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심마당] 역사가 증명하는 학살의 현장, 진상규명을 가로막는 기묘한 색깔론
우리나라 교과서는 한국전쟁 전후 국군과 경찰의 민간인학살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나치의 유태인학살이나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는 가르친다. 적어도 내가 학교 다닐 때는 그랬다.
기자가 된 후 우리나라에도 그런 세계적인 제노사이드(Genocide·집단학살)에 버금가는 국가범죄가 있었다는 사실을 취재하면서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게다가 그런 엄청난 사건이 반세기가 넘는 동안 철저히 은폐되고 유족 또한 침묵을 강요당해 왔다는 사실, 지금도 우리가 흔히 쓰는 ‘골로 간다’(골짜기에서 총살 암매장) ‘물 먹인다’(바다에서 수장)는 말이 바로 여기에서 유래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 배신감이란….
1999~2000년 같은 마음을 가진 학자와 언론인, 사회단체, 유족들이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운동에 나섰고, 마침내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 제정됐다. 그때 우리의 역할은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짧은 피해자 신고기간, 턱없이 부족한 홍보와 지방자치단체의 비협조 등으로 실제 진실화해위원회에 접수된 신고 건수는 극히 일부에 그쳤고, 그나마 이명박 정부로 바뀌면서 위원회도 해체되고 말았다. 추가 신고와 조사기간 연장, 연구재단 설립, 배·보상특별법 제정, 유해안치시설 건립, 위령사업 전개 등 후속과제는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언론의 관심도 사라졌다.
▲ 영화 ‘레드 툼’ 포스터
이런 상황에서 영화 <레드 툼>이 나왔다. 구자환 감독이 2006년부터 10년에 걸쳐 만든 보도연맹 학살에 대한 영화다. 어디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지 않고 혼자 비용과 시간을 투자해 찍었다. 막판에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주변사람들이 십시일반 제작비를 보탰다. 완성해놓고 보니 개봉도 난망했다. 이 때도 시민과 피해자 유족들이 후원금 1000만 원을 모았다.
이 돈으로 전국 16개관 46개 스크린에서 어렵게 개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워낙 영화 같은 현실이슈가 많아서인지 언론에도 별로 주목받지 못했고, 관객은 2000명 정도에 그쳤다. ‘개승만’(영화 속에서 한 할머니가 이승만을 이렇게 부른다)의 만행을 고발한 영화이지만,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하는 사람들도 침묵했다.
사실 우익 쪽에서 그러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국전 당시 인민군이 자행한 학살도 있지만 그들은 침묵한다. 함양 육십령 고개에서 철수하던 인민군이 진주와 서부경남 우익인사와 경찰 수백 명을 집단학살했지만 자유총연맹이나 경우회가 나서 진상규명을 요구한 일은 없다. 들추면 들출수록 이승만 군경의 학살이 훨씬 더 많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 영화 ‘레드 툼’ 스틸컷
솔직히 드라마나 액션처럼 ‘화려한 재미’는 없는 영화다. 기억조차 끔찍했던 학살의 현장을 목격했던 사람들, 아직 숨이 남아 있던 사람까지 생매장했던 기억들, 남편을 잃고, 아버지를 잃고, 통한의 세월을 살아온 사람들의 말을 무심한 듯 들어준다. 카메라는 의령에서 마산으로, 마산에서 진주로, 밀양으로, 거제도로, 통영으로 옮겨 다니며 학살 장소와 암매장된 유골, 그리고 울부짖는 이들의 모습을 비춘다.
보통 우리는 부모를 잃고 1년 만 지나도 슬픔을 잊는다. 아버지 제사가 돌아와도 우는 경우는 없다. 나도 그랬다.
그러나 영화 <레드 툼>에서는 나이 80이 넘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65년 전 헤어진 사람을 그리며 서럽게 운다. 빗속에서 진흙탕에 막걸리를 뿌리며 운다.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원통하게 했을까? 이 영화는 ‘역시 팩트의 힘은 강하다’는 걸 여실히 보여준다. 배우의 연기가 아닌 실제인물의 실제 행동과 실제 육성이서일까. 가슴이 아린다. 울컥하게 한다. 그리고 나중엔 누군가를 향한 분노가 치민다.
▲ 영화 ‘레드 툼’ 스틸컷
교과서에서는 배우지 못하는, 학교에선 가르쳐주지 않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민낯과 속살을 접하고 싶다면 이 영화를 꼭 보길 권한다. 아마 23일쯤이면 모든 극장에서 상영이 끝난다. 보려면 공동체 상영을 신청하면 된다. 50명 이하라면 20만 원, 이상이라면 30만 원이면 된다
<2015-07-20> 미디어오늘
☞기사원문: 이승만이 국부라는 사람들, 이 영화를 꼭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