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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으로 본 현대사](44)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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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노 대통령은 볼셰비키” 색깔론, “국회 표결 절차상 하자” 맞서


■ 노 대통령 탄핵의 정치심리학


분명히 이긴다고 자신했던 대통령 선거에서 뜻밖에 역전패한 한나라당의 낭패감, 당이 공천한 대선 후보(노무현 대통령)가 당선 후 새로운 여당(열린우리당)을 만든 데 대한 새천년민주당의 배신감, 이런 요소들이 복합되어 야당은 새로 등장한 노무현 정권을 그 출범 초부터 백안시했다. 노 대통령 취임 열흘쯤 되었을 때부터 ‘탄핵’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는가 하면, 취임 반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 제1야당 대표가 “이 사람이 대한민국 대통령인가? 나는 솔직히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정이다. 대통령 잘못 뽑았다”고 그야말로 솔직하게 털어놓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들의 탄핵 의도는 노 대통령의 ‘실정(失政)’ 이전부터 점화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야당 측의 이런 저의와는 별개로, 노 대통령의 탄핵사태 대응에 아쉬움을 보이는 의견도 있었다. 즉 그의 실언이나 과오가 과연 탄핵을 받을 정도의 사안이었나 하는 것과는 별개로, 탄핵 시비가 벌어졌을 때 노 대통령이 이를 진화하려는 노력을 왜 적극적으로 기울이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다(홍서여, <미추의 말과 글로 본 대한민국 근현대사>, 팝샷, 2015). 국민 여론의 역풍에 놀란 야당에서는 탄핵안을 둘러싸고 사과, 철회 등 후퇴론이 나와 자중지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두 번 죽는다’는 의견이 강세여서 기존의 밀어붙이기를 유지하기로 했다.


이런 양측의 불퇴전의 한판 대결 속에서 4·15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결과는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전체 의석 299석 중 152석을 차지함으로써 원내 제1당으로 약진했다. 이른바 탄핵 역풍에 야당 후보들은 추풍낙엽이 된 것이다. 한나라당은 16석을 잃는 정도로 끝났지만, 민주당은 한자릿수의 의석으로 몰락했다. 자민련에서는 비례대표 1번인 김종필 총재가 낙선해 정계 은퇴를 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일러스트 | 박건웅


■ 헌재의 신속 심리에 ‘총선 출마’ 내세운 불만도


헌정사상 처음으로 기록될 대통령 탄핵심판사건의 첫 공개변론은 2004년 3월30일 오후 2시, 윤영철 헌법재판소장 등 9명의 헌법재판관들(주심 주선회 재판관)이 대심판정에 입정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청구인(국회 측 소추위원) 대리인단과 피청구인(소추를 당한 노 대통령) 대리인단이 단하 양편에 포진해 이 탄핵 심판의 무게를 짐작하게 했다. 소추위원(국회 법사위원장 김기춘) 측 대리인은 강재섭, 권영세, 민병국, 박상천, 박희태, 안동일, 안상수, 오세훈, 원희룡, 이사철, 이시윤, 이진우, 임광규, 정기승, 정형근, 진영, 최연희, 한병채, 홍준표, 황우여, 김용균 변호사 등 67명이었다. 피청구인(대통령) 측 대리인은 유현석, 하경철, 이용훈, 이종왕, 박시환, 한승헌, 양삼승, 강보현, 조대현, 윤용섭, 김덕현, 문재인 변호사 등 12명이었다.


개정 벽두에 윤영철 재판장은 피청구인인 대통령이 불출석함에 따라 변론을 연기하고, 다음 2차 변론을 사흘 뒤인 4월2일에 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 기일에는 피청구인 본인이 출석하지 않더라도 심판절차를 진행하겠다고 예고했다. 신속한 심리 진행으로 조속히 사건을 마무리짓겠다는 헌재의 방침이 엿보였다. 이에 대해 소추인으로 나온 김기춘 의원은 변론기일이 너무 촉박하다며, 자신이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기 위해서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점을 감안해달라고 했다. 그는 또 탄핵 소추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대통령이 출석하지 않은 것은 헌재의 권위를 무시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피청구인 대리인단에서 피청구인의 출석은 방어권 보장 차원의 것이지 의무는 아니라고 반박하는 등 초반부터 예민한 공방이 오갔다. 김 소추위원은 다음 변론기일의 변경을 재삼 요구하면서 “17대 총선의 후보 등록과 선거운동을 하자면 다음 기일 출석이 어렵다”고 했다. 67명이나 되는 대리인단이 있는데도 그런 이유를 내세워 심판을 미루려는 것은 하나의 지연작전으로 보였다. 물론 그의 신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일부 방청인들의 빈축을 샀다는 기사가 나왔다.

■ 촛불시위 영향 있으니 총선 뒤에 심리하자고


헌재 심리(공개 변론) 2차 기일인 4월2일, 청구인 대리인 측은 1) 김기춘 소추위원이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출석할 수 없고, 2) 이 재판이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3) 촛불시위로 인하여 탄핵에 대한 국민들의 열기가 재판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변론기일을 총선 이후로 연기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재판장은 예고한 대로 변론을 진행한다고 말했다. 양측의 대리인(변호사)들은 준비된 ‘진술요지’에 의해 변론을 했다. 재판장은 피청구인 측 대리인들의 석명 요구를 받아들여, 국회에서 의결된 탄핵소추에 없는 사유가 소추위원 의견서에 탄핵 사유로 기재된 차이가 있는데, 이처럼 소추위원 임의로 탄핵소추 사유로 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재판부에서 판단하겠다고 입장 정리를 했다(헌법재판소 2004 헌나 1 사건, 2차 변론조서).


청구인 측은 노 대통령의 신문, 중앙선관위와 대통령 측근 비리 증인 29명의 소환, 그리고 광범한 기록 검증, 문서 송부 촉탁, 사실조회 등 엄청난 증거 신청을 했다. 이에 대해 피청구인 측 대리인단은, 탄핵 심판은 국회에서 사실조사와 증거조사를 거쳐 의결한 탄핵 소추가 헌법과 법률에 합치되는지의 여부를 법률적으로 판단하는 재판이므로 탄핵 심판 절차에서는 탄핵소추의 기초가 되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증거조사는 엄격히 제한되어야 한다고 맞섰다. 국회가 탄핵소추 의결 전에 마땅히 했어야 할 증거·사실 조사를 헌재에 와서 시작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반박이었다.

이런 논쟁으로 그날 재판은 장장 6시간 동안 강행군을 하게 되었다. 변론 연기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청구인 측 대리인들은 이미 제출되어 소송 절차상 ‘진술 간주(看做)’가 된 60여쪽의 의견서와 답변서를 새삼스럽게 전문 그대로 장시간에 걸쳐 읽어 내려갔다. 재판부의 제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 ‘법보다 밥’이라고 한 노 대통령은 ‘볼셰비키’


4월9일 열린 3차 변론에서는 청구인 측의 이모 변호사가 노 대통령을 ‘볼셰비키’라고까지 매도하는 발언을 해서 장내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그의 말을 정확히 재생하면 이러했다. “(노 대통령은) 부산시장으로 입후보한 선거에서는 ‘법, 법 하지 마라. 내게는 법보다 밥이 훨씬 중요하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볼셰비키혁명의 기초가 되는 유물론 철학의 표현이다”(제3회 변론조서). 듣고 있던 재판장이 “이 사건과 관련된 변론을 해달라”고 주의를 줬지만 그는 계속 색깔론을 이어갔다.


4차 변론에서는 청구인 측의 신청에 따라 노 대통령의 측근 최도술(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안희정(전 노무현 대선캠프 정무팀장) 두 증인에 대한 신문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구속된 신분으로 구치소 호송차에서 내렸다. 그런데 정작 증언대에 선 최도술 증인은 “이 자리에서 증언하는 것은 나의 형사재판에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증언을 거부한다”며 입을 다물었다. 다음 차례의 안희정 증인은 3시간 동안이나 청구인 대리인의 신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며 답변했다. 다만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수사과정에서 밝혀질 것이다’라며 진술을 거부했다.

청구인 대리인단은 증인 신문을 한다며 검찰 작성 신문조서를 그대로 읽어나가는가 하면, 탄핵소추 사유와 관련이 없는 질문을 계속하다가 피청구인 대리인들의 항의와 재판부의 주의를 받기도 했다. 6차 변론(4월27일)에서는 검찰의 내사기록 송부 거부와 관련된 논란이 오갔으며, 30일에는 최종 변론 공판이 열렸다. 먼저 청구인 측에서 김기춘 소추위원이 모두발언을 하고, 이어 정기승 변호사가 탄핵의 법리에 대해 변론한 데 이어 임광규·조봉규·안동일 변호사가 변론을 했다. 그들의 변론은 이미 자세히 언급된 탄핵소추의 정당성을 부연, 재론하는 내용이었다.

■ 이 건 탄핵소추의 위법 부당성-피청구인의 입장


이에 피청구인 대리인 측에서는 하경철 변호사가 탄핵절차의 부당성을, 이용훈 변호사가 소추 사유의 부당성을, 그리고 유현석·한승헌 두 변호사가 탄핵사건 심판의 역사적 의미 등 마무리 변론을 분담했다.


여기에서, (지금까지 미처 언급하지 못했던) 피청구인 측의 탄핵 본안에 대한 반대 주장을 총괄하면 이러하다. [1] 이 건 소추절차에 하자가 있다. (1) 국회는 소추 의결을 함에 있어서 탄핵 사유를 피청구인에게 통지하지도 않았고, 해명이나 진술의 기회도 주지 않았다(헌법상의 적법절차 원칙 위반). (2) 국회는 소추 안건에 대한 제안 설명과 질의 토론도 전혀 없이 표결을 하였으며, 여러 탄핵 사유를 마치 하나의 사유인 양 포괄하여 표결하였다. 탄핵 사유에 대한 충분한 조사도 없었다(국회법 위반). [2] 탄핵 사유가 부당하다. (1) 선거법 위반 부분; 1) 피청구인은 공무원이자 정치인이라는 2중의 지위를 갖는 바, 탄핵소추에서 문제 삼은 기자회견 답변은 대통령의 직무집행이 아닌 정치인으로서의 답변이었다. 따라서 탄핵 사유가 될 수 없다. 2) 기자의 질문에 대한 피청구인의 답변은 특정 후보의 당락을 위한 적극적·능동적 발언이 아니었기 때문에 선거운동이 아니다. 3) 피청구인의 발언은 선거 중립 의무를 위반한 것이 아니다. 대통령은 정치활동과 정당활동을 할 수 있는 정치적 공무원이므로 선거법 제9조 1항의 적용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그 내용이 선거에 부당한 영향을 미치는 발언도 아니었다. (2) 측근 비리 관련 부분; 탄핵 사유에서 내세우고 있는 측근 비리는 피청구인의 행위가 아니며 피청구인이 교사, 방조 또는 어떤 행태로도 관여한 바가 없는 일이다. (3)경제 파탄 부분; 거대 야당의 ‘발목 잡기’로 피청구인의 국정철학을 제대로 펼쳐볼 수가 없었으며, 정책문제는 헌법상 탄핵 사유가 될 수도 없다. (4) 이 건 탄핵소추 사유 자체가 대통령을 탄핵할 만큼 중대하고 명백한 위법행위도 아니다.

<2015-08-09> 경향신문

☞기사원문: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44)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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