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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광복 70주년에 돌아보는 몽양 여운형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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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17일은 몽양 여운형 선생 68주기다.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하고 해방에 대비했던 그가 막상 해방 2년 만에 암살을 당한 것은 그 개인은 물론 국가적으로도 큰 손실이었다. 혁명가치고 비운에 가지 않은 사람이 드물지만 몽양의 경우 해방된 조국에서 큰 뜻을 펴보지 못한 채 정쟁의 희생물이 되고, 아직까지도 업적이 부각되기보다 왜곡과 폄훼가 심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몽양은 일급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초 중국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을 만들어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고 김규식 부인과 자신의 측근을 국내에 들여보내 3·1혁명의 ‘지하수맥’ 역할을 했다. 그리고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산파역을 한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몽양은 3·1혁명 후 적도 도쿄에서 일본 조야를 상대로 ‘조선 독립의 이유’를 설파하고 육군성 장관의 겁박에 “삼군지장의 목은 쳐도 필부의 뜻을 빼앗을 수 없다”고 받아넘겼다. 그의 강연이 끝났을 때 참석자들이 “조선 독립 만세!”를 합창할 정도로 담대한 활동을 폈다. 일본 내각이 붕괴될 만큼 그의 일본행은 파격적이었다.


상하이로 귀환한 몽양은 일경에 체포돼 국내로 압송되고 서대문형무소 등에서 3년 옥고를 치렀다. 석방되어 조선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했으나, 베를린 올림픽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워버린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신문이 폐간됐다.


일제강점기 말에 예비검속으로 재수감되고, 옥중에서 비밀결사 건국동맹을 만들었다. 1945년 8월15일 총독부 정무총감 엔도의 제안을 받아들여 일제 항복 후 조선의 치안과 질서유지를 통괄하면서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발족시켰다. 몽양은 해방 이튿날 서대문형무소를 찾아 독립운동가들을 석방하고 건준을 통해 새 조국 건설에 진력한다.

총독부는 자신들의 보호를 목적으로 치안권을 맡겼다가 건준 조직 등을 보고 이를 회수했다. 그리고 미군 사령관 하지에게 몽양을 모략하는 거짓 정보를 전달했다. 하지는 부하들을 일본에까지 파견해 그의 친일행적을 샅샅이 뒤졌으나 허사였다.

한민당으로 집결한 친일파들은 미군정의 요직에 참여하면서 몽양을 음해하는 공작을 꾸몄다. 김구나 이승만은 국내에 조직이 없지만 몽양이 8월 말까지 남한에 145개 지부를 설치할 만큼 막강한 국민의 지지는 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한민당 계열은 당초 ‘임시정부 봉대’를 명분으로 건준 등의 참여를 거부했다. 막상 임시정부가 미국의 방침으로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고, 미국이 이승만을 옹위하자 ‘임시정부 봉대’를 저버리고 이승만과 손을 잡았다. 그리고 몽양을 배척했다.


몽양과 김규식은 해방 정국에서 미국과 소련을 설득해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목표였다. 미군정과 이승만의 단정수립 노선에 반대하면서 좌우합작과 남북협상론을 꾸준히 제기했다. 평양에서 김일성과 만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가 자신의 허가 없는 평양행을 질책하자 “집주인이 윗방으로 가든 아랫방으로 가든 객이 무슨 참견이냐”고 호통칠 만큼 기백이 있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와 민족문제연구소가 족벌신문 전 사주, 대학 설립자, 저명 문인 등을 친일행위자로 규정하면서 그 영향권의 언론·지식인들이 몽양을 친일파로 끌어들이는 ‘물귀신 작전’을 폈다. 그 이전에도 친일파 문제가 제기되면 어김없이 몽양을 끌어들였다. 최근 모 주간지가 몽양을 “공명심이 강하고 허장성세했으며… 이중적이고 기회주의적”이라는 등 사실과 거리가 먼 기사를 실었다.

나는 <몽양 여운형 평전>을 쓰면서 그의 생애를 꼼꼼히 살폈다. 그는 치열한 독립운동가로서 해방 정국에서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을 주도했다. 그것만이 분단을 막을 수 있는 방안이었다. 어디에서도 허장성세나 기회주의 따위는 찾을 수 없었다.


그의 중도노선은 친일파들이 변신한 분단세력의 타깃이 되고, 그는 10여차례의 테러 끝에 결국 생명을 잃었다. 암살의 배후는 그의 제거로 가장 많은 이득을 본 세력이다. 몽양은 타고난 호방한 성품, 신념의 주조가 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혈농어수(血濃於水)’의 신념으로 독립운동을 하고 통일조국을 기원했다. 공명심이 아니고 애국애족심에서였다. 그는 용량이 넓어서 이데올로기의 경계선을 넘나들었지만, 굳이 측량이 허용된다면 ‘진보적 민족주의자’이다. 내가 그의 평전에 쓴 결론이다.

김삼웅 | 전 독립기념관장 


<2015-07-16> 경향신문

☞기사원문: [기고]광복 70주년에 돌아보는 몽양 여운형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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