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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하나없이 철거위기…베이징 ‘이육사 순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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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순국지’ 도심 속 흉물로 방치

‘군사통일주비회 개최지’ 등 대부분 재개발·소실로 사라져

(베이징=연합뉴스) 이준삼 특파원 = 광복 때까지 임시정부청사가 들어섰던 상하이(上海)와 충칭(重慶), 치열한 무장투쟁이 전개됐던 동북 3성(헤이룽장(黑龍江)·지린(吉林)·랴오닝(遼寧))….


중국 내 주요 항일운동 활동무대로 화려한 조명을 받아온 지역들이다.


그러나 당시 중국의 정치중심지였던 수도 베이징(北京)이 항일독립운동 초기 주요 독립운동가들의 가장 중요한 활동장소 중 하나였다는 점은 그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식민지배에 항거하며 옥사했던 단재(丹齋) 신채호(1880∼1936)와 이육사(1904∼1944)를 비롯해 우당(友堂) 이회영(1867∼1932), 김산이라는 가명으로 더욱 유명한 장지락(1905∼1938) 등 많은 투사가 이곳을 활동거점으로 삼았다.


정부와 독립기념관·한국근현대사학회가 공동 발행한 ‘국외 항일운동 유적지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베이징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전쟁 전략을 연구하고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등 다양한 노선과 이념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 흔적은 광복 70년이 흐른 오늘날 찾아보기 쉽지 않게 됐다. 보존과 관리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았던 탓이다.


▲ 지난 5월21일과 7월13일 두 차례 둘러본 옛 일본군 헌병대 건물. 이곳에 있는 감옥에서 청포도의 시인 이육사가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순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 : 이준삼 특파원)

‘이육사 순국지’로 알려진 옛 일본군 헌병대 건물은 한국인 관광객도 많이 찾는 베이징의 명소 왕푸징(王府井) 근처에 자리를 잡고 있다.


최근 기자가 찾은 이곳은 오랫동안 방치돼 그야말로 흉가 같았다. 건물 밖이나 안이나 아무런 표지도 없어 이 건물의 정체를 일반인이 알 길은 없어 보였다.


1925년 21살의 나이로 의열단에 가입해 일생을 오롯이 조국독립에 바친 육사는 1943년 체포돼 베이징으로 이송돼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는 광복을 앞둔 1944년 40살의 나이로 이곳에서 옥사했다.


▲ 지난 5월21일과 7월13일 두 차례 둘러본 옛 일본군 헌병대 건물. 이곳에 있는 감옥에서 청포도의 시인 이육사가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순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 : 이준삼 특파원)


옛 일본군 헌병대 건물은 일부 공간이 개조돼 주거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건물의 상당 부분은 오래전에 폐쇄된 상태였다.


중국당국의 보존조치가 없다면 조만간 철거될 운명을 맞게 될 우려가 크다.


건물 앞에서 마주친 한 중국인 남성은 “이 건물은 옛 모습 그대로다. 한국의 리루스(李陸史)가 여기서 죽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우연히 마주친 중국인의 입에서 이육사라는 이름을 듣게 된 것은 의외였다.


“지금 눈 내리고/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이육사의 시 ‘광야’ 중에서)라고 노래했던 저항시인 이육사의 자취는 이처럼 미약하게 남아있다.

현재 베이징에서 그나마 흔적이나 찾아볼 수 있는 주요 항일독립운동 유적지는 이곳을 포함해 몇 곳에 불과하다. 

신채호, 이회영 등이 해외 독립운동세력을 통괄하는 군사통일기관의 설치문제를 협의했던 ‘군사통일주비회’ 개최지, 베이징 거주 한인 청년들이 신채호를 단장으로 추대해 조직한 ‘대한독립청년단’ 본부 등의 흔적은 사라진 지 오래다.


▲ 지난 5월21일 찾은 베이징 동물원 정문. 이 동물원의 서쪽 부근에 군사통일주비회 개최지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사진 : 이준삼 특파원)

 


▲ 베이징 동물원의 서쪽 구석에 자리잡은 창관루(暢觀樓루). 일각에서는 이 창관루가 ‘군사통일주비회’ 개최지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국외 항일운동 유적지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실제 개최지는 소실된 상태다. (사진: 이준삼 특파원)

‘군사통일주비회’ 개최지가 있었다는 베이징 동물원과 ‘대한독립청년단’ 본부가 존재했다는 샤오스차오(小石橋)후퉁에도 어떤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베이징은 끊임없이 추진된 재개발 속에 천지개벽을 거듭했다. 독립투사들의 흔적 대부분은 재개발과 함께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져버린 셈이다.


▲ ‘대한독립청년단’ 본부가 있던 곳으로 알려진 베이징 샤오스차오(小石橋)후퉁의 한 건물. 지어진지 수십 년은 돼 보이는 허름한 단층 가옥이 자리잡고 있다.(사진 : 이준삼 특파원)


민족문제연구소의 박한용 교육홍보실장은 연합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중국지역에 대한 항일독립운동 유적지 보호는 임시정부청사를 중심으로 이뤄져 왔다”며 “베이징은 상하이와 함께 항일독립운동 초기 중심지였음에도 보존 관리는 소홀했다”고 지적했다.

세월과 함께 사라지는 투사들의 흔적을 모두 보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이나 독립운동가 유족들은 정부와 학계, 민간이 힘을 합쳐 표지판 설치, 가이드북 제작 등의 방식으로 ‘최소 보존’ 조치라도 할 수 있다면 광복을 가져다준 ‘거인’들의 흔적이 완전히 소멸하는 것은 막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지적한다. 

jslee@yna.co.kr

<2015-07-29> 연합뉴스

☞기사원문: <광복70년> 표지 하나없이 철거위기…베이징 ‘이육사 순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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