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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 비슷하거나 조금이라도 부역했다면 다 죽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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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상의 역사산책 112] 캄보디아보다 25년 앞선 킬링필드 ‘대한민국’



▲ 트럭에 실려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보도연맹원들

“1950년 여름,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내 어린 눈에는 그저 멀리 풍경화처럼 스쳐 지나갔던, ‘트럭에 실려 가던 흰옷 아저씨들’은 누구였고, 어디로 실려갔으며, 어떻게 되었을까? 1953년 정전협상이 체결되어 한반도에 총성이 멎자, 그 트럭에 실려갔던 ‘흰옷 어른들’이 인근 ‘경산 코발트 광산으로 끌려가 총살되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일제가 운영하다 폐광된 그 굴에서, 내가 보았던 그 어른들이 모두 집단학살당했던 것이다.”

경북 경산이 고향인 언론인 고 성유보 선생의 회고담이다.


▲ 코발트광산 지하갱도에 유골들이 산처럼 쌓여 있다.

1950년 7월 중순, 38도선을 넘어 남침한 인민군이 경상도로 접근하자, 군과 경찰은 경산시·청도군·대구시·영동군에서 예비검속해 경찰서 유치장과 인근 창고에 구금한 보도연맹원과 대구형무소 재소자들을 트럭에 태웠다.

보도연맹은 이승만 정권이 전쟁이 터지기 1년 전 과거 좌익에 몸담았던 주민들을 전향시킨다는 목적으로 전국적으로 결성한 단체이다. 경찰에 연행된 보도연맹원 가운데 갑·을로 낙인찍힌 주민들은 모두 트럭에 실렸다.

대략 3,50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경산의 폐광으로 남아 있는 코발트 광산에 끌려와 모두 처형당했다. 학살은 7월 20일경부터 9월 20일경까지 두 달에 걸쳐 저질러졌다.

한 주민의 얘기를 들어보자.

“빨갱이 사건에 관련된 분들이라고 하는데 이들을 트럭으로 싣고 왔어요. 올 때는 주민들이 못보게 했습니다. 아예 방송을 하고, 공포탄을 쏘면서 차로 싣고 오는데, 굴비 엮듯이 여덟 명씩 묶었답니다. 그렇게 싣고 와서 그 골짜기에 내려놓고, 사각 테두리 수직갱도 입구에 여덟 명씩 줄을 세워놓고 일률적으로 총을 쐈습니다. 나중에는 한 방 쏘면 여덟 명 다 넘어가게 하고, 총도 쏘기 싫으면 개머리판으로 팍 찍으면 그냥 떨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갱도가 시체로 가득차자 그 인근 골짜기나 밭에 총살된 시신을 마구 묻었다. 경산시 평산동에 사는 ‘오씨 할머니’는 대원골 일대에서 유골을 목격했다. 대원골은 코발트 광산에서 남쪽으로 300m 떨어진 인적이 드문 골짜기였다.

“그 쪽에 쑥이 굉장히 좋더라고.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거기에는 가지 말라고 하더라고. 나는 괜히 쑥이 좋으니까, 내가 못 뜯어가게 하려고 가지 말라는 줄 알았지. 그래서 거기 가서 쑥을 뜯는데, 갑자기 발이 밑으로 빠져 버리는기라. 아이고 놀래가지고 ‘형님~ 나 좀 잡아주소!’하고 소리를 질렀지. 다리는 계속 밑으로 빠지는데 밑에서 뼈 같은게 덜걱 덜걱 걸리더라고. 그래서 겨우 다른 사람의 손을 잡고 빠져나와서 보니까, 거기가 사람들 죽은 데라. 다른 사람들이 ‘거기는 가지 말라 캤는데 왜 갔노? 거기서 난리가 났었지’ 하더군. 거기에는 뼈들이 늪처럼 되어서 굉장히 많이 있었어.”


▲ 경산 코발트 광산 입구. 이 일대에 불법으로 처형된 3,500여 명의 유골들이 흩어져 있다.


대원골 일대에는 유골 뿐만 아니라 M1 소총, 칼빈 소총 등의 탄피와 탄환, 심지어는 지휘관들이 쓰던 45구경 탄환까지 발견되었다. 학살이 계획적인 지휘계통에 따라 근접사격에 의한 총살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민간인 학살을 조사한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상 조사를 신청한 곳이 전국적으로 154곳에 달하니 군경이 저지른 학살은 전국적인 현상인 것으로 보인다.

경산지역의 학살을 조사한 진실화해위원회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이 사건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라는 일차적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군과 경찰이 관할 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 등 예비검속자들과 대구형무소에 미결 또는 기결 상태로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을 불법 사살한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이다. 비록 전시였다 하더라도 범죄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민간인들을 사살한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이다.”

◇ 단순 부역자까지 모조리 처형한 비극의 땅 ‘금정굴’


▲ 금정굴사건의 희생자 유골들. 17년간 서울대 임시보관실에 보관하다가 2011년 파주 청아공원에 안치됐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탄현동에는 주민들이 아침등산으로 즐겨찾는 황룡산이 있다. 이 자그마한 산을 10여분 정도 올라가면 푸른 비닐로 덮여 있는 금정굴이 나온다.

1990년 이 일대의 향토조사를 하던 고양시민회 회장 김양원이 ‘금정굴에서 집단 학살이 있었다’는 소문을 듣고 탐사를 하다 무더기로 쌓여 있는 유골을 발견했다. 유족들과 시민단체가 발굴작업을 계속한 결과 굴 속에서 153구의 유골과 탄피, 도장 등이 발견되면서 이 참극의 진상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 많은 죽음의 이유는 무엇일까?

사건의 발단은 1950년 10월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엔군이 고양·파주 지역을 점령하자 고양경찰서는 인민군에게 부역한 주민들을 마구잡이로 연행했다. 경찰서의 4개 유치장과 경찰서 앞 양곡창고에는 매일 15명 가량의 주민들이 잡혀왔다.

유치장에는 80여 명이, 양곡창고에는 180여 명이 감금되었다. 유치장 담당 경찰관이었던 정준섭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여자 남자를 구별하지 않고 7~8명 들어갈 곳에 한 20여 명을 때려넣은 거야. 여자들은 오줌도 서서 싸는거야. 오줌을 마시는 것도 봤어. 오죽 목이 타면 그랬을까? 유치장이 꽉 차니까 창고에 넣었어. 그냥 와글와글했어. 매일 아침 점검을 해야지. ‘아무개, 아무개’하면 다 죽어가는 대답으로 ‘네~’하는 사람도 있고… 경찰서에서는 주민들에게 밥을 안 줬어요. 그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해줘? 잡혀간 가족들이 밥을 해 와.”

A등급으로 분류된 주민들은 양팔이 군용통신선(삐삐선)에 묶인 채 경찰관과 의용경찰대의 감시 아래 금정굴로 향했다. 약 2km 떨어진 야산까지 30여 분을 걸어야 했다. 금정굴에 도착한 주민들은 굴 아래 공터에 집결해 있다가 5~7명씩 학살 현장으로 불려 올라갔다. 금정굴 현장에는 먼저 도착한 5~7명의 경찰·의용경찰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주민들을 굴 입구에 세워놓고 M1 소총이나 카빈소총으로 사살했다. 학살은 20일 동안 계속되었다. 이때 희생된 이봉린의 아들 이봉순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진술했다.

“저는 아버지의 시신이라도 수습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작은아버지와 동네 어른들 7명과 함께 금정굴로 달려갔습니다. 밧줄과 사다리, 마차 바를 갖고 갔습니다. 이때가 점심때 즈음이었습니다. 밧줄을 이용해서 작은아버지와 동네 반장어른, 두 분이 내려갔습니다. 내려가시자 ‘사람 살려’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분이 유일한 생존자 이경선 씨입니다. 우리가 꺼내주자마자 바로 고봉산 쪽으로 도망갔습니다. 작은아버지가 올라오시더니 “그냥 피비린내가 나고 숨이 덜 끊어져 살려달라고 악을 쓰는 사람, 팔이 떨어진 사람들로 가득해 있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올라왔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최소한 153명의 무고한 목숨이 사라졌다. 유가족들은 재산도 뺏기고 연좌제에 걸려 한많은 인생을 살았지만, 가장 억울해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인민군이 요구한 부역에 응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개, 돼지보다 못한 처우를 받았다는 점이다.

그때는 자신이 상당한 부역을 했다고 판단한 이들은 이미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떠난 상태였다. 그러니 남은 이들은 그전 전쟁 기간 중에 어쩔 수 없이 협조한 이들뿐이었다.

예를 들어 인민군의 강요에 의해 쌀을 내주거나 두어 시간 보초를 서라는 요구에 응한 것, 또는 집이 넓으니 인민재판소로 쓰자는 인민군의 강요에 응했다고 죽였으니 얼마나 억울했을까.

그래서 일부는 자신들이 인민군의 협박에 의해 하기 싫은 일을 당한 피해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그저 ‘부역자의 친척’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이 잡혀갈 줄은 생각도 못했다. 다들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수많은 시신과 진상은 땅에 묻힌 채 세월이 흘러갔다.

<2015-07-29> 노컷뉴스

☞기사원문: “빨갱이 비슷하거나 조금이라도 부역했다면 다 죽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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