사정권의 본색을 여실이 실증하는 탄압 일변도의 압제를 서슴지 않았다.


■ ‘문민정부’의 검찰, 반란죄에 ‘기소유예’


5공 7년과 6공 5년이 끝나고 민자당의 김영삼 정권이 등장했다(1993·2). ‘문민정부’를 자처한 김영삼 정권은 군내의 사조직인 하나회의 제거를 비롯한 숙군작업, 공직자 재산등록제, 금융실명제 등 개혁을 추진했다. 이만큼이라도 세상이 달라지자 지난날 전두환·노태우 등 군부의 무력에 의한 헌법 파괴행위에 대한 책임문제가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먼저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 장태완 당시 수도경비사령관 등 예비역 장성 22명이 ‘12·12사태’를 문제 삼아 전두환·노태우 등 34명을 상대로 고소를 제기했고, 그 밖에도 9건의 고소장이 접수되었다. 이 사건 수사는 서울지방검찰청 공안제1부에서 담당했는데, 그해 10월29일 피고소인 전원에 대해 혐의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기소유예’라는 불기소 처분을 했다. 이른바 ‘신군부’의 당시 행위는 군형법상의 반란죄가 성립하지만, 대통령 등으로서의 공헌을 참작해 기소유예 처분을 하고, 내란죄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요지였다. 검찰의 불기소 이유 중에는 “피의자들을 기소하는 경우, 재판과정에서 과거사가 반복 거론되고 법적 논쟁이 계속되어 국론 분열과 대립양상을 재연함으로써 불필요하게 국력을 소모할 우려가 있다”는 희한한 대목도 있었다. 이에 대해 ‘법정형이 사형인 초중량급 국사범에게 기소유예를 한다는 것은 난센스다. 이들의 행위는 분명 반란죄를 넘어서는 내란에 해당된다’는 비판이 나왔다(박원순, 1994·10·31, 중앙일보). 언론에서도 ‘단죄 없는 유죄’는 정치적 판단이라고 비판했다(1994·10·30, 경향신문). 또한 정승화 등 고소인들은 그러한 검찰의 결정에 즉시 항고했고, 이것이 서울고검에서 기각된 뒤 대검찰청에 낸 재항고 또한 기각되자(11·19),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냈다. 고소·고발인들은 홍성우 변호사 등 변호인단이 낸 청구서를 통해 “검찰은 국헌문란의 목적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내란죄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이는 12·12가 그 이후 정권을 장악할 때까지 일련의 사태와 독립해 평가될 수 없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검찰이 국론 분열 등을 이유로 기소유예를 한 것은 검사의 독단적인 정치적 견해에 따른 것으로 위법”이라고 지적했다. 한편으론, 헌법재판소의 결정과 재수사 등이 늦어질 경우 공소시효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을 우려해 공소시효를 연장하는 특별법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대두되었다.


■ ‘5·18 내란’도 사법심사 대상 아니라고


5·18 광주 학살사건에 대해서는 1994년 5월13일 5·18 광주민중항쟁연합을 필두로 1995년 4월3일까지 전두환·노태우를 포함한 피고소·피고발인 58명에 대해 총 70건의 고소·고발이 들어왔다. 이 사건 수사는 서울지방검찰청과 국방부 검찰부가 함께 전담수사반을 편성해 진행했다. 그리고 A4 200면이 훨씬 넘는 방대한 ‘5·18 관련사건 수사 결과’를 통해 검찰의 처분 내용을 공개했다. 그런데 여기에도 묘한 법이론이 등장해 세인의 의혹을 샀다. 즉 1)정치적 변혁과정에 있어 새로운 정권과 헌법질서를 창출하기에 이른 일련의 행위들이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 사법부에서 판단된 사례가 없으나, 정치적 변혁의 주도세력이 새로운 정권 창출에 성공하여 국민의 정치적 심판을 받아 새로운 헌정질서를 수립해 나간 경우에는 피의자들이 정권 창출과정에서 취한 일련의 조치나 행위는 사법심사가 배제된다고 보는 것이 상당하다. 2)국가보위입법회의의 입법활동은 권력분립의 견지에서 사법적 판단이 오히려 합리적이지 못한 전형적인 통치행위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 할 것이므로 역시 사법심사가 배제된다. 그리고 전체적 결론으로, ‘따라서 이 사건 관련자들에 대하여는 그들의 행위나 조치가 구체적으로 내란죄 등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판단하지 않고, 형식 판단 우선의 법리에 따라 전원 공소권 없음 결정을 하였음’이라고 매듭지었다(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 검찰부, ‘5·18 관련사건 수사결과’, 1995·7·18). 요컨대 검찰은 피고소인들이 1980년 저지른 행위(5·18사태)는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며 불기소 처분을 한 것이다. 이처럼 문민정부의 검찰은 12·12와 5·18의 피고소인들에 대해 기소유예 및 통치행위론 등을 이유로 처벌의 길을 막음으로써 국민들의 실망과 분노를 샀다.

헌재의 결정도 크게 기대할 만한 것이 못 되어 맥이 빠져갈 때 뜻하지 않은 변수가 생겼다. 민주당 소속 박계동 의원이 국회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이 4000억원의 비자금을 감추어두고 있다고 폭로했고(1995·10·19),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문제의 12·12와 5·18 사건의 재수사에 발동이 걸리게 되었다.

<2015-07-12> 경향신문

☞기사원문: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40) 전두환 노태우 내란 등 사건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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