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기사

“일제강점기 군수 이상은 죄다 친일파였다”

2880


[임기상의 역사산책 110] 친일 전력을 반성한 이항녕과 도주한 박춘금



▲일제강점기에 군수를 지낸 사실을 공개적으로 반성한 이항녕 박사


1991년 7월 10일 경남 하동초등학교 강당. 바르게살기운동 하동군협의회의 초청을 받아 단상에 오른 이항녕 전 홍익대 총장은 침통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부터 50년 전인 1941년 하동군수로 부임해 1년간 재직한 적이 있습니다. 사과한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저는 그 당시 공출 실적을 올리기 위해 죽창을 들고 다니면서 군민들을 괴롭혔던 사실을 사과드립니다. 저는 하동군수로 1년, 창녕군수로 3년간 있었는데 그때는 징용·징병·학병을 보내기 위한 일을 했습니다. 그때 그렇게 집을 떠나야 했던 분들 가운데 목숨을 잃은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일본의 앞잡이로서 그런 일을 저질렀던 나쁜 죄인이었습니다.”


이 참회는 한국사회에 잔잔한 파문을 몰고 왔다. 수천 수만의 친일파 가운데 이렇게 공개적으로 반성한 이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대다수 친일파들은 전력을 숨기거나 심지어는 “내가 무슨 나쁜 일을 저질렀나?” 하며 오리발을 내미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일제 앞잡이’ 눈물로 반성하다


이항녕 박사는 이후 틈만 나면 두고두고 친일 전력을 참회했다. 이 강연이 보도된 직후 친일파 전문가인 정운현 선생이 정릉에 있는 이항녕 박사의 자택을 찾아가 인터뷰를 했다.


-처음에 주최 측으로부터 강연 요청을 받고서 어떤 감회가 들었습니까?


“‘하동’이라고 하니까 저로서는 감회가 없을 수야 없지요. 거기서 군수를 지냈으니까요. 해방 후에도 더러 하동을 지나친 적이 있습니다만 ‘죄의식’ 때문에 (군민들을) 찾아볼 용기가 없었습니다.”


-죄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일제 말기 하동·창녕군수로 재직하면서 일제의 앞잡이가 돼 군민들을 괴롭힌 행위를 말합니다.”


-하동군수 시절 식량공출 문제로 고생을 하신 것 같은데….


“제가 군수로 부임한 이듬해인 1942년부터 ‘공출제도’가 시행됐습니다. 그런데 하동에선 생산량보다 할당량이 많아서 무리가 있었습니다.”


-죽창 이야기는 왜 나온 겁니까?


“당시 군민들이 집안 곳곳에 쌀을 감추어 두니까 군청 직원들이 죽창을 들고 다니며 창고나 벽 같은 쌀을 숨겨둘 만한 곳을 쿡쿡 찔러본 것을 두고 한 얘깁니다.”


-죽창으로 사람을 해친 사례도 있습니까?


“그런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공출독려반’이 죽창을 들고 다니니까 군민들에게 위협은 됐을 겁니다.”


-본인의 ‘친일’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말하는 건가요?


“식량공출이나 노무자 징용, 학병 권유, 징병제 독려 등에 대한 방침이 도 군수회의에서 결정되면 군수는 다시 면장회의를 소집해 그 내용을 하달, 독려했습니다. 결국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한 셈이지요.”


일제 말기에 군수 노릇 했다고 ‘친일파’로 볼 수 있을까요?


“아무 생각 없이 상부기관의 결정사항을 집행한 것도 그렇지만 더러는 출세를 목적으로 부풀려 집행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당시 군수는 일선 행정기관의 실질적 책임자로 지금보다 훨씬 권한과 재량이 많았습니다. 어려운 시험을 거쳐 자발적으로 그런 자리에 앉았다면 이는 재임기간이 문제가 아닙니다. 적어도 군수 이상의 관리는 친일파로 볼 수 있습니다.”

▲ 1942년 한 여학교에서 학부형들에게서 강제로 공출한 놋그릇을 한 곳에 모아놓고 교사와 학생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해방이 되고 가장 먼저 공개적으로 친일에 대한 반성을 한 인물은 33인 대표의 한 사람인 최린이다. 그는 반민특위 재판정에서 자신의 친일행위를 반성하고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최린은 변절의 이유를 묻는 서순영 재판장에게 이렇게 고백했다.
“기미년 3.1운동 당시 일제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고 해서 그들은 나를 주목하고 위협하고 또 유혹하여 끝내 민족을 배반하는 행동을 하고 말았습니다. 오직 죄스럽고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민족 앞에 죄를 지은 저를 광화문 네거리에서 사지를 찟어 죽이십시오.”

◇ 후대에 까지 이어진 사과와 반성


▲반민특위로 압송돼 가는 최린(뒷편). 앞에 흰 두루마기 차림을 한 인물은 경성방직 사장을 지낸 김연수이다.


최린의 진솔한 참회를 듣고 법정 안은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최린은 재판부와 방청객들의 동정을 사서 기소는 되었지만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저명한 시인이자 소설가 최정희의 남편이었던 파인 김동환의 경우, 납북된 부친을 대신해 아들이 친일행적을 사죄했다. 지난 2001년 파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3남 영식은 <아버지 파인 김동환-그의 생애와 문학>, <파인 김동환 전집>(전5권) 등 부친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집을 여러권 발간했다.


영식은 이 가운데 <아버지 파인 김동환>의 서문 말미에 이렇게 고백했다.

“아버지가 일제 말엽에 한때 저지른 치욕적인 친일행위를 뉘우치고 변절 고충을 고백하면서 ‘반역의 죄인’임을 자처했던 바 있음을 되새기면서, 저는 가족을 대신하여 국가와 민족 앞에 깊이 머리 숙여 사죄합니다.

파인의 아들 말고도 동요 ‘고향의 봄’을 쓴 아동문학가 이원수의 딸도 2011년 11월 22일 부친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아버지의 친일행적에 대해 사죄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눈물로 용서를 빌었다.


“친일인명사전에 아버지의 이름이 등재된 것을 보고서야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친일작품을 쓸 당시 자식들에게 일본어를 못쓰게 하고 한글을 가르치곤 했는데 그런 글을 썼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이원수의 죄목은 달랑 5편의 친일시를 쓴 것이 전부이다. 그러면 수천, 수만 명에 달한다는 악질 친일파들은 어디로 간 것인가? 여기서 참회는 커녕 해방 후에도 악질적인 행각을 벌인 한 인물의 삶의 궤적을 추적해보자.



▲ 옛 부민관 건물인 현재의 서울시의회 청사. 여기서 일제시대 마지막 폭탄테러가 발생한다.


“쾅~ 쾅~”

1945년 7월 24일 밤 9 9분 50초 부민관 건물(현 서울시의회 청사). 친일파들이 주최한 ‘아시아민족분격대회’에서 친일거두 박춘금이 일장연설을 하러 강단에 올라간 순간 두 차례의 폭음이 천지를 진동했다. 화약연기와 먼지가 뿜어져 나오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왔다. 대회는 쑥대밭이 되었다.


길 건너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는 청년 3명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성공이다~ 완벽하게 성공했다.” 이들이 단상 아래와 계단 밑에 설치한 시한폭탄이 제 시간에 폭발한 것이다.
이들 세 청년은 일본에서 막 귀국한 조문기와 유만수, 강윤국이었다. 이들은 충칭임시정부로 망명해 무장투쟁을 벌이자고 맹세한 몸이었다. 이들은 출국 전에 경성에서 ‘큰 건’ 하나를 올리고 이를 훈장으로 들고 충칭으로 출발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 첫 타깃이 바로 박춘금이었다.



▲ 부민관 의거의 세 주역. 왼쪽부터 강윤국, 조문기, 유만수


일본경찰은 전국에 비상령을 발동하고 5만원이라는 거액의 현상금을 걸었다. 당시 쌀 한 섬에 100원이었으니 어마어마한 액수이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박춘금은 거기에다 사재까지 털어 현상금 액수를 올렸다. 그러나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한 달도 안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면서 박춘금은 이제는 쫒기는 신세가 되었다. 일제하 마지막 폭탄테러의 목표가 된 박춘금이란 인물은 어떤 자인가?


◇ 정치테러의 원조 ‘박춘금’ 일본 중의원에 당선되다



▲ 뼈속까지 일본인인 박춘금. 일본으로 도주해 거기에서 죽는다.


경남 밀양 출신인 박춘금은 대구에 주둔한 일본군의 급사와 일본인 술집에서 일하면서 폭력배로 성장한다.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폭력배 조직을 결성 재일 조선인 사회를 장악한다. 박춘배의 친일기질을 주목한 조선총독부가 점차 그를 후원하기 시작했다.


그가 이끄는 폭력조직 ‘상애회’는 겉으로는 ‘조선인 직업 소개’ 활동을 한다고 내세웠지만 점차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 항일민족단체를 부수는 폭력행위를 일삼았다. 나중에는 국내로 폭력활동을 확대해나갔다. 1924년 하의도 소작쟁의가 발생하자 주민들을 모아놓고 권총을 들이대면서 마구 폭행하고 강제로 소작계약서에 날인하도록 강요했다. 조선인 소작농이 아니라 일본인 지주 편에 선 것이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32년 3월 일본의 제18대 중의원 선거에 입후보해 당선된다. 얼마나 일본을 위해 뛰었으면 도쿄 유권자들이 그를 밀었을까. 그는 중일전쟁이 터지자 국회에서 입에 거품을 물고 연설을 했다.


“우리는 28년 전부터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 비상시국을 당했는데도 조선 출생의 일본인이 제국군인으로 일선에서 싸울 수 없다는 것은 정말 서글픈 일입니다.”



▲일본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을 때의 박춘금 (중앙에 있는 인물). 그 오른쪽 여자가 일본인 아내이다.


1940년 중의원선거에서 재선되자 박춘금은 조선으로 건너와 친일대열의 선봉에 선다. 곳곳에서 학병에 가라고 연설회를 다니면서 대의당이란 단체를 결성해 당수로 취임한다. 이 단체의 목적은 친일파들을 규합해 ‘대동아성전’에 방해가 되는 반전, 반일 사상을 가진 인사들에 대한 테러를 자행하는 것이다. 그 첫 궐기대회로 부민관에서 ‘아시아민족분격대회’를 개최했다가 조선청년들로부터 폭탄세례를 받은 것이다.

폭탄테러에 이어 대일본제국이 항복을 하자 박춘금은 갈 곳이 없었다. 살기 위해 건국준비위원회에 막대한 뇌물을 바치겠다고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결국 그는 몰래 일본으로 도망갔다. 1949년 반민특위는 박춘금을 ‘반민족행위 1급 피의자’로 수배하고 맥아더 사령부에 체포를 요구했으나 반민특위 해체로 흐지부지 되었다.

재일교포 사회에서 유지 행세를 하던 박춘금은 1973년 3월 31일 사망하면서 국민들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그러던 박춘금이 2002년 그의 고향 밀양에서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 송덕비의 앞면(왼쪽)과 뒷면. 뒷면에 ‘일한문화협회’라고 송덕비를 세운 단체명이 새겨져 있다. (사진=오마이뉴스 윤성효 제공)


박춘금이 죽은 후 그의 시신은 비밀리에 밀양시 교동 900번지 선산에 묻혔으나 아무도 이 사실을 몰랐다. 그러다 1992년 일한문화협회란 단체가 박춘금 무덤 옆에 송덕비를 세우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충절의 도시 밀양이 들끓었다. 결국 2002년 밀양지역 시민단체들이 송덕비를 깨뜨리고 무덤은 어디론가 이전됐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독일로 치면 나치 잔당의 무덤이 그의 고향에 조성되고 나치에 부역한 사실이 적힌 송덕비가 세워지는 일이다. 지금이라도 국립묘지는 물론 전국에 흩어져 있는 송덕비를 조사해 친일파의 것이라면 바로 없애야 하지 않을까.

<2015-07-23> 노컷뉴스

☞기사원문: “일제강점기 군수 이상은 죄다 친일파였다”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