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성공한 쿠데타” 무거운 죄, 가벼운 벌… 그리고 ‘사면’의 역설
■ 1심, 전두환 사형, 노태우 징역 22년6월
12·12 및 5·18 사건과 비자금 사건의 1심 선고 공판은 1996년 8월26일 오전 10시 열렸다. 재판부는 개정 벽두에 잠시 보도진을 위한 TV 촬영을 허용한 뒤 바로 판결 선고에 들어갔다. 원체 사건의 규모가 방대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재판부가 판결문을 요약해서 따로 작성한 설명문을 낭독하는 데만 거의 두 시간이나 걸렸다. 설명문에는 쟁점별 주장과 이에 대한 재판부의 판단이 요약되어 있었다. 설명문의 낭독이 끝난 다음 재판장은 판결 주문을 읽기 시작했다. 선고받는 피고인 수만도 12·12 및 5·18 사건 16명, 전씨 비자금 사건 4명, 노씨 비자금 사건 14명 등 34명이나 되었다.
관심의 핵은 단연 전·노씨 두 사람에 대한 형벌의 수위였다. 전두환 피고인에 대해서는 반란, 내란수괴, 내란목적살인,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뇌물수수) 혐의 등을 적용해 검사의 구형대로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리고 노태우 피고인에게는 반란, 내란중요임무종사 및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뇌물수수) 혐의 등을 인정, 징역 22년6월을 선고했다. 그 밖의 피고인들은 각자 죄책의 경중에 따라 12·12 및 5·18 사건에서는 징역 10년(황영시·정호용·허화평·이학봉), 징역 8년(이희성·허삼수·유학성·최세창), 징역 7년(주영복·차규헌·장세동), 징역 4년(이윤희·박종규)이 각각 선고되었다. 그리고 비자금 사건에서는 이현우 징역 7년, 안현태 징역 4년, 금진호·이원조·성용욱·안무혁 각 징역 3년이 선고되었고, 그 밖의 피고인 12명에 대해서는 징역 2년6월에서 형의 집행유예까지 비교적 가벼운 형이 선고되었다.
l 일러스트 | 박건웅
■12·12는 군사반란, 5·18은 내란 폭동
또 비자금과 관련해 전두환 및 노태우에게 검찰의 요청대로 뇌물액수만큼의 추징이 선고되었다. 그런데 광주 유혈진압 및 자위권 발동과 관련된 내란목적살인 부분에서 전두환·이희성·주영복에 대해서는 유죄를 인정했으나 정호용·황영시에게는 무죄를 선고해 일부의 실망을 자아내기도 했다. 박준병 피고인도 ‘12·12 사건에서 뚜렷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없다’는 이유로 무죄 선고를 받았다. 반면 구속집행정지로 풀려났거나 처음부터 불구속이었던 유학성·황영시·최세창·장세동·이학봉 등 5명은 실형 선고와 동시에 법정구속이 되었다.
판결은 12·12를 전·노가 주동이 되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제거하고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한 군사반란이라고 본 검찰의 공소사실을 그대로 인정했고, 5·18과 관련해서는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 국회 봉쇄, 정치인 체포, 5·18 초기 강경진압 등을 ‘폭동’으로 보았다. 한편 비자금 수수에 대해서는 대통령의 직무와 관련된 ‘포괄적 뇌물’이라는 판단을 내림으로써 통치자금 또는 정치자금이니까 뇌물성이 없다는 변호인 측의 주장을 배척했다.
12·12 및 5·18 재판은 ‘역사적 사건’이라는 평가에 걸맞게 여러 가지 신기록 또는 진기록을 남겼다. 무엇보다도 전직 대통령 두 사람이 반란·내란·뇌물죄 등으로 구속되어 같은 법정에 선 것, 피고인 전원이 군 장성 출신으로 도합 ‘50개의 별’이 등장한 것부터가 희한했다. 전후 256일 동안 33회나 공판이 열리는 대장정이었다는 점, 검찰 수사기록이 16만여쪽에 달해 기록 운반에 1.5t 트럭이 동원된 사실, 관여 검사 8명에 변호인 30명의 대접전이었다는 점, 검사의 논고문만 400여쪽에 달한 것, 41명의 증인이 법정 증언대에 섰고 수사 단계에서의 참고인은 500여명이나 되었던 점 역시 신기록이 될 만했다. 헌법소원, 위헌심판 제청, 공판기일 연기 신청, 변호인 퇴정·사퇴, 국선변호인 선임, 구속기간 만료에 의한 석방, 법정구속 등도 이 재판의 예민하고 험난했던 일면을 말해준다. 방청권의 고액(50만원, 100만원 호가) 거래, 법정 내에 폐쇄회로(CC)TV 설치도 화젯거리였고 AP·AFP·UPI·로이터 등 세계 유수의 통신사와 뉴욕타임스·아사히신문 등 외국 유력지들의 취재 경쟁도 관심을 끌었다.
■ 2심, ‘성공한 쿠데타’ 처벌의 법리 명시
서울고등법원(재판장 권성 부장판사)은 1996년 10월7일 12·12 및 5·18 사건의 첫 공판을 열었고, 11월14일 결심을 했다. 한편 비자금 사건 결심공판은 11월7일 있었다. 그리고 12월16일 위 두 건의 사건에 대한 선고공판이 열렸다. 항소심 판결은 ‘엄격한 법리 판단, 완화된 양형’으로 요약되었다. 우선 판결문 첫머리에서 ‘성공한 쿠데타’에 대한 가벌성을 분명하게 밝혔다.
즉 성공한 쿠데타가 대부분 처벌되지 않는 것은 법을 집행하는 사람의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쿠데타의 처벌 문제는 법의 효력이나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집행 및 실천의 문제라고 했다. 그리고 이 판결은 “광주시민들의 대규모 시위는 주권자이자 헌법 제정 권력인 국민으로서 신군부 측의 국헌문란 행위에 맞서 헌법 수호를 위해 결집을 이룬 것”으로 “피고인들이 이를 폭력으로 분쇄한 것은 명백한 내란행위”라고 규정했다. 비상계엄의 확대와 계엄군의 강경진압은 폭동이며, 국보위 설치 및 운영은 국헌문란에 해당하고, 정승화 육참총장의 연행은 수사권 행사 요건을 갖추지 못한 불법행위라고 판단했다. 내란죄의 공소시효에 관해서도 2심 판결은 비상계엄 해제일인 1981년 1월24일을 기산점으로 본 검찰의 주장 및 1심 판결과는 달리, 1987년 6·29선언까지는 내란행위가 종결되지 않은 것으로 판시했다(따라서 내란죄의 공소시효는 1996년 1월24일이 아닌 2002년 6월29일에 완성). 1심의 유·무죄가 뒤집힌 부분도 있었다.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정호용·황영시 두 피고인의 내란목적살인 혐의가 유죄로 바뀌었으며, 광주 재진입작전의 수립 및 실행에 참가한 전두환·정호용·황영시·주영복·이희성 피고인에 대해 1심과 달리 내란목적살인죄를 적용했다.
■ ‘항장불살(降將不殺)’ 감1등에 비판의 목소리
그러나 양형은 1심에 비해 대체로 낮아진 편이어서 전두환이 1심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노태우가 징역 22년6월에서 징역 17년으로 감경되었고,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던 황영시와 정호용도 각 징역 8년과 7년으로 형기가 줄었다. 대부분의 피고인들이 감형된 데 대해 불만을 표시하는 측이 많은 것으로 보도되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피고인들이 철저한 반성과 회개의 자세를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재임 중 업적을 내세워 양형을 줄인 것은 온당치 못하며, 수많은 희생을 생각할 때 재판 결과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논평했다. ‘죄는 무겁게, 벌은 가볍게’라는 한 신문의 표현처럼 앞뒤가 어긋나는 일면이 드러난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특히 전두환에게 감1등을 하여 무기징역을 선고하는 이유로 판결은 ‘항장불살(降將不殺·항복한 장수는 죽이지 않는다)’이라는 표현까지 썼는데, 그는 결코 ‘항장’이 아니었다. 그는 무력 쿠데타, 국헌문란, 폭동을 자행했으며 누구에게 항복한 적이 없다. 더구나 6·29선언도 위급 모면책의 하나로 나왔으며, 7년 이상이나 국헌문란과 폭동을 계속한 자에게 굳이 작량감경(酌量減輕)까지 해주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었다(한승헌, ‘5·17 사건 판결의 반논리’, 경향신문 1996·12·28).
위와 같은 항소심 판결은 대법원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즉 대법원 전원합의부(재판장 윤관 대법원장)는 피고인들의 상고를 모두 기각했는데, 그 과정에서 일부 대법관들의 소수의견이 나왔다. 군사반란과 내란을 통해 집권한 경우의 가벌성, ‘5·18 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 제2조가 법 시행 당시 공소시효가 완성된 헌정질서 파괴행위에 대해서도 적용되는지 등에 관해 한두 대법관의 소수의견이 있었다.
■ ‘역사 바로 세우기’와 역사의 아이러니
‘5·18특별법’에 의한 재판에 관해서는 주목할 만한 이론(異論)도 있었다. 12·12 반란은 정치군인들이 국가에 대해 저지른 개인의 범죄라는 성격이 강하지만, 5·18 내란은 국가권력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집단이 국민의 생명과 인권을 짓밟은 범죄이므로 개인에 대한 ‘국가의 범죄’라는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5·18을 국가에 대한 개인의 범죄(내란·반란 등)로만 다루는 것은 5·18의 가장 중요한 본질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이다(조용환, <5·18특별법과 전·노 재판의 문제점>, 역사비평 1996년 봄호).
그리고 한 사학자가 ‘내란범은 자신의 범죄를 감추기 위해 내란을 만들어낸다’고 한 명언(?)도 음미할 만하다(한홍구, <역사와 책임>, 한겨레출판, 2015). 그가 예로 든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비롯한 여러 사건에서 보듯이, ‘반국가’나 ‘정부 전복’의 경력자들일수록 그런 구실을 꾸며내어 반대세력을 탄압하는 습성을 보였다. 이는 3공에서 6공까지의 시국사건을 되돌아보면 수긍이 가고도 남는다. 그런 되풀이 속에서도 12·12 및 5·18 재판은 성공한 쿠데타를 내란 및 반란 등으로 형사처벌함으로써 이른바 ‘역사 바로 세우기’에 성공한 사례로 꼽힌다.
물론 재판은 사법부의 소관이었지만, 5·18특별법 등의 제정과 검찰의 강력한 수사에는 김영삼 대통령의 의지도 반영됐다고 봐야 한다.
쿠데타 세력이 만든 민정당과의 3당 합당을 통해 전·노의 후계구도를 이어받은 김영삼 대통령으로서는 매우 어렵고 힘든 과업을 수행한 셈이었다. 그러나 전·노 두 사람은 그들이 재판극을 꾸며서 목숨까지 빼앗으려 했던 바로 그 김대중이 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직후인 1997년 12월22일 김영삼 정부의 사면 복권으로 석방되었다. 그리고 다음해 2월25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열린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에 김영삼·최규하·전두환·노태우 전임 대통령 네 사람이 단상에 자리를 함께하게 되었다. 어찌 보면 대화합의 장(章)처럼 비치기도 했지만, 어찌 생각하면 흔한 말로 ‘역사의 아이러니’였고, 한국 현대사의 지독한 역설이기도 했다.
<2015-07-26> 경향신문
☞기사원문: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42) 전두환 노태우 내란 등 사건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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