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로 창조해냈지만 실제에 근접한 ‘암살’ 속 인물은?
▲ 영화 <암살>의 한 장면 | |
ⓒ 쇼박스 |
해방 70년을 맞는 시점에서 3일 7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암살>의 흥행 열기가 뜨겁다. 무엇보다 친일파를 단죄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미완의 역사를 완성한다. 역사가 못한 일을 영화가 대신하는 셈이다.
물론 허구적으로 창조한 인물을 중심으로 빚어낸 이야기지만, <암살>은 일제 치하에 있던 1930년대를 배경으로 실존했던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모습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인물 하나하나에 다양한 사람이 투영돼 있어 더욱 흥미를 끈다. 실존했던 사람들을 압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등장인물은 어떤 사람을 투영해 놓은 것일까? 김구나 김원봉 등 실존했던 인물 외에 영화의 중심인물을 보면 개연성이 있는 인물이 여럿 떠오른다. 당시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모습이 다양하게 담겼기에 창작된 이야기임에도 허구로만 보기 어렵다.
다양한 친일파 역사를 하나의 인물로 압축해 놓은 강인국
가장 먼저 친일파 강인국은 광산채굴권을 얻어 부를 축적한 것으로 묘사된다. 비행기 10대를 헌납하고 작위를 기대하는 모습도 엿보인다.
이와 비슷한 모습의 일제 강점기 대표적 광산 재벌은 방응모와 최창학이었다. 방응모는 1924년 금광업에 뛰어들어 큰 부를 얻었고 이후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했다. 그는 1933년부터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까지 조선일보 사장을 역임했다.
▲ 영화 <암살>의 친일파 강인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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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반민규명위·위원장 성대경)가 내놓은 ‘3차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보고서’는 방응모 <조선일보> 전 사장은 일제의 지배와 침략을 찬양한 잡지 <조광>을 발행하는 등 일제에 적극 부역했다고 밝히고 있다. 1933년에는 거액의 고사기관총 구입 비용을 일제에 헌금하기도 했다.
최창학 역시 금광을 개발하여 부를 축적한 인물로 여러 친일단체에 적극 참여했고, 일제에 거액의 국방헌금을 헌납하여 전쟁물자를 지원했다. 하지만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기부 액수가 상당했다고 전해진다.
비행기를 헌납한 대표적 친일파는 인촌 김성수의 동생 김연수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5년 8월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경성방직 사장이었던 김연수는 비행기 1대 값인 10만 원을 헌납했다. 게다가 조선항공공업회사를 차려 비행기 공장을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방응모와 함께 언론계의 대표적 친일파인 <동아일보>의 설립자 인촌 김성수는 일제의 작위를 받은 경력은 없으나 언론 매체에 징병과 학병을 선전, 선동하는 글과 일제의 침략전쟁 승리를 위해 총력하자는 글을 수차례 기고했다.
관동군에 체포돼 밀정으로 변절한 염동진과 친일 경찰 노덕술
▲ 영화 <암살>의 한 장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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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을 연출한 최동훈 감독은 변절자로 나오는 염석진에 대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나중에 밀정이 된 염동진을 모델로 했다고 밝힌 바 있다. 미 육군 문서에 따르면 염동진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일본 관동군 헌병대에 붙잡혀 이후 밀정 노릇을 했다. 해방 이후에는 극우 테러조직 백의사를 조직하기도 했는데,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 역시 백의사 단원이었다.
<암살> 속 염석진은 해방 후 경찰 간부로 있다. 반민특위에 체포돼 재판을 받는다. 재판이 끝난 후 경찰 간부들이 도열해 맞이하는 모습에서 상당한 위치에 올라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대표적인 친일 경찰 노덕술과 유사하다. 노덕술은 일제 치하에서 경찰에 입문해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고 고문해 숨지게 했던 악질 민족반역자다. 해방직후 평양경찰서장을 역임했고, 월남해서는 경찰의 요직을 거쳤다.
그는 영화 속 배경과 마찬가지로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됐는데, 당시 청부업자를 고용하여 “반민특위 간부들을 암살하라”고 지시한 음모가 밝혀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승만의 비호로 석방됐고, 이 과정에서 반민특위는 와해됐다.
노덕술은 1947년 약산 김원봉을 ‘남로당이 주도한 파업에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체포해 빨갱이 두목이라며 뺨을 때리고 모욕하기도 했다. 평생 독립운동을 해왔던 약산 김원봉은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에게 겪은 수모에 사흘을 꼬박 울며 원통해 했다고 한다. 김원봉이 이후 북한에서 열린 납북협상에 갔다가 북에 남은 이유로 전해지고 있다.
임정 연락소 백산상회, 친일파 단죄의 임무는 여전히 진행형
▲ 영화 <암살>의 한 장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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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의 저격수 안옥윤과 비슷한 활동을 펼친 여성독립운동가로는 남자현이 있다. 각종 자료에 따르면 남자현은 3.1 운동 때 적극적으로 시위운동에 참가하고 만주로 망명, 서로군정서에 참가하여 활약했다.
그는 ‘여자 안중근’으로 불렸는데, 1925년에 일제의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재등실)의 암살을 기도하고 거사를 추진하였던 것에서 비롯됐다. 거사는 미수에 그쳤고 남자현은 일경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만주로 돌아갔다.
남자현은 1928년 만주 길림에서 김동삼, 안창호 등 47명의 독립 운동가가 일본의 사주를 받은 중국 경찰에 검거되자, 석방 운동에 힘써 보석으로 풀려나게 했다. 1931년 김동삼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도 탈출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1933년 만주 괴뢰정부 건국일(3월 1일)에 이규동 등과 함께 일본 장교 부토 노부요시를 살해하려고 폭탄과 무기를 가지고 가다가 체포됐다.
임시정부 경성연락소인 아네모네 카페는 백산 안희제의 백산상회를 떠오르게 한다. 임정첩보36호로 활동했던 안희제 선생은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경영하며 각종 정보 수집과 임시정부 운영자금을 지원했다. 또한 서울과 대구, 원산, 안동, 봉천 등지에 지점과 연락사무소를 설치해 활동 폭을 넓히며 임정의 임무를 수행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 속사포와 황덕삼, 하와이 피스톨과 영감 등은 그 시대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며 일제에 맞서다 희생된 독립운동가의 모습이었다. 일본 총독 사이토를 죽이려다 종로경찰서에 투탄을 김상옥, 감상환 등을 비롯한 국내와 만주 등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했던 사람들이 투영돼 있다.
▲ 영화 <암살>의 한 장면. 해방의 소식을 듣는 순간 옛 동지들을 생각하며 빈잔을 술을 따르는 김원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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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에서 해방을 맞이하는 순간 김원봉은 “너무 많이 죽었어요. 사람들에게서 잊히겠죠”라고 말한다. 그는 작은 술잔에 불을 붙이며 독립운동을 하다 죽은 동지들을 추모한다여기서 <암살>은 “잊지 말자”고 강조한다. 험난한 과정을 통해 독립을 이뤄낸 이 땅의 역사를, 그리고 친일파들의 만행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암살>은 알려주고 있다. 친일파 단죄의 임무는 해방 70년이 된 지금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2015-08-05>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