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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권율 옆에, ‘귀족 세습’ 친일파 비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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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공원 윤웅렬·이근호 선정비 문제… “비석 철거와 단죄비 추진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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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 남구 광주공원에 있는 의병장 심남일(1871~1910) 순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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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광주공원이 시끄럽다. 20일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가 광주공원 내 친일인사 윤웅렬, 이근호 ‘선정비’의 존재를 문제삼으며 여론이 들끓고 있는 것. 특히 광주공원은 광주 근대사의 살아있는 현장(광주 1호 공원)이자, 호국·민주화 영령 추모 시설이 있는 곳이라 광주광역시에선 비석 철거 및 ‘단죄비’ 건립 계획까지 세우고 있다.


28일 오후, 광주 남구에 있는 광주공원을 찾았다. 입구를 지나 숲길에 들어서니 고요하던 공원에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숲을 우산 삼아 오르막을 넘자 높이 7m의 성거사지 5층석탑(고려시대)이 눈에 띄었다. 광주공원이 생기기 전, 본래 성거산이었던 이곳엔 성거사라는 절이 있었으나, 지금은 5층석탑만 남아있다. 보물 109호 지정된 5층석탑은 기단 1단 위에 탑신 5층을 세운 탑으로 전형적인 고려시대 양식을 띄고 있다.


탑을 뒤로한 채 공원 쪽을 바라보자,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인 의병장 심남일(1871~1910) 순절비가 눈에 들어왔다. 비석엔 ‘의병장 남일심공 순절비’ 열 글자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전남 함평의 훈장이었던 심남일은 1907년 말 의병을 일으켜 1909년 10월 체포되기까지, 일본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그는 본래 이름인 ‘수택’을 버리고 ‘전남 제일의 의병’이 되겠다는 다짐을 담아 ‘남일’로 이름을 바꿀 만큼 의병 활동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심남일을 체포한 일본군 2연대 3중대의 당시 공로패엔 “전남 남부에 있어서 수일이라 칭하는 거괴 심남일을 포획”이란 내용이 담겨 있는데, 이를 통해 심남일의 활약을 짐작할 수 있다. 1962년 정부는 심남일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했다

한국 근대사 ‘명암’ 담겨있는 광주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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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 남구 광주공원에 있는 4.19의거 희생영령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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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남일 순절비를 지나자 공사 현장이 나타났다. ‘크르릉’ 소리내며 일하는 굴착기 옆 안내판에 ‘현충탑’이란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6.25전쟁 당시 광주·전남 지역 ?희생 군경 1만5867명을 기리기 위해 1963년 세워진 현충탑은 올해 현충일 행사를 끝으로 새 현충탑 건립을 위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바로 옆엔 이들의 위패가 있는 봉안소가 마련돼 있다.


공사 현장을 돌아나오자 공원 입구에서 현충탑으로 곧장 올라오는, 비교적 급한 경사의 계단이 놓여 있었다. 광주공원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신사가 있었던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 계단은 당시 신사 참배를 위해 만들어진 계단이다.


지금은 계단 입구 쪽에 ‘4.19의거 희생영령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1962년 4월 17일 생긴 이 비석에는 “불의와 독재에 항거하다 쓰러진 일곱 영령들의 명복을 빌며, 그 뜻을 만세에 길이 전하고자 전 도민의 열성을 한데 모아 이곳에 이 비를 세우다”라고 적혀 있다.


계단 옆쪽으로 광주향교로 이어진 좁은 길이 보였다. 광주향교는 1896년 3월 의병장 기우만이 의병 봉기를 준비하고, 천명한 곳이기도 하다. 기우만의 천명 이후, 의병장 기삼연 등도 기우만이 있는 광주향교에 합세해 세를 불린다. 이어 기삼연은 호남 지역 의병을 규합해 ‘호남창의회맹소’를 만든다. 앞서 소개한 심남일도 호남창의회맹소에서 기삼연과 함께 의병활동을 펼쳤다.


윤웅렬·이근호, 일왕 포상금 이어 작위 세습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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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 남구 광주공원에 있는 사적비군. 맨 앞의 비석은 임진왜란 당시 국난 극복에 큰 역할을 한 권율을 기리는 비석(도원수 충장권공 창의비)이고, 뒤쪽 좌우의 비석은 각각 친일인사 윤웅렬(관찰사 윤공웅렬 선정비), 이근호(관찰사 이공근호 선정비)를 기리는 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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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향교 옆길엔 습하고 그늘진 곳에서 자라는 맥문동이 무더기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보랏빛 맥문동꽃길을 지나치니 외진 곳에 한데 모여 있는 비석이 눈에 들어왔다.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인 이 비석들은 광주 곳곳에 있던 사적비를 1957년 광주공원 입구에 옮겼다가, 1965년 현재 위치로 옮겨놓은 것으로 ‘광주공원 사적비군’이라고 부른다.


여러 비석 중 맨 앞에 높이 솟아 있는 세 비석이 가장 먼저 시선을 끌었다. 높이 약 2m의 세 비석 중 두 비석은 최근 문제가 된 친일인사 윤웅렬과 이근호의 선정비다. ‘관찰사 윤공웅렬 선정비’, ‘관찰사 이공근호 선정비’라고 적힌 두 비석은 나란히 사적비군에 놓여 있다. 윤웅렬 선정비는 윤웅렬이 전남 초대 관찰사를 지낸 이후인 1898년 2월에, 이근호 선정비는 이근호가 전남 5대 관찰사를 지내던 중인 1903년 5월에 세워졌다.


윤웅렬과 이근호는 각각 2006년, 2007년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 관련자로 선정됐으며,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출판한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됐다.


윤웅렬은 일본에 국권을 뺏긴 직후인 1910년 10월, 일본으로부터 귀족 작위(남작)를 받은 인물로, 같은 해 12월 보관하고 있던 국채보상금 약 4만 2000원(80kg 쌀 1000가마니 약 7원)을 경무총감부에 이관했다. 1911년 1월 은사공채(일왕의 포상금) 2만5000원을 받고, 2월 총독 관저에서 열린 ‘작기본서봉수식’에 예복을 갖추고 참석하는 등 친일 행위를 이어가다가 1911년 9월 사망했다. 그의 작위는 장남 윤치호가 이어 받았다.


이근호는 을사오적(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중 한 명인 이근택의 형으로 국권을 빼앗긴 직후 남작 작위를 받았으며, 윤웅렬과 마찬가지로 은사공채를 받았다. 한편 이근호의 동생이자 을사오적 이근택은 남작보다 한 단계 위인 자작 작위를, 다른 동생인 이근상은 남작 작위를 받았다. 이근호, 이근택, 이근상 삼형제는 각각 아들 이동훈, 이창훈, 이장훈에게 작위를 물려줬다(관련기사: 3형제가 일제 작위 받은 대표적 친일귀족)


“호국·민주화 영령 옆에 친일파 비석이 버젓이…”

친일인사 비석 두 개 앞엔 다른 비석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도원수 충장권공 창의비’. 임진왜란 당시, 도원수를 역임하며 국난 극복에 큰 공을 세운 권율을 기리는 비석이다. 권율 창의비는 1902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창의(국난을 당했을 때 나라를 위해 의병을 일으킴)’라는 비석 이름처럼 당시 항일 의병 봉기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2014년 3월부터 광주공원 일대 문화재를 조사해 온 마을기업 꿈꾸는 거북이의 구용기씨를 만났다. 구씨는 “권율 비석과 친일파 비석이 함께 있는 상황”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앞서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도 “광주공원은 광주시민들이 자주 찾는 광주 제 1호 공원이며 의병장 심남일 순절비, 4.19의거 영령추모비, 5.18민중항쟁 사적비가 있는 역사의 현장”이라며 “친일파의 선정비가 아무런 조치도 없이 의향 광주의 중심에 자리잡은 광주공원에 남아있다는 것은 후손들에게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밝혔다.


현재 광주광역시는 ‘친일인사 비석 철거 및 단죄비 건설 계획’을 논의 중이다. 비슷한 사례로 2009년 전북 진안의 윤치포 불망비 철거 및 친일행적 안내문 설치, 2013년 강원 정선의 이범익 공적비 옆 단죄비 건립 등이 있다.


26일 광주광역시는 “친일인사 선정비 발견을 계기로 광주 내 다른 비석을 대상으로 일제조사를 실시할 계획”이라며 “추가로 친일인사 비석이 나올 경우 철거하거나 단죄비를 세워 역사교육장으로 활용할 계획이다”고 발표했다.


이에 구씨는 “철거 혹은 단죄비 건립만이 답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단죄비를 설치하더라도 이러한 친일인사 선정비가 있다는 것을 시민들이 알 수 있어야 한다”며 “지금처럼 존재감 없이 놔둘 것이 아니라 접근성을 높일 수 있도록 사적비군을 다시 조성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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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 남구 광주공원에 있는 친일인사 윤웅렬 선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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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29>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임진왜란’ 권율 옆에, ‘귀족 세습’ 친일파 비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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