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농촌계몽운동을 소재로 삼은 심훈 소설 <상록수>는 1960년대 남한과 북한에서 개발주의와 민족주의가 결합된 영웅서사로 다시 태어났다. 사진은 신상옥이 감독하고 최은희·신영균·신성일·허장강 등이 출연했던 1961년 영화 <상록수>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광복 70년, 책읽기 70년] ⑦ 개발독재·민족주의 시대
박정희‘를’ 만든 책과 박정희‘가’ 만든 책은 무엇이었나? 나폴레옹 전기는 박정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으로 알려졌다. 소년 박정희는 나폴레옹 전기를 읽고 권력, 군대, 정복, 지배, 남자다움을 동경하게 된다. 대구사범 동창들은 나폴레옹 전기 외에도 히틀러의 <나의 투쟁>, <플루타르크 영웅전> 등을 읽던 그를 기억한다. 냉혹한 그의 정치술과 입만 열면 외치던 ‘민족중흥’은 성장기에 읽은 책들과 관련될지도 모른다.
박정희는 <우리 민족의 나갈 길>(1962)에서 5·16이 쿠데타가 아니라 ‘동학-3·1-4·19’로 이어지는 민족사적 소명을 계승했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박정희는 <국가와 혁명과 나>(1963)에서는 “땀을 흘려라! 돌아가는 기계 소리를 노래로 듣고… 이등 객차에서 불란서 시집을 읽는 소녀야 나는, 네 손이 밉더라”라고 개발의 찬가를 읊었다. 애꿎은 소녀에게 시비를 걸며 박정희는 자신을 소외된 민중을 위한 개발의 사도로 자처했다.
■ 개발주의 영웅서사의 탄생
그렇다면 박정희 개발주의의 이론적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매사추세츠공대(MIT) 경제학 교수 월트 로스토는 종속적 개발을 통한 저개발국가의 경제 도약이 공산화를 저지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론은 <사상계>에 소개되었고, <반공산당선언: 경제성장의 제단계>(1960)로 출간되어 많은 지식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지식인들의 기대와 달리 로스토는 근대화를 위한 정치적 지도력의 원천으로 군부를 지목한다. 박정희 정권은 로스토 이론을 복음처럼 여기며 충실하게 실천했다. 로스토의 종속적 개발주의는 국내에서는 민족주의와 민중주의의 옷을 걸쳐야 했다.
심훈의 <상록수>(1935) 독서사는 개발주의가 민족/민중주의의 옷으로 갈아입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이 작품은 3·1운동 때 옥고를 치른 심훈의 이력 때문에 흔히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주의 소설로 평가된다. 하지만 심훈은 “상해의 깊은 밤 어느 지하실에서 함께 주먹을 부르쥐던” 사회주의자 친구들을 회고할 만큼 사상의 교류폭이 넓은 작가였다. 실제 <상록수>는 기독교 계열의 농촌운동은 물론 사회주의 농민운동과 아나키즘적 이상공동체에 대한 지향이 공존하는 소설이었다.
<상록수>는 신상옥에 의해 영화화되면서 1960년대식 개발주의 영웅서사로 재탄생했다. 영화 <상록수>(1961)는 민족을 누대의 가난으로부터 구하겠다는 기치를 앞세우고 등장한 청년 영웅 채영신의 열정을 부각시킨다. 박정희는 이 작품을 보고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박정희의 눈물은 채영신에게서 자신의 소명을 발견한 감동의 눈물이자, ‘이등객차에서 불란서 시집을 읽는 소녀’에 대한 미움으로 이어질 눈물이었다.
박정희가 재건국민운동본부 본부장에 서울대 농대 교수 유달영을 임명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무교회주의자 김교신의 제자인 유달영은 그 자신 농민운동에 참여했고, <상록수>의 실제 모델을 다룬 <최용신소전>(1939)을 집필한 인물이다. 유달영은 최용신(혹은 채영신)의 정신을 재건국민운동의 이념으로 연결지었다.
그렇다고 <상록수>가 정권의 ‘개발’ 이데올로기만을 전파한 것은 아니다. 60년대 농촌운동의 활성화에는 <상록수> 주인공들의 영향이 컸다. 재야운동가에서 새누리당의 중진으로 변신한 이재오는 중학생 시절 <상록수>를 읽고 농민운동을 꿈꾸게 되었다고 술회한다. 신상옥은 북한에서도 김정일이 영화 <상록수>를 당 간부 교육용으로 관람시켰다고 전한다. 이처럼 심훈의 <상록수>는 식민지와 남북한에서 국가주의적 ‘개발’의 교본이자, 저항적 주체 형성의 독본이라는 양가적인 기능을 했다.
굴욕적인 한-일 수교에 대한 비판 여론은 반일 역사소설 붐을 낳았다. 사진은 1964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 1960년대 중후반의 역사소설 붐
굴욕적인 한-일 수교에 대한 비판 여론을 배경으로 반일 역사소설 붐이 일어났다. 한-일 수교 직후에는 일본 소설 붐도 동시에 존재했다. 일본에 대한 반감(두려움)과 더불어 일본 문화에 대한 향수가 공존하는 일종의 분열증적 상태라 할 만하다. 민족주의 소설로 분류되는 류주현의 <조선총독부>(1967)에도 이러한 분열증의 흔적이 엿보인다.
<조선총독부>는 1900년부터 1945년까지 한반도와 일본, 만주, 중국, 동남아를 망라한 지역을 배경으로 총 1700명의 등장인물과 100명의 중요인물의 동선을 통해 조선총독부라는 거대한 주체를 다루고 있는 대작이다. 류주현은 처음에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소설을 구상하며 “일제를 체험한 세대들의 향수 같은 것에 호소하려 했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다가 젊은 세대들의 반응이 뜨거워지면서 박충권과 윤정덕이라는 가상의 연인이 벌이는 독립운동의 서사를 가미했다. 출판 직후 5만질이 팔려나갈 정도로 인기였고, 1968년에는 삼성출판사와 일본의 고단샤(강담사) 제휴로 완역되어 일본에서도 읽히게 된다. 일본의 독자들은 조선총독부 관련 사건들을 따라 읽으며 잃어버린 식민지 시절의 향수를 달랬을 것이다.
강점기 베스트셀러였던 ‘상록수’
1961년 영화화돼 다시 주목받았다
일제에 저항을 그린 민족주의 소설이
개발주의 영웅서사로 재탄생한 것
이어령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와
박정희 ‘우리 민족의 나갈 길’은
민족주의 관점인 점에서 비슷하다
굴욕적인 한일수교 또한
민족주의 역사소설 붐을 불렀다
대중이 ‘선데이서울’을 즐기는 새
‘사상계’는 탄압을 받아 쇠락하고
‘창작과비평’이 새롭게 선보였다
1967년 7월의 국내소설 분야 베스트셀러는 1위 <이광수전집>, 2위 박종화의 <임진왜란>, 3위 김성한의 <이성계>가 차지할 정도로 역사소설이 중심이었다. 삼중당이 간행한 이광수전집이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린 것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1964년의 한 신문 광고는 “입학, 진학, 졸업하는 자녀에게 다시없는 선물”이라며 이광수전집 중에서도 <원효대사>와 <이순신> 등을 집중 홍보했다. 친일파 이광수는 <이순신>을 매개로 하여 납북된 공산주의의 피해자이자 민족주의자로 복권된다.
이순신이 구한 것은 이광수만은 아니었다. 이순신에 대한 박정희의 관심과 애정은 각별한 것이어서 1966년에는 ‘현충사 성역화’ 작업을 시작하고, 1968년에는 광화문에 장검을 찬 이순신 동상을 건립한다. 박정희는 한-일 수교에 대한 비판 여론을 의식해 관제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멸사봉공의 아이콘 이순신 장군을 자신의 이미지와 연결시키려 했다. 이순신은 박정희의 친일 행적과 박정권의 매판성을 씻어주는 표백제였다.
■ 민족본질론과 내재적 발전론
60년대의 대표적 베스트셀러인 이어령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1962)는 ‘풍토론’을 통해서 한국 문화의 고유성을 밝히려는 민족본질론의 사고를 보여준다. 그는 서로 다른 시대와 계급, 세대와 지역, 성차를 초월한 초역사적인 ‘한국(문화)’을 본질화한다. 이 책의 서문에서 이어령은 시골 신작로에서 마주친 한 노인을 묘사한다. 가난하고 비참한 “쫓기는 자의 뒷모습”을 보이는 노인은 민족의 대표단수로 호명된다. 여기서 작가가 미군 지프차에 올라탄 채 이 노인을 발견하는 것은 상징적이다. 한국인과 한국 문화의 고유한 본질을 이야기하지만 타자의 위치에서 바라보고 비교한다는 점에서 그의 인식은 오리엔탈리즘의 혐의가 짙다.
민족을 바라보는 이어령의 관점은 박정희의 시각과 그리 먼 거리에 있지 않다. 박정희는 <우리 민족의 나갈 길>에서 개조되어야 할 한국인의 민족적 병리를 강조하고 다시 그것을 한국인이 겪어온 수난의 역정과 겹쳐 놓는다. 박정희는 비참하고 게으른 민족성을 바꾸어 근면한 생활인으로 갱생시키고, 이를 사회개혁으로 모아내어 ‘굶주리는 사람이 없는 나라’를 만들려 한다고 쿠데타를 정당화했다. 박정희가 강조하는 민족성론과 혁명론은 일본의 식민사관이 만든 타율성론 위에 개발주의를 덧씌워 놓은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대중적으로 만연했던 민족성에 대한 비하가 극복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1960년대 후반 한국의 지식계는 식민사관의 정체성론/타율성론을 극복할 수 있는 강력한 방법론을 개발한다. 김용섭은 <조선후기농업사연구>(1970)로 묶이게 되는 일련의 논문들에서 조선 후기에 있었던 자생적 근대화의 가능성을 제기했다. 근대주의와 민족주의를 결합한 이러한 역사학의 성과는 국문학계의 사설시조, 판소리계 소설, 탈춤 등 서민문화에 대한 재발견으로 이어졌다. 정약용을 근대의 탐정처럼 다루고, 정조를 서구의 계몽군주처럼 묘사하는 현재의 대중서사물들은 내재적 발전론이 마련한 이러한 조선 후기의 역사상에서 비롯한 것일지도 모른다.
■ ‘선데이서울’과 ‘창작과비평’
1960년대 대중 미디어의 중요한 변화로 오락성 주간지의 성황을 꼽을 수 있다. <주간한국>(1964)의 대성공은 주간지 시대를 열어젖혔다. 일간지 최고 부수가 20만부에도 못 미칠 당시 <주간한국>은 43만5000부까지 발행되었다. 이러한 성공에 자극받아 1968년에만 <주간중앙>, <선데이서울>, <주간조선>, <주간경향> 등이 잇달아 창간되었다. 대중들이 많이 읽었던 <선데이서울>류의 주간지들은 ‘성’과 ‘부’에 대한 당대의 터질 듯한 생생한 욕망을 드러냈다. 저급성이 비판되지만, 이들 주간지는 그 비판자들의 내면에도 존재하는 비루함과 속된 욕망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오히려 시대의 솔직한 자화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종합교양지도 변화가 있었다. 박 정권에 대한 신랄한 비판자 <사상계>는 중앙정보부의 탄압으로 심각한 경영난에 허덕였다. <사상계>를 이어 한국 지성계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창작과비평>이 1966년 1월15일에 창간된 사실은 특히 기억해 둘 만하다. 통념과 달리 <창작과비평>은 창간 초에는 민중적·민족적 성격을 강조하지 않았다. 서구지향적 면모도 다소 보이던 이 잡지는 이후 염무웅의 활약과 신경림, 박현채 등이 참여하면서 권력과 자본에 대항하는 민중적/민족적 색깔을 갖게 된다. 창간 50년을 눈앞에 둔 <창작과비평>이 신경숙 표절사건과 관련하여 문학권력과 상업출판의 대명사로 지탄되는 오늘의 현실은 문자 그대로 격세지감을 자아낸다.
정종현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인문한국(HK)교수
<2015-07-23> 한겨레
☞기사원문: 박정희도, 김정일도 ‘상록수’를 읽고 감동했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