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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 전쟁에 못 배우고 없는 집 자식들만 투입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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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상의 역사산책 115] 통역장교 리영희가 겪은 6.25 전쟁의 속살


▲ 설악산 신흥사 보제루에 있는 경판고. 이곳에 보관된 19종 269점의 경판들이 전쟁 중에 살아남았다. (사진=문화재청)

1951년 겨울 한겨울의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어느 날. 국군 제11사단 9연대의 임시 연대본부가 숙영하기 위해 설악산 신흥사 경내에 주둔했다. 바쁘게 움직이는 부대원들 사이에 호리호리한 몸매에 빛바랜 군복을 헐겁게 입은 한 청년 장교가 천천히 경내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는 태어나서 이렇게 큰 사찰은 처음 보았다.

22살의 이 청년장교는 이 연대의 통역장교로 미군 고문관과 함께 전선을 누비고 다녔다. 그는 추위에 언 몸을 녹이려고 불을 피우고 있는 병사들 무리로 비집고 들어갔다. 그는 이글거리고 있는 불속을 무심코 바라보다 깜짝놀랐다.

“장작이나 나뭇가지를 태우는 줄 알았더니 귀중해 보이는 목판들이 타고 있는 거 아닌가?”

그는 곧바로 연대장을 찾아가 상황을 설명했다. 연대장도 심각하게 알아듣고 곧바로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즉시 불을 끄고 경판들을 한 조각까지 빠짐없이 꺼내 원위치에 갖다놓아라.”

병사들은 일단 물을 부어 불을 끈 다음 타다 만 조각까지 본당의 왼쪽에 있는 판고에 차근차근 도로 꽂아놓았다. 이렇게 해서 19종 269점의 귀중한 경판들이 전쟁 중에 살아남았다.

이 젊은 장교는 전쟁이 끝난 후 언론계와 학계의 중진이 되어 우리나라 사상계에 큰 영향을 미친 고 리영희 한양대 교수이다.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 등의 저서가 반공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붙잡혀간 지 2년 만인 1980년 1월9일 광주교도소에서 출소한 리영희 교수 (사진=한길사 제공)


리영희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많은 장병들은 38선을 넘으면서부터 ‘적지’라는 생각이 앞서, 모든 것이 ‘노획’의 대상처럼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장작으로 전락해 불속에서 타고 있는 경판이 유서깊은 사찰에 보관되어 있으니 당연히 잘 보존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렇게 행동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한 불교인은 이렇게 평가했다.

“그것은 그때 부처님이 어린 육군 중위 리영희의 모습을 빌려서 나타나 불구덩이에서 경판을 건져낸 것입니다.”

◇ 사찰을 노략질한 국군의 행태를 준엄히 꾸짖은 스님

리영희 중위의 부대는 신흥사를 떠나 낙산사를 거쳐 고성의 검봉 인근에 주둔했다. 그는 연대장과 수석고문관 퍼트남 소령과 함께 건봉사를 들렀다. 99칸을 자랑하던 왕년의 대사찰은 미군의 폭격을 받아 주춧돌만이 남아 있을 뿐 자취도 없었다. 완전한 파괴였다.

일행은 폐허가 된 경내를 걷다가 후미진 한 구석에 건물을 발견했다. 마당을 앞에 두고, 한 길이 넘는 높이의 돌담 위에 기와집 한 채가 단정히 놓여 있었다. 갑자기 그 집에서 문소리가 나더니 사람이 나타났다. 리영희와 퍼트남은 조건반사적으로 벽에 붙어 권총을 빼들었다.

돌담 위에 서서 군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인물은 40세 가량의 승려였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잘 오셨습니다. 저는 국군이 이곳에 어서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승려는 총을 든 군인의 위세에 조금도 눌리는 기색도 없이 머리 높이 담 위에 서서 말을 건넸다.

“제가 국군을 기다린 까닭은 약하고 불쌍한 사람들의 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새벽에 온 군인들은 우리들이 아무리 설명하고 간청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의 식량을 싹 털어갔습니다. 그것을 본 동료 스님들은 마음을 돌려 어디론가 떠나버렸습니다. 이래서야 어떻게 국군을 믿고 스님들이 절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승려의 음성이나 어조는 차분하면서도 진지했다.

“두 분은 계급이 높은 분 같으니 우리의 식량을 되찾아주십시오. 식량만 찾으면 나는 무슨 고생을 하더라도 국군 아래서 건봉사에 남아 혼자서라도 끝까지 절을 지키다 죽을 생각입니다.”

말이 끝나자 퍼트남 소령이 담 쪽으로 다가가 사과의 말을 하고, 부대방에게 일러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해 보겠다고 약속했다. 승려의 낯이 누그러지더니 합장을 하고 조용히 집으로 들어가버렸다.

리영희와 고문관은 승려에게 약속한 대로 노력했지만 승려들의 식량은 끝내 빈 곳간에 돌아오지 못했다. 며칠간의 전투가 끝나고 건봉사 터로 돌아왔지만 그 승려는 떠나고 없었다.

당시 리영희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스님이 높은 돌담에서 내려오지 않고 자기의 믿는 바를 두려움 없이 총을 든 군인에게 토로할 수 있었던 것은 목숨을 버릴 큰 각오를 했기 때문이다. 피냄새를 맡은 무장군인들 앞에서 고립무원의 알몸으로 그럴 수 있는 용기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잔잔한 호수의 수면처럼 고요한 그의 표정 뒤에 있을 바다같이 깊고 넓은 깨달음의 세계가 없었다면 가능했을까?”

◇ 전선에 학교깨나 다닌 청년들은 어디가고 불쌍한 젊은이들만 보이나?


▲ 향로봉 북쪽에서 수도사단과 제11사단은 견고하게 진지를 구축해 놓고 저항하는 북한군을 공격하는 동안 많은 사상자를 낳았다.

이영희 중위가 속한 연대는 건봉산 서남쪽으로 계곡을 사이에 두고 적이 점령한 ‘884고지’를 뺏는 전투에 들어갔다. 며칠 사이에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대대 거의 대부분이 당한 것이다.

그런에 이 공격대대의 임모 대대장은 병을 핑계로 대고 후방본부에서 부하들의 죽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도장을 파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의 평소 취미가 도장 파기였다. 그는 작전명령이 하달된 날 ‘병가’를 낸 것이다.

연대 작전과에는 며칠 전에 배속된 김모 소위가 있었다. 얼굴은 빤들빤들하고 생전 햇볕을 쬔 적이 없이 자란 하얀 얼굴을 가졌다. 이 장교는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짐을 챙겨 가지고 인사도 없이 서울에 간다고 산을 내려가버렸다.

소문에는 서울의 군 지휘부에 가까운 친척이 있어 전속명령이 내려졌다는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최전선에서 전투 경력을 쌓기 위해 며칠 동안 연대급 부대로 보내졌던 것 같았다.

이런 도피하는 자들의 빈 자리에 매일같이 보충되어 올라오는 신병들이 있었다. 모두 투박하고 땡볕에 그을린 얼굴이었다. 리영희 중위는 좁은 산길 옆에서 한 보충병 부대의 대열을 세우고 물었다.

“중학교 이상 다니던 사람 손들어봐?”

100여 명 가운데 3명만 손을 들었다. 리영희는 훗날 회고했다.

“학교깨나 다닌 젊은이들은 다 어디 가고, 이 죽음의 계곡에는 못 배우고 가난한 힘없는 이 나라의 불쌍한 자식들만 보내지는가? 나라 사랑은 힘없는 자들만 하는 것인가?”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15일, 고무신을 신은 신병들이 훈련소에서 목총을 들고 사격 연습을 하고 있다. 옷차림 등을 볼 때 시골에서 강제 징집된 청년들이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1965년 여름, 전역해 기자로 일하는 이영희는 지금의 세종문화회관인 시민회관 앞에서 부하들을 사지에 보내놓고 꾀병으로 도망친 후 도장을 파고 지내던 대대장 임 중령과 마주쳤다. 개기름이 흐르는 얼굴에 몸은 더 뚱뚱해져 있었다.

“아~ 이거 20연대의 임 중령 아닙니까? 뭐하고 지내십니까?”

내 질문에 그는 시민회관 현관 위에 걸린 커다란 플래카드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국군파월촉진국민대회’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그는 큰 종이에 쓴 명함을 건넸다. ‘국군파월촉진국민대회 부의장’이라고 씌어 있었다. 리영희가 신문사 기자라고 밝히자, 그는 요란하게 악수하면서 말했다.

“마침 잘됐어요. 신문들이 적극 협조해주시오. 내가 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애국운동이니까요. 월남파병이 최고의 반공입니다.”

신문사로 돌아가면서 리영희는 혼자 중얼거렸다.

“아~ 당신은 뒤에서 도장만 파고 이번에도 남의 자식들을 사지에 몰아 넣는구나. 애국하기 위해 죽는 자와 영화를 누리는 자… 애국심이란 무엇이며 누구의 독점물일까?”

[참고문헌] 리영희 저작집 <역정 – 나의 청년시대>


<2015-08-04> 노컷뉴스

☞기사원문: “왜 이 전쟁에 못 배우고 없는 집 자식들만 투입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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