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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증조부 김정필은 독립유공자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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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 김정필’의 증손자 주장…
“만주에 간 적도, 독립운동 한 적도 없어”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 증조부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독립유공자가 아닙니다.”


함께 있던 김영진 광복회대전충남지부 감사와 홍경석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 사무국장의 눈이 커졌다. 예상을 하고 있던 ‘경주 김씨 송애공파 종친회’ 김찬경 총무도 의자에서 등을 떼며 자세를 다잡았다.


“독립운동 하지 않았다”고 밝힌 독립유공자의 증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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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유공자 김정필(金正弼)의 증손자이자 집안의 장손인 김아무개(73, 대전시 거주)씨. 그가 기자에게 족보를 내보이며 자신의 증조부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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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무개(73·대전시 거주)씨. 그는 독립유공자로 알려져 있는 김정필(金正弼)의 증손자이자 집안의 장손이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등에 따르면 김정필(1846-1920)은 충남 대덕 사람으로 1907년 한봉수(한민구 현 국방장관의 조부)의 병진에 입진, 한봉수 의병장을 보좌하며 용인, 괴산, 여주 등지에서 격전을 치르는 등 활동했다.


그 후 1920년 만주로 망명해 무장 항일투쟁을 벌이다 같은 해 10월, 순국한 것으로 돼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8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한 데 이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런데 고인의 장손이 증조부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고 폭탄 발언을 한 것이다. 후손이 나서 자신의 조상에 대해 독립운동을 한 사실이 없다며 서훈 취소를 요청한 것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다. 다른 후손은 조상의 독립운동 행적을 부풀리거나 허위로 만들어내 기까지 하는데 자진해서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나선 연유는 뭘까?

– 왜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고 하시는지요?

“독립운동을 안 했으니까요.”

– 증조부께서 돌아가신 지 95년이나 지났습니다.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는 걸 어떻게 아시죠?

“선친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여쭤 봤지만, (증조부의) 독립운동 행적에 대해 ‘전혀 들은 바 없고 모른다’고 하셨어요. 할아버지께서도 일찍 돌아가셨지만, 증조부의 독립운동 행적에 대해서는 말한 바 없다고 해요.”

수수께끼를 풀듯 질문과 답변이 이어졌다.

– 그럼 서훈 신청은 누가 언제 한 거죠?

“1967년 또는 1968년에 제 당숙(아버지 사촌 형제)인 OO어른(1990년 사망)께서 했다고 해요. 1968년에는 서훈은 못 받고 대통령 표창을 받았어요. 다 당숙께서 만들어낸 겁니다.”

– 당숙께서 서훈 신청을 할 때 다른 집안 가족들과 상의한 적 없나요?

“전혀요. 다른 가족들은 서훈을 신청한 것도, 대통령 표창을 받은 것도 몰랐어요. 몇 년 후 먼 집안 분이 ‘네 당숙이 증조부가 독립운동했다고 서훈신청을 해 대통령 표창을 받아서 연금을 타 먹고 있으니 알아보라’고 하더군요. 당숙께 가서 물으니 그제야 ‘그렇다’며 저희 아버지가 연금을 받을 수 있도록 돌려놓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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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보훈처에 실려 있는 독립유공자 김정필 공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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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숙께 증조부가 독립운동한 게 맞느냐고 묻지는 않았나요?

“물었죠. 그랬더니 의병활동도 하고 만주에서 무장투쟁한 게 틀림없다고 해요.”

– 그런데 왜 믿지 않나요?

“당숙께서 아는 얘기를 아버지가 모를 리 있나요. 당숙이 형편이 어려우니 독립유공자 혜택을 받으려고 거짓으로 꾸며 서류를 낸 거죠. 앞뒤도 안 맞고요.”

– 앞뒤가 앞 맞다니요?

“당숙의 주장 대로라면 증조부께서 1920년 봉오동 전투에 참가했다는 건데 증조부 연세를 따져보면 그때가 75세예요. 75세 되시는 분이 어떻게 만주까지 가서 무장투쟁을 해요? 게다가 할아버지는 만주는 고사하고 고향을 떠난 일이 전혀 없어요. 혹시 책에 쓰여 있다면 동명이인일 겁니다. 직접 확인은 안 했지만 북한에 동명이인이 있다고 해요. 남의 독립운동 행적을 도용했다는 거예요.”

– 75세라도 독립운동에 참여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사실과 달라요. 1920년에 만주에 가신 일도 없지만 같은 해 10월 만주에서 왜경에 피살됐다고 하는데 (한국독립사에는 김정필이 1920년 만주로 망명, 봉오동 전투에 참가했다가 같은 해 10월 왜경에게 피살돼 길림과 연길쯤에서 순국한 것으로 돼 있다) 실제 증조부가 돌아가신 때는 1920년(75세)이 아닌 1925년(80세)이에요. 족보에도 1925년 1월 돌아가신 것으로 기록돼 있어요. 1920년 사망했다는 국가보훈처 기록 자체가 엉터리입니다.”

보훈처에 기록돼 있는 사망 시점과 실제 사망 시점에 5년 이상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기자가 종친회 사무실의 도움을 얻어 족보를 들춰보니 사망일이 1925년 1월 6일로 돼 있었다. 의문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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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보훈처에는 김정필의 사망 시점이 1920년(75세)으로 돼 있지만 족보에는닌 1925년(80세)으로 기록돼 있다. 증소자인 김씨는 1920년 사망했다는 기록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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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주에서 순국하셨다면 유해를 고향에 모시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증조부의 묘지는 어디에 있나요?

“돌아가실 때 지금의 대전 동구, 당시 집 근처에 모셨어요. 저희 아버님(1979년 사망)이 10살 때 셨어요. 만주에서 시신을 모셔온 일도 없어요. 만주와는 아무 관련이 없어요. 증조부는 종손이셨는데 집안에서 만주에 보냈을 리도 없고요. 1990년대 택지개발로 할 수 없이 세종시에 있는 선산으로 이장했어요. 그때 유해도 제가 직접 수습했어요.”

관련 정황으로 볼 때 그의 증조부가 만주로 망명해 무장투쟁을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커 보였다.

“당숙이 보훈 혜택을 받기 위해 꾸민 일”

–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도 ‘만주로 망명해 무장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고 하나 상세한 기록은 발견할 수 없다’고 적혀 있더군요

“그렇죠. 사실이 아니니까 상세한 기록이 있을 리 있나요. 당연 다른 기록(한국독립사 등)에 나와 있는 ‘봉오동 전투에 참가했다가 왜경에게 피살됐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에요.”

– 만주로 망명해 무장투쟁을 한 것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의병활동은 했을 가능성이 있잖아요?

“공적에 의하면 한봉수 의병장을 보좌했다고 하는데, 한봉수 의병장은 충북 분이고 관련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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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독립사>(1970년 발간)에는 김정필에 대해 일명 ‘원필’로 1920년 연길현에서 만주학살시 일병에게 피살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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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충북은 대전에서 가깝고 의병활동을 했을 수 있지 않나요?

“정말 그랬다면 왜 아무도 모르겠어요?”

– 언제부터 증조부가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나요?
“오래됐어요. 수십 년…”

정부는 1991년 김정필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 정부에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는데, 당시 후손분들을 상대로 증조부의 행적에 관해 재조사하거나 하진 않았나요?
“없어요.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전화 한 통도 한 적 없어요.”

– 당숙은 당시 무슨 일을 하셨죠?
“정당 쪽 일을 했어요.”

그는 “모든 일이 당숙이 보훈 혜택을 받기 위해 꾸민 일”이라고 단언했다.


– 왜 이제 와서 사실을 밝히신 거죠?

“근래 독립운동 행적을 의심받고 있는 ‘김태원’에 관한 <오마이뉴스> 보도를 접하고 더는 숨기지 말고 이번 기회에 바로잡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하는 것 자체가 조상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라는 생각도 했어요.”

그는 기자에게 “내가 한 얘기를 그대로 보도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어 “서훈이 취소되도록 나서서 절차를 밟아달라”고 강조했다.

“사실대로 말하니 속이 다 후련…”

숨 가쁘게 이어지던 문답이 끊어질 즈음 그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사실대로 말하고 나니 속이 다 후련하네요.”

묵묵히 듣고 있던 김영진 광복회 대전·충남지부 감사가 말을 받았다.

“용기 있는 행동,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경주 김씨 송애공파 종친회’ 김찬경 총무도 거들었다.

“그래요. 셀프 훈장을 받는 사람이 태반인데 스스로 훈장을 반납하겠다고 하니 박수를 보낼 일입니다.”

보훈처, ‘김원필 선생’ 공적으로  이중으로 훈장?

이후 기자는 김정필의 독립운동 행적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의병운동을 했거나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했다는 객관적 자료를 찾을 수 없었다. 다만 김정필의 또 다른 이름인 김원필(金元弼)의 행적은 찾을 수 있었다. 김정필 관련 기록에는 그의 또 다른 이름이 ‘김원필’이라고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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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원필 선생도 1991년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김원필 선생의 공적은 물론 사망년도가 김정필과 비슷하다. 김원필 선생은 ‘1920년 한인대학살 당시 연길현에서 일병에게 사살당해 순국’으로 기록돼 있다. 김정필도 ‘일명 <원필>로 1920년 연길현에서 만주학살시 일병에게 피살’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보훈처가 한 사람(김원필)의 공적을 놓고 두 사람에게 서훈을 준 것으로 의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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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국가보훈처 서훈자 명단에서 김원필 선생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보훈처 공훈록에 따르면 김원필 선생(미상 ~ 1920. 11. 3)은 김정필과 같은 해인 1991년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공훈 내용에는 “중국 동삼성 일대에서 독립군 및 국민회 부회장으로 항일활동을 하던 중 1920년 11월 3일 일제의 한인대학살 당시 연길현(延吉縣)에서 일병에게 사살당해 순국”한 것으로 돼 있다.

대전 김정필과 사망연도(1920년)는 물론 ‘연길현에서 만주 학살 시 일병에게 피살'(한국독립사)됐다는 김정필의 기록과도 거의 일치한다. 보훈처가 김원필 선생의 공적을 근거로 이름만 같은 김정필에게 까지 이중으로 서훈을 줬다는 의심을 갖게 하는 대목이다.


이런 의문에 대해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공식적으로 서훈 취소를 요청해 올 경우 관련 자료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2015-08-04>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제 증조부 김정필은 독립유공자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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