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기사

[재판으로 본 현대사](43)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 (上)

568


ㆍ초유의 대통령 탄핵안, 3분 만에 국회 심의 끝… “경범죄에 사형”


■ 보수세력의 ‘비주류 대통령’ 흔들기


‘시대는 단 한번도 나를 비켜가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인생 역정을 회고하는 글에 이런 제목을 붙인 적이 있다(<참여정부 5년의 기록>, 국정홍보처). 그의 험난했던 일생을 잘 압축했구나 싶은 제목이었는데, 이에 걸맞게(?) 그를 괴롭힌 ‘사상 초유’의 두 가지를 잠시 짚어본다.


그는 형법 제158조의 ‘장례식 방해죄’로 기소된 전력이 있다. 1987년 8월 거제도에서 대우조선의 한 노동자가 경찰의 최루탄을 맞고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때 노무현 변호사는 현지에 가서 노조와 가족 측에 장례 문제 등을 조언하고 온 뒤에 구속되었는데, 그 죄명이 ‘장례식 방해죄’였다. 내 기억으로는 그런 조문, 그런 죄명으로 처벌된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혹시 형법이 생긴 이래 그 조문으로 기소된 첫 피고인이 바로 노무현 변호사가 아니었나 싶다. 그는 또 헌법 제65조의 탄핵 심판을 받은 첫 번째 대통령이기도 했다. 대한민국 헌정 이후 한번도 발동된 적이 없는 대통령 탄핵조항이 그를 비켜가지 않았던 것이다. ‘변호사 노무현’, ‘대통령 노무현’의 삶은 그만큼 남다르게 험난하고 또 처절했던 것이다.


국민이 직접 선출한 대통령도 헌법재판소가 탄핵 결정을 하면, 달리 불복할 길도 없이 바로 파면된다. 그러니까 탄핵은 참 무서운 제도다. 법적인 요건은 어찌 되었건, 정치적으로 악용되거나 오판을 하면 대통령직뿐 아니라 국민주권마저 날려 보내는 흉기가 될 수도 있다.

2002년 12월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노무현은 다음해 2월25일 제16대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임기 초반부터 순탄치 못해서 이런저런 난국과 거듭 부딪치게 된다. 특히 여소야대 정국에서 그의 위상은 자주 흔들렸다. 탈권력, 탈권위를 내세운 개혁정책은 수사·정보기관과의 불화를 키웠고, 일부 기득권 세력 및 보수언론과의 충돌을 불러왔다. 거기에다 모든 일을 힘으로 밀어붙이려는 집단이기주의와 첨예한 사회적 갈등으로 충돌이 격화되자 집권 3개월밖에 안된 대통령의 입에서 “대통령을 못해 먹겠다”는 말까지 나왔다.


이처럼 권력기반이 약한 소수파 정권을 이끌며 힘겨워하는 그를 향해 보수야당이 연발하는 ‘비주류 대통령’ 흔들기는 날로 심해져갔다. 노 대통령은 집권 7개월 만에 측근비리에 대한 수사를 비롯, 언론·국회·지역 민심 등 여러 상황의 악화로 국정 운영이 난관에 봉착했음을 자인하고,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국민투표로 신임을 묻겠다는 승부수를 던져 국민들을 놀라게 했다. 이에 한나라당은 ‘밀어붙이자’는 태세였고, 민주당은 ‘무책임하다’면서도 재신임으로 정권을 되찾을 호기나 온 듯이 들떴다. 하지만 헌법상 국민투표는 ‘외교·국방·통일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만 그 대상으로 한정하고 있어서(헌법 제72조) 대통령의 신임을 묻는 방식이 될 수는 없었다.



일러스트 | 박건웅


■ 두 야당에서 발의한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마침내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2004년 3월9일 소속 의원 159명(한나라당 의원 144명 중 108명, 민주당 62명 중 51명)의 서명을 받아 노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발의했다.(발의 정족수는 재적의원 과반수) 4·15 총선을 불과 한 달 앞둔 시점에서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소추가 발의된 것이다. 탄핵안의 제안사유는 ‘노 대통령은 불성실한 직책 수행과 경솔한 국정 운영으로 인한 정치 불안 때문에 국정이 파탄지경에 이르러 국민을 극도로 불행에 빠뜨리고 있다’며 ‘이로써 노 대통령은 나라를 운영할 자격이 없음이 극명해져 탄핵소추안을 발의하게 되었다’고 했다.


나아가서 ‘노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을 수호해야 할 국가원수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특정정당을 위한 불법 선거운동을 계속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선거법을 위반했다는 판정과 경고조치를 받았음에도 불구, 이를 무시하고 특정 정당을 공개 지원함으로써 법치주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초헌법적인 독재적 태도를 보였다’고 주장했다. 이런 탄핵안의 발의에 대하여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의회권력을 장악한 지역주의, 부정부패, 냉전세력의 동맹에 의한 쿠데타적 음모’라고 비난했다.


탄핵안에서 대통령의 과오라고 적시한 구체적인 사실은 다음과 같은 언행이었다.

즉, (1)헌법과 법률을 위반하여 국법질서를 문란케 하고 있다. 1)언론과의 기자회견에서 ‘국민이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해줄 것을 기대한다’는 발언을 하여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의무를 위반하였다. 2)노사모나 국참 0415의 행사에서 ‘시민혁명’ 발언 등으로 법 불복종운동을 했다. 3)한 일간지에 보도된 열린우리당의 총선 문건에서 보듯 청와대의 조직적 선거개입이 확인되었다. 4)민주당을 반개혁정당으로 규정하여 헌법상 국가의 정당 보호의무를 위반하였다. 5)입법부 구성을 위한 국회의원 선거에 무단 개입함으로써 헌법상의 삼권분립 정신을 파괴하였다. (2)자신과 측근들의 권력형 부정부패로 인해 국정을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덕적·법적 정당성을 상실하였다. (3)국민경제와 국정을 파탄시켜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다.


이런 요지의 탄핵안에 대해서는 야당 내부에서도 반대 내지 신중론이 적지 않았지만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와 민주당 조순형 대표의 주도로 기어코 국회의 발의절차까지 마치게 되었다.

■ 딱 3분 만에 끝낸 탄핵안 번개 심의


그에 앞서 노 대통령은 중앙선관위의 선거법 위반 결정에 대하여 이견을 표명했고(중앙선관위의 공문에 선거법 위반은 명시된 바가 없고 단지 중립의무를 지켜줄 것만 기재되어 있었다.) 이에 야권에서 사과를 요구하고 나섰으며, 일부 시민단체에서도 노 대통령의 사과와 동시에 야당의 탄핵안 철회를 요구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통하여 ‘탄핵을 모면하기 위한 사과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이를 거부함으로써 그때까지 탄핵에 소극적이던 일부 의원과 탄핵 반대 입장을 취해 온 자민련 의원들이 탄핵 찬성 쪽으로 기울었다.

바로 그날(3월11일) 오후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국회 본회의에서 문제의 탄핵소추안을 표결 처리하려고 했으나(탄핵안은 국회 본회의에 보고, 회부된 지 24시간 이후 72시간 이내에 무기명 비밀투표에 의하여 소추 여부를 결정하여야 한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의장석 점거 등으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난 12일 국회 본회의에서 헌정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소추 결의안이 압도적인 의원 다수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재적 의원 270명 중 열린우리당 의원을 제외한 야권 3당(한나라당, 민주당, 자민련)과 무소속 의원 등 159명이 투표에 참여하여 찬성 193표, 반대 2표로 가결되었다(의결 정족수는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


투표에 들어가기에 앞서 박관용 국회의장은 경호권을 발동, 국회 경위들로 하여금 의장석 주변에서 농성 중이던 열린우리당 의원들을 강제로 끌어내게 했는데, 이 과정에서 야당 의원들까지 가세,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이날 박 의장의 탄핵소추안 처리과정은 그 진행에 초특급의 흠이 있어 훗날 헌재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날의 국회의사록에 의하면 오전 11시22분에 단상에 선 박관용 의장이 “개회를 선언합니다” “의사일정 제1항 대통령탄핵소추안을 상정합니다” “조순형 의원이 나올 제안설명은 유인물로 대체합니다” “무기명 투표를 실시합니다” 이 몇 마디 말이 끝난 때가 오전 11시25분, 그러니까 딱 3분 만에 번개같이 ‘심의’를 끝냈다.

■ 규탄과 환호의 엇갈림 속의 후폭풍


이것이 헌정사상 초유라는 대통령 탄핵안 심의의 전부였다. 어쨌든 박 의장의 가결 선포가 떨어지자 야당 의원들은 박수를 치고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고, 여당 의원들은 구두·명패·서류뭉치 등을 의장석을 향하여 집어던지며 격렬하게 항의했다.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는 의원도 있었다. 대다수 국민들의 반응은 국회의 탄핵안 가결에 부정적이었다. 한 보수 일간지에 실린 코멘트도 이러했다. “의회에 의하여 민주주의가 거부된 것이며 80년대 이후 전개되어 온 민주화 역사에 대한 수구세력의 도전이다.”(정대화 상지대 교수) “다수당의 정략에 의해 국정을 혼란에 빠뜨리는 어이없는 일이며, 국민의 역사적 의식과 배치되는 치욕의 날로 기록될 것이다.”(조명래 서울 YMCA 시민정치위원장)


이날의 탄핵소추안 처리는 국회의원 총선을 불과 30여일 앞둔(즉, 16대 국회의원 임기가 두 달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 감행된 것이어서 정치적으로 그 파장이 클 수밖에 없었고, 당장 국정 전반에 헌법이 예정한 커다란 변화가 왔다. 우선 노 대통령의 직무가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절차가 끝날 때까지 정지되고, 고건 국무총리가 그 권한을 대행하게 되었다. 국회 의결 바로 다음날인 13일, 서울 여의도를 비롯하여 전국 대도시에서 탄핵안 통과에 분노한 각계 시민들이 광장과 거리로 나와 탄핵안에 항의하는 집회 시위를 벌였다.


당시의 보도에 의하면, 노동자·주부·학생·직장인 등이 합류하여 분노와 규탄의 함성을 올렸다. 이어서 학계, 문화예술계, 지식인, 종교계 인사들도 탄핵 반대 성명을 내는 등 항의 대열에 가세했다.

한국공법학회 회원인 헌법학자의 69%가 소추안은 탄핵사유가 안된다고 응답했다. 반면 예비역대령연대, 자유시민연대 등 ‘노무현 대통령 탄핵 촉구 국민연대’ 소속 300여명은 한나라당사 앞에 모여 탄핵소추안 가결 소식에 ‘만세’를 외치며 환호했다. 안응모 황해도 도민회장은 “노사모를 비롯한 친북세력들을 용납해서는 안된다”고 목청을 높였다. 이와 같은 극과 극의 대립을 두고 한 일간지는 ‘경범죄에 사형’ ‘탄핵 빌미 자초’라는 제목을 뽑기도 했다.

<2015-08-02> 경향신문

☞기사원문: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43)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 (上)

※관련기사

(42) 전두환 노태우 내란 등 사건 (下) /(41) 전두환 노태우 내란 등 사건 (中) /(40) 전두환 노태우 내란 등 사건 (上) (39) 문익환 목사 방북 사건 (下)/ (38) 문익환 목사 방북 사건 (中) /(37) 문익환 목사 방북 사건 (上) /(36)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下) / (35)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中) / (34)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上) / (33) 김재규의 10·26 사건 (下) / (32) 김재규의 10·26 사건 (中) / (31) 김재규의 10·26 사건 (上)

(30) 인혁당 사건 (下) / (29) 인혁당 사건 (中) / (28) 인혁당 사건 (上) / (27) 대통령 긴급조치 4호 사건 (下)/ (26) 대통령 긴급조치 4호 사건 (中) / (25) 대통령 긴급조치 4호 사건 (上)/ (24) 대통령 긴급조치 1호 사건 (下) / (23) 대통령 긴급조치 1호 사건 (中)(22) 대통령 긴급조치 1호 사건 (上)

(21) 월간 ‘다리’ 필화사건 (下) /(20) 월간 ‘다리’ 필화사건 (中) /(19) 월간 ‘다리’ 필화사건 (上) /(18) 동백림 거점대남 공작단 사건 (下) / (17) 동백림 거점 대남 공작단 사건 (中) / (16) 동백림 거점 대남 공작단 사건 (上) / (15) 소설 ‘분지’ 필화사건 (下) /(14) 소설 ‘분지’ 필화사건 (中) / (13) 소설 ‘분지’ 필화사건 (上)  

(12) 경향신문 폐간탄압사건 (下) / (11) 경향신문 폐간 탄압 사건 (中) / (10) 경향신문 폐간 탄압사건(上) /

(9) 진보당 사건과 조봉암 (下) / (8) 진보당 사건과 조봉암 (中) / (7) 진보당 사건과 조봉암 (上) / (6) 국회 프락치 사건 (下) / (5) 국회 프락치 사건 (上) / (4) 반민특위 사건 (下) / (3) 반민특위 사건 (上) / (2) 여운형 암살사건 (下) / (1) 여운형 암살사건 (上)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