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될 줄 몰랐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암살’(감독 최동훈)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들은 대사였다. 어떻게 변절할 수 있냐는 질문에 해방될 줄 몰랐으니 그랬다는 대답이었다.
사실 당시를 기억하는 많은 어르신들에게 비슷한 말씀을 들어본 적 있다. 일본이 전쟁에서 이길 줄 알았다고. 패전 소식은 충격이었다고. 물론 이러한 상황 판단이 반드시 영화 속 인물처럼 친일적 행보로 이어진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필자가 이런 얘기를 들을 수 있었던 어르신들은 1920년대 이후에 태어나신 분들인데, 대부분 해방 직전 시기에 학생이었다. 그분들의 기억에 따르면 학교에서 늘 틀어주는 뉴스영화, 문화영화 등을 통해 전쟁 소식을 접했고, 뉴스 내용대로 당연히 이기고 있는 줄 알았다고 한다.
요즘처럼 다양한 매체를 통해 해외 소식을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으니, 통제 하에 제작되는 신문과 라디오 뉴스, 뉴스영화 등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일본의 승전을 예상하고, 동시에 해방은 점점 가망 없는 일로 보이게 했을 것이다.
한국영상자료원에 보존 중인 영화들 중에는 조선총독부가 제작한 뉴스영화와 문화영화들도 있다.
VOD 서비스로도 볼 수 있는 이 영화들을 보면, 일본군은 전쟁에서 점령지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입성하며 승승장구 하고 있고, 온 국민들은 기꺼이 참전하거나 허리띠를 졸라 매며 동참하고 있다. 쌀과 금비녀 등을 기꺼이 내놓으면서.
오늘은 당시 영화, 영화인들에 대해 간략하게 얘기하며 ‘친일 영화인’에 대해 생각해 볼까 한다.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1941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일본과 한국은 모두 전시체계로 돌입했고, 영화를 비롯해 읽을거리, 볼거리, 들을 거리 등은 모두 전쟁 참여 홍보에 동원되었다. 강력한 검열은 물론 영화계의 경우 영화사 통폐합 등 다방면의 통제가 이루어졌다.
외국영화 수입을 점차 통제하다가 1942년 이후에는 일체 수입이 금지된다. 국내에서는 오로지 일본과 국내에서 제작된 영화만 상영 가능했다.
그렇다면 국내 영화제작사에게는 좋은 기회가 왔던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 1937년 특별세를 제정해 영화 촬영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필름 가격이 20% 인상되었다. 여기서 20%는 일본으로 수입되어 들어올 때 징수되는 세금이었다. 한국으로 들여올 때에도 추가로 세금이 붙었기 때문에 국내 제작사의 제작비 압박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일제강점기 연간 국내제작 극영화 편수는 10편 안팎 수준이었다.)
그나마도 1942년 국내 모든 영화제작사와 배급사는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라는 조선총독부 산하 회사로 통폐합되면서, 해방 전까지 국내에서 활동하는 영화제작사는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뿐이었다. 이곳에서만 극영화와 뉴스영화, 문화영화 모두를 제작, 배급했으니 모든 영화는 친일적 성향을 띨 수밖에 없었다. 훌륭한 일본의 신하 국민으로서 기꺼이 전쟁에 참전하고, 돕자‘라는 주제로만 영화가 제작되었다. 그리고 1943년부터는 일본어로만 영화 제작이 가능해졌다.
그렇다면 당시 이 영화들에 참여한 영화인들은 어떻게 평가해야할까? 예를 들어 ‘조선해협’(감독 박기채, 1943)에서 이미 장남이 전사한 집안의 막내아들이 군용열차를 타는 것을 일장기를 흔들며 배웅하면서 자랑스럽다는 말을 일본어로 하는 아버지 역할을 맡은 배우는 과연 친일 인사인가? 이 영화를 연출한 감독은? 촬영감독은?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는 영화계 인사도 포함되어 있는데, ‘조선해협’에 참여한 인사들은 감독, 스태프, 배우 모두 사전에서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사실 1940년대 제작된 영화에 이름을 올린 이들의 이름이 대부분 찾아진다. 영화계를 떠나지 않은 이상, 자격심사도 받아야했고, 제작되는 영화는 모두 친일적 내용뿐이었으니 말이다. 당시 극영화의 경우 연간 5편 안팎이 제작되는 정도라서 그 인원이 그리 많은 것은 아니지만.
영화 ‘사랑과 맹서'(1945)/한국영상자료원
영화 ‘사랑과 맹서'(1945)/한국영상자료원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전과 직후 모두 활동한 인사들 중 최인규 감독은 ‘태양의 아이들(원제:太陽の子供達)’(1944), ‘사랑과 맹서(원제:愛と誓ひ)’ (1945), ‘신풍의 아이들(원제:神風の子供達)’(1945)을 연출했다. 그리고 해방 후 국내 첫 장편극영화인 ‘자유만세’도 연출했다. 독립운동가가 주인공인 항일영화였다. 1년 사이에 큰 변화가 생긴 셈이다. 당시에도 ‘자유만세’를 통해 친일영화 참여에 대한 일종의 면죄부를 얻으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있었다고 한다.
영화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친일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당시 현실 속에서,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친일영화에 참여했던 영화인들 역시 대부분은 활동을 지속했다. (최인규 감독은 한국전쟁 직전까지 활동을 지속했고, 이후 납북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해방될 줄 몰랐다”, “현실에 적응해야 했다”, “먹여 살려야할 가족이 있다”와 더불어, “그 당시 영화 일을 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다른 영화들은 제작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라고 대답을 했었을까?
광복 70주년이 다가오고 있지만, 여전히 친일 청산의 과정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는 사실은 두고두고 안타깝다. 과거를 인정하고, 사과하고, 참회하고, 또 처벌하고, 용서하고, 화해하는 그런 과정 없이 신뢰감과 유대감이 생길 수 있을까?
누구누구를 대를 이어 응징하자는 식의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로 과거를 덮거나, 공으로 과를 혹은 과로 공을 덮지는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 ‘암살’속 독립운동가가 무모한 임무를 왜 시도하느냐는 질문에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고 답한 것과 마찬가지로, 최소한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려지고, 알아채는 세상을 바란다.
송영애 서일대학교 영화방송예술과 외래교수
<2015-08-08> 세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