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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으로 본 현대사](41) 전두환 노태우 내란 등 사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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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통치행위”라던 검찰, 비자금 터지자 “전두환 사형·노태우 무기징역”

■ 노태우 비자금 폭로로 점화된 재수사

앞서 보았듯이 검찰이 ‘집권에 성공한 내란은 사법심사의 대상이 아니다’ ‘군사반란도 정상참작을 해야 한다’는 등의 이유로 12·12와 5·18 관련자들에 대하여 연달아 불기소처분을 하자 국민 각계에서 강력한 비판과 반발이 일어났다. 그런데도 김영삼 대통령은 할 수 없다는 듯이 ‘역사의 심판에 맡기자’고 했다. 그런 시점에서 박계동 의원의 ‘노태우 비자금’ 폭로는 정국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그의 발언은 매우 구체적이어서 신빙성이 높아보인 데다 ‘노태우의 비자금 4000억원’이 차명으로 분산 예치되어 있는 은행의 예금계좌 조회표까지 제시했다(<김대중 자서전 1>, 삼인, 2010). 소문으로 나돌던 ‘설’이 의정 단상에서 구체적 증거로 확인되자 세론은 들끓었고, 대검 중수부(부장 안강민 부장검사)는 바로 다음날 수사에 착수했다.

한편 전두환 비자금에 대해서도 서울지검에 특별수사반이 편성되었다. 그리고 그 전에 불기소처분을 결정했던 12·12와 5·18 사건에 대해서도 검찰은 특별수사본부(본부장 서울지검 3차장 이종찬)를 가동하여(11·30) 본격적인 재수사에 착수했다. 그 전에 불기소처분을 한 수사팀(공안부 검사들)은 배제된 새로운 인적 구성이었다.

l 일러스트 | 박건웅

■ 내란·반란으로 구속된 5·6공 두 대통령

검찰은 비자금(뇌물) 혐의로 노태우를 구속한(1995·11·16) 데 이어 합천에 내려간 전두환을 뒤쫓아가듯 밤중에 수사관을 보내 3일 새벽 6시 반경 구속영장을 집행, 안양교도소에 수감하였다. 그는 장시간에 걸친 검사의 조사에서 정승화 육참총장을 연행한 것은 10·26 사건 수사를 위해서였지, 내란을 기도하거나 군권을 장악하기 위한 목적은 아니었다고 자신에 대한 혐의를 부인했다.

이에 비하여 노태우는 군사 반란 혐의를 대체로 시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태우 비자금 사건은 노씨 등 3명이 구속, 기업인 등 12명이 불구속으로 기소되었고(12·5), 전두환 비자금 사건은 전씨와 사공일, 안무혁, 안현태, 성용욱 등 5명이 나중에 기소되었다(1996·1·12).

검찰은 12·12 사건에 관하여 전두환·노태우 등을 군형법상 반란수괴 등 혐의로 기소하였고(1995·12·21), 5·18 사건에 관해서는 전두환·노태우 등 5·18 핵심 관련자 8명을 내란수괴 및 내란중요업무 종사 등 혐의로 연달아 기소했다(1996·1·3). 사건 발생 16년 만의 역사적인 사법심판 청구였다. 이날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과 함께 5·18 사건으로 기소된 사람은 사건 당시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 3군사령관 유학성, 육군 참모차장 황영시 등 5명(이상 구속 기소)과 국방부 장관 주영복, 계엄사령관 이희성, 수도군단장 차규헌 등 3명(이상 불구속 기소)이었다.

■ 공소시효 논쟁과 두 개의 특별법

그런데 여기에 공소시효 문제가 논쟁의 대상으로 부각되었다. 헌법 제84조에는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임 중 형사상 소추를 당하지 않는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위 두 범죄에 한해서는 대통령 재임 중이라도 소추를 할 수 있으니까 내란죄의 공소시효 15년이 경과하면 처벌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전두환·노태우 사건 관련자들을 처벌하기 어렵다는 견해가 유력해지자 특별법을 만들어 공소시효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나 대통령 재임 중에도 공소시효가 정지되지 않은 범죄(예 내란죄)를 사후에 공소시효가 정지된 것처럼 입법을 하는 것은 사후입법으로 소급처벌을 하는 것이어서 위헌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한편에서는 내란으로 집권한 대통령을 그 재임 중 내란으로 기소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는 점에 비추어 입법으로 그 모순을 해결하는 것은 용인되어야 한다는 견해도 유력했다.

전두환·노태우의 5·18내란을 처벌할 수 없다는 검찰의 결정이 국민 각계의 광범한 항의에 직면한 상황에서 국회는 ‘헌정질서 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과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두 법률 모두 1995·12·21 공포)을 제정하여 헌정질서 파괴범죄(형법상의 내란죄와 외환죄 그리고 군형법상의 반란죄 이적죄 등)에 대하여는 공소시효의 일반규정을 적용하지 않기로 하였다.

또 5·18특별법에서는 그런 범죄에 대하여 국가의 소추권 행사에 장애사유가 존재한 기간은 공소시효의 진행이 정지된 것으로 보았다. 이런 특례입법에 대하여 전두환 측에서 위헌이라고 헌재에 헌법소원을 제기한 외에 서울지법에서 위헌심판제청도 있었으나 헌재는 위헌이 아니라고 기각했다.(1996·2·16) 헌재의 평결 결과는 5 대 4로 위헌의견이 다수였으나 위헌결정 정족수(6표)에 미달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두 사건 피고인들에 대한 단죄에 걸림돌이 제거되었다.

■ 정치자금 받지 않았더니 기업인들 잠 못 이뤄

1996년 2월26일 오전 전두환 비자금 사건 첫 공판이 서울지법 형사합의 30부(재판장 김영일 부장판사) 심리로 서울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열렸다. 이날 전씨 측 변호인은 개정 벽두부터 공소사실이 너무 추상적이라는 공격을 했는데 그보다는 전씨의 진술이 화제가 되었다.

그는 “기업 등에서 2259억원을 받은 것은 맞지만, 그 돈은 대가성 뇌물이 아니라 대선지원금 등 정치자금이었고, 이는 정치와 경제를 위한 것이었다”며 공소사실을 부인했다.

나아가 이런 진술도 했다. “취임 초 정치자금을 받지 않았더니 기업인들이 불안해 잠을 이루지 못하는가 하면, 망명할 생각을 하면서 투자를 하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정치자금을 받았다.”(1996·2·28, 중앙일보)

한편 5·18, 12·12 사건 피고인 16명에 대한 첫 공판은 1996년 3월11일 오전, 역시 서울지법 형사합의 30부 심리로 열렸다. 전직 대통령 두 사람의 내란 여부를 판가름하는 재판답게 관여 검사 8명, 변호인 30명이 맞서 포진한 역사적인 법정이었다. 어떤 신문은 이 재판 시리즈 기사에 ‘세기적 재판’이라는 제목까지 붙였다. 그 전의 비자금 사건 재판 때 방청권 한 장이 10만원이던 것이 이날엔 50만원을 호가했다고 한다.(1996·3·11, 국민일보) 전무후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이 재판의 열기가 뜨거웠던 것이다.

■ 공판 33회의 강행군, 변호인 반발도

검찰의 공소사실은 12·12를 신군부의 경복궁 모임에서 비롯된 군사반란으로, 5·18은 당시 신군부가 ‘시국수습방안’에 따라 5·17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할 때부터 1981년 1월31일 비상계엄을 해제할 때까지의 내란으로 보았다.

공판 개정 벽두에 변호인단은 “검찰은 이 건 기소로 5공화국의 헌법 제정과 대통령의 통치행위를 내란으로 규정, 역사를 부인하고 있다” “기소유예한 사안에 대하여 수사를 재개하여 기소함으로써 이 사건이 정치적 필요에 의한 것임을 자인했다”는 등 검찰을 비난했다. 또 전두환의 정승화 육참총장 연행은 정당한 처사였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하여 검사(서울지검 형사3부장 김상희)는 “피고인 측에서 정 총장의 연행을 정당하다고 하나, 이는 범죄행위로 볼 수밖에 없으며, 이 재판은 민족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 열리는 것이다”라고 반박했다.

이처럼 초반부터 격전을 치른 이 사건 재판은 그해 8월1일까지 무려 33회의 공판(비자금 사건 공판 6회 포함)을 열었고, 때로는 야간 재판까지도 거듭하는 대장정이었다. 그 때문에 일부 변호인들이 주 2회의 공판에다가 야간 재판까지 강행하는 데 불만을 품고 법정에서 퇴장하는 사태도 있었다. 간혹 전씨의 기발한 진술이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심지어는 “5공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은 북괴의 주장에 동조하는 거나 다름없다”고도 했다. 12·12 사태의 피해자이던 노재현(사건 당시 국방부 장관), 정승화(전 육군 참모총장), 정태완(전 수도경비사령관) 등이 법정에 증인으로 나와 17년 전의 가해자들과 대면하는 ‘그때 그 사람’을 연출해서 주목을 끌기도 했다.

■ 사형, 무기징역 등 중형을 구형

1심 사실심리의 쟁점을 간추리자면, 위헌 소지가 있는 특별법에 의한 공소 제기의 합헌 여부, 정승화 육참총장 체포의 적법 여부, 집권 시나리오에 의해서 계획된 5·18의 국헌문란 행위 여부, 광주 시민 학살의 책임 등이 공방의 핵심이 되었다.

전두환·노태우 양측은 검찰의 조사과정과 법정진술 등에서 서로 얼마쯤의 갈등을 겪은 것으로 보였으며, 변호인들 간의 공동 전략 협의나 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것 같다고 한 언론은 보도했다.

1996년 8월5일 오전 10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등에 대한 비자금 사건과 5·18, 12·12 사건에 대한 구형 공판이 열렸다. 이날 김상희 부장검사는 50여쪽의 논고문을 한 시간 넘게 낭독했다. 그리고 전두환에 대하여는 반란 및 내란수괴 등 죄책을 물어 사형을, 노태우에 대해서는 반란·내란중요임무종사의 죄목으로 무기징역을 각 구형하였다. 그리고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뇌물수수)과 관련하여 전씨에게 2223억여원, 노씨에게 2838억여원의 추징을 각 요청했다. 그 밖의 피고인들에 대하여는 사안의 경중에 따라 징역 10년에서 무기징역까지의 형이 구형되었다.

변호인 측에서는 5·18특별법의 위헌성을 재삼 강조하였으며, 피고인의 최후진술에서 전두환은 과거 정권의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것은 잘못이라고 항변했고, 노태우는 기업에서 돈을 받는 오랜 관행을 고치지 못한 점을 사과했다.

<2015-07-19> 경향신문

☞기사원문: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41) 전두환 노태우 내란 등 사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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