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논평

[선언문] 광복70년, 역사와 헌법을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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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70, 
역사와 헌법을 다시 생각한다
자유, 평등, 민주 그리고 평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의 선언
. 해방 70년을 맞이하며 . 백년의 큰 계획, 교육
. 대한민국 헌법과 그 정신 . 격변하는 동아시아 질서
. 청산하지 못한 친일잔재 .  평화통일을 향한 노력
.  민주주의와 인권 .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회를 향해
.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Ⅰ. 해방 70년을 맞이하며


2015년 8월 15일은 우리 민족이 일본제국주의의 가혹한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된 지 70년이 되는 날이다. 일제가 조선 침략의 포문을 열었던 1875년 운요호(雲揚號)사건으로부터 70년이 지난 1945년에 우리는 해방을 맞이하였고, 그로부터 다시 70년이 흘렀다. 1945년 이전의 70년이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반침략 민족해방운동의 시기였다면, 해방 이후의 70년은 냉전체제에 편승한 권위주의 폭압에 저항한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시기였다.


봉건세력과 외세의 침탈에 맞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다. 농민군의 반봉건·반침략 투쟁은 의병전쟁으로 계승되었으며, 전국적인 의병들의 대일항쟁은 일본의 식민지화 정책에 타격을 주어 강제병합을 지연시켰다. 1919년의 3·1운동은 혁명적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그 결실인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거족적인 요구를 수렴하여 민주공화제를 선포함으로써 처음으로 국민주권의 시대를 열었다. 이를 계기로 우리의 민족해방운동은 민주주의운동과 불가분의 관계로 전개되었다. 1941년 임시정부는 대일선전포고를 앞두고 해방 후 건설할 민족국가의 방향을 제시하는 <건국강령>을 발표하였다. 임시정부를 단일한 민족협동전선체로 재편하여 항일대오를 공고히 하고 나아가 곧 맞이할 해방에 대비하기 위한 지침이었다. 이후 조선민족혁명당이 임시정부에 가담함으로써, 민족해방운동 진영 내의 이념적 갈등과 조직적 분열을 넘어 좌우세력이 연합한 통일전선정부의 토대가 마련됐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었으나 식민지배는 분단이라는 부정적 유산을 우리 민족에게 남겨 놓았다. 미소 양군이 남한과 북한에 각각 진주한 것은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이다. 민족분단은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냉전이 열전으로 분출한 첫 사례인 한국전쟁은 내전에서 국제전으로 비화하였으며, 종전이 아닌 정전으로 일단락되었다. 한국전쟁은 38도선을 다만 휴전선으로 바꾼 채 막을 내렸다. 전쟁의 와중에서 발생한 인적 물적 피해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하고 참혹하였다. 한국전쟁은 한국 현대사에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긴 민족 최대의 비극이었다. 또한 남과 북이라는 지리적 분단을 고착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민족과 사회 내부도 적과 동지로 분단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한국전쟁의 후유증은 심각하였다. 그 여파로 우리 사회에 권위주의체제가 들어서고, 자유민주주의의 외피를 쓴 ‘냉전반공주의’가 횡행하였다. 자유민주주의는 기본적 인권의 존중, 권력분립의 원리, 의회제도, 복수정당제도, 민주적 선거제도, 사유재산제와 시장경제를 공공복리에 적합하게 운영하는 경제질서, 사법권의 독립 등을 구성요소로 하는 정치원리이다. 그러나 해방 이후 우리 사회에 ‘통념화한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자율, 다원성과 다양성의 존중을 기본으로 하는 본래적 의미의 자유민주주의와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었다. 역대 독재정권이 조직적으로 수행한 오랜 세뇌의 결과, 자유를 반공으로 민주주의를 반공주의와 동의어로 오용하는 개념 실종이 일반화하게 된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를 냉전반공주의와 동일시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상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잇따른 개헌으로 헌정질서를 유린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짓밟으면서 장기집권한 독재자인 이승만과 박정희를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로 포장하는 아이러니한 현실이 이를 반증한다.


식민지배와 분단이 남긴 후과는 한국사회의 정상적인 발전을 가로막는 질곡으로 여전히 기능하고 있다. 오랜 기간 친일세력에 기반한 독재정권이 냉전체제에 기대어 헌법을 유린하고 권력을 농단하였다. 그러나 각성한 민중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엄혹한 시기에도 1960년 사월혁명,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의 6월민주항쟁과 노동자대투쟁 등을 통해 권위주의 통치체제를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진전시켜 왔다. 지금 비록 일시적으로 역사의 퇴행이 일어나고 있지만, 우리는 “역사는 반드시 진보한다”는 신념을 함께 하며 나아갈 것이다. 이제 해방 70년을 맞이하여 한반도에서 자유, 평등, 민주, 평화의 물결이 넘쳐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를 희망한다. 이를 위해 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하여 제정된 제헌헌법과 민주화운동의 이념을 바탕으로 개정한 현행 헌법에 담겨있는 핵심가치들을 재조명하여 대한민국이 지향해야 할 시대정신으로 삼고자 한다.

Ⅱ. 대한민국 헌법과 그 정신

우리 민족은 국내외에서 줄기차게 전개한 독립운동과 연합국의 군사적 승리에 힘입어 마침내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독립운동의 역량이 나라를 되찾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지만, 독립운동 진영이 일관되게 추구한 바 공화주의와 평등주의라는 전통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데 이념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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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출범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임시헌장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 하여 ‘제국에서 민국으로’ 대전환하였음을 선포하였다. 왕정복고를 거부하고 인민이 주인인 민주공화국을 수립하였음을 확실히 표명한 것이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법이 다섯 차례 개정되었지만, 민주공화국을 지향하는 원칙은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다음으로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임”이라 하여, 새로 건국할 민족국가의 방향이 평등사회 건설에 있음을 천명하였다. 평등주의 이념은 독립운동 세력의 건국 구상에서 대세를 이루었으며, <건국강령>이 이를 대변하였다. <건국강령>이 표방한 평등주의는 대일 선전포고를 앞둔 시점에서 좌우를 망라한 모든 독립운동세력이 합의한 미래사회의 준칙이었다.


공화주의와 인민주권, 평등주의를 핵심 가치로 한 독립운동 이념은 제헌헌법에 지대한 영향을 주어 대한민국의 기본가치가 되었다. 제헌헌법은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첫째, “기미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였다고 선언하여, 대한민국의 탄생이 연합국의 승리가 가져다 준 선물이 아니라, 3·1운동과 같은 위대한 독립운동 정신을 계승하여 줄기차게 일본제국주의와 투쟁한 결과라고 하였다. 제헌헌법이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라고 하여, 친일청산을 민족적 과제로 삼은 것도 이러한 역사의식의 발로였다.

둘째, 대한민국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한다고 천명하였다. 제헌헌법은 형식적·정치적 민주주의가 경제적 불평등을 해결하지 못한다고 보고, 실질적·경제적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적·경제적 민주주의를 채택하였다. 경제적 민주주의의 수립은 대한민국 헌법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셋째, 대한민국은 복지국가의 원리를 수용하였다. 제헌헌법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 사회적 시장경제질서를 수용하였으며, 교육을 받을 권리, 근로권, 근로자의 이익분배균점권, 생활유지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보호받을 권리 등 사회적 기본권을 폭넓게 부여하였다. 재산권의 사회적 기능을 강조하기 위해, 소유권의 사회적 의무와 계약자유의 제한 등을 규정하였다. 이는 사회권과 복지국가의 이념을 제시한 바이마르 헌법의 영향과 함께 제국주의의 착취와 억압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독립운동의 전통을 계승한 정권이 들어서지 못함에 따라, 제헌헌법은 대한민국의 최고 규범으로서 실효성을 발휘하는 ‘규범적 헌법’이 아니라 허울뿐인 ‘명목적 헌법’이 되고 말았다. 친일세력을 기반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승만 대통령은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설치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물리력을 동원해 해체시킴으로써 친일파 청산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좌절시켰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제일 먼저 서울을 빠져나간 그는 자신의 재선을 위해 한창 전쟁 중이던 1952년의 위기상황을 아랑곳하지 않고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켜 발췌개헌을 감행했다. 이어 종신집권을 위해 불법적인 사사오입개헌까지 강행함으로써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독재자의 길로 들어섰으며, 부정선거를 일삼다 끝내는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시민 학생들의 피어린 ‘4월혁명’으로 권좌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재집권이나 정권연장의 수단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자행한 헌법 개정은 훗날 박정희 대통령이 삼선개헌을 하고 유신헌법을 제정하는 등 헌법을 경시함에 나쁜 선례가 되었다.


1987년 6월민주항쟁으로 해방 이후 반 세기가량 군림해 왔던 권위주의체제가 무너졌다. 이 항쟁은 멀리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1919년 3·1운동, 가깝게는 1960년 사월혁명과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등의 자주와 독립,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투쟁을 계승했다. 오랜 기간에 걸친 민주항쟁의 결과로 1987년 개정된 현행 헌법의 역사적 규범은 다음 세 가지다.


첫째,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독립운동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친일청산이 역사적 과제임을 거듭 천명하였다.

둘째, 이승만 독재의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 박정희의 군사쿠데타와 독재에 대한 국민적 저항권을 인정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강조하였다.


셋째,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실현을 사명으로 한다. 평화통일을 민족의 기본과제로 부여하였다.


대한민국 헌법은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정신 계승을 기본이념으로 하면서 민족의 통일이 역사적 과제임을 천명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지난 100여 년간 분투해온 탈식민과 탈냉전의 정신이 헌법에 오롯이 담겨있는 것이다.

Ⅲ. 청산하지 못한 친일잔재


1945년은 해방의 해이자 동시에 분단의 해이기도 하다. 1945년 8월 15일 찾아온 해방의 기쁨은 잠시뿐이었고 해방은 곧 분단으로 이어졌다. 2차세계대전 후 형성된 냉전 체제는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화했다. 해방과 함께 의당 청산되었어야 할 친일파는 분단구조에 편승해 기득권을 지키는 데 혈안이 되었다. 독립운동세력은 분단을 극복하고 자주적인 통일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온힘을 기울였지만 한반도의 남과 북에 별개의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3·8선으로 인한 지리적 분단이 남북 단독정부 수립을 계기로 정치적 분단으로 이어지고 더 나아가서는 한국전쟁이라는 미증유의 동족상잔을 겪으면서 이념적 분단으로까지 증폭되었다. 분단 체제로 인해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과정에서 반드시 이루어졌어야 할 민족의 과제는 방기되었다. 무엇보다 친일청산이 그러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20년에 이미 죽여 마땅한 ‘칠가살(七可殺)’을 정한 바 있으며, 친일파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1941년에 제정한 <건국강령>에서는 “부적자(附敵者)의 일체 소유자본과 부동산을 몰수”한다고 선언한 데 이어, 해방 직후에는 친일파의 공민권을 제한할 것을 결정하기도 했다. 즉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친일파 청산을 건국과제 가운데 하나로 설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뿐만 아니라 모든 독립운동세력이 친일파 청산을 주장했다. 그리고 해방 후에도 거의 모든 정치세력이 친일파를 처벌하자는 데 동의하고 있었다. 이는 이 땅에 살고 있던 일반 민중들의 여망이자 시대정신을 반영한 것이었다.

해방 직후 한반도를 둘러싼 냉전과 민족 내부의 이념 갈등으로 시대적 과제인 친일파 청산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1948년에 출범한 반민족행위처벌특별위원회의 좌절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반민특위의 와해와 한국전쟁은 친일파들의 전면적인 복권을 앞당기는 촉매제가 되었다. 친일세력은 반공을 앞세워 지배층으로 부상했고 각 분야를 장악하고 분단체제와 독재정권을 공고히 하는 데 동력을 제공했다. 충성의 대상을 천황에서 독재자로 바꿈으로써 그들의 권력은 일제 때보다 오히려 더 굳건해졌다.
이승만정권이 저지른 3·15부정선거도 해방 직후 친일청산이 좌절한 데서부터 비롯되었다. 부정선거에 적극 참여한 원흉은 대부분 친일파였다. 사월혁명 일년여에 군부쿠데타로 민주당 정권이 무너지자 친일세력들은 다시 기민하게 군사정권에 협력하는 길을 선택했다. 친일파들에게는 민족을 배신하여 사회적 가치기준을 무너뜨린 원죄 외에도 천황제 파시즘과 민간독재 군부독재에 두루 영합했다는 측면에서 민주주의에도 심각한 해악을 끼친 용서받지 못할 죄과가 있다. 정부수립 이후 단기간에 부정부패와 권력남용이 만연하게 된 것도 일제하에서부터 권력의 하수인으로 기득권을 누려온 친일파 관료·경찰·군인·지식인들과 무관하지 않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민주화의 진전이 이루어짐에 따라 국가폭력에 의한 인권침해를 비롯하여 민간인 학살 문제와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 친일청산 문제가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로 다시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른바 ‘과거청산’의 과제 중 친일청산 문제가 과거청산의 원점으로서 새삼 주목을 받게 되었다. 한국사회가 해결해야 할 ‘과거사’는 기본적으로 분단·독재체제에서 비롯된 것인데, 분단세력과 독재세력의 뿌리가 곧 친일세력이라는 인식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친일청산을 요구하는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커졌고, 그 결과 민간기구에 의한 역사적 학문적 정리가 가시화한 데 이어 국가 차원의 청산작업도 진척을 보게 되었다.

반민특위가 해체된 지 꼭 60년만인 2009년에 주목할 만한 성과가 있었다. 먼저 민간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가 시민의 성금으로 4,389명의 친일인물을 수록한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였다. 국가가 진작 완수했어야 할 민족사의 과제를 시민들의 힘으로 해결한 것으로,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과거사청산 작업이었다. 이어 국가기구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명의 명단을 확정하여 국회에 보고하고 대한민국 관보에 게시하였으며,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가 친일재산을 환수하여 독립운동 선양사업에 사용하게 됨으로써, 미흡하나마 국가가 친일파의 역사적 책임을 규율하는 효과를 거두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 구세력의 재집권으로 극우세력이 득세하면서,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친일청산 작업마저 정파적 발상으로 폄훼하고 그 성과를 부정하려는 기류가 노골화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친일파를 옹호하고 합리화하는 데서 나아가 공공연하게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동상을 건립하는 등 반역사적 행태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친일청산이 민주주의의 진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해방 70년을, 내적으로는 친일문제, 한국전쟁기의 민간인 희생자 문제, 독재정권하의 인권유린 문제와 밖으로는 일본군 ‘위안부’를 비롯한 강제동원 피해문제, 베트남에서 자행된 반인도적 인권문제 등 ‘과거청산’ 과제를 재점검하고 해결에 착수함으로써 역사정의를 실현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Ⅳ. 민주주의와 인권

일제로부터 해방된 직후 우리 사회가 직면한 민주주의의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좌우갈등과 남북분단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반공세력으로 변신한 친일세력이 국가권력을 장악한 상황에서 우리 민주주의가 출범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랫동안 이승만 반공독재와 박정희 개발독재, 그리고 전두환의 신군부독재를 겪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를 향한 우리의 열망은 1960년의 사월혁명과 1980년의 광주민주화운동, 그리고 1987년의 6월민주항쟁으로 분출했고, 이 과정에서 축적된 역량은 마침내 우리 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1987년 민주화 이후 2015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28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우리 민주주의와 인권의 현실은 어떠한가? 우선 정치적인 차원에서 민주개혁과 인권향상이 있었고, 노골적인 국가폭력과 억압도 줄어들었다. 표현의 자유는 확대되었으며, 진보정당 또한 출현했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 이러한 진전은 지체되고 후퇴하는 양상까지 보이고 있다. 특히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에 들어 민주주의와 인권 상황은 오히려 역주행하고 있다. 이를테면 정치검찰의 교묘한 통제와 국정원의 불법적인 정치 개입은 더욱 증대하고 있으며, 정권과 보수언론의 여론 조작은 표현의 자유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민주주의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근본적인 위기가 다시 조성되고 있는 시점이다.

한국은 압축적 산업화를 통해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그 결과 우리는 해방 직후 최빈국의 지위에서 현재 OECD 선진국의 한 일원으로 도약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경제위기 이후 우리 사회는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확대되는 가운데 우리 사회의 불평등이 날로 심화되고 급속히 양극화하는 현실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경제성장 과정에서 각종 특혜에 힘입어 급성장했던 재벌과 대기업의 영향력은 더욱 강화되고, 서민과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지고 있는 것이 우리가 당면한 현실이다. 

민주개혁과 인권상황이 역행하고 있는 가운데 정경유착의 거대한 기득권만이 강화되고 서민과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들의 삶이 위협받고 있는 이 같은 사태에 직면하여,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더욱 커지고 있다. 2010년 지방선거를 계기로 등장한 무상급식에 대한 요구를 시작으로 경제민주화와 일자리 창출, 그리고 복지에 대한 전반적인 강화가 시대적인 과제로 제기되었다. 2012년 대통령선거에서 여야 후보 모두 경제민주화와 복지사회 실현을 선결 공약으로 제시한 것도 이러한 흐름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약속을 이행해야 할 당사자는 2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또한 작년에 발생한 세월호 참사는 국가의 무능, 무책임과 함께, 생명과 안전을 무시하고 성장과 효율 제일주의로 매진해왔던 우리 사회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요컨대, 이러한 현상들은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사회, 즉 평등과 인간다운 삶, 인간의 존엄이 보장되는 그러한 사회로의 이행과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변화의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내야 할 정치는 과거의 인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 무능과 무기력을 드러내고 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일에만 급급한 보수세력은 과거 회귀의 구태를 반복하고 있으며, 대안 세력이 되어야 할 민주 진보세력 역시 미래의 전망을 적극적으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우리의 민주주의와 인권은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특히 그것을 진전시킬 동력인 정치의 퇴행은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이처럼 정치가 무능하고 무기력하게 된 배경에는 국민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될 수 없는 제도의 결함이 자리잡고 있다. 현재의 불합리한 선거제도는 기득권세력의 이익만 보장함으로써 대의민주주의의 본질을 훼손하고 정상적인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사회 각계각층과 다양한 집단의 이해가 제대로 반영될 수 있도록 선거제도의 개혁이 반드시 필요하다. 한편으로 대의제 민주주의가 갖는 본질적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주민발의와 주민소환 등 시민들의 직접적인 정치행동을 활성화할 제도와 정치의식의 개선 또한 절실한 과제로 다가온다.


해방 70년을 맞이하여, 우리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후퇴를 저지하고 이를 다시 전진시키기 위해 새로운 시대를 향한 일대 전환의 계기를 만들어내야 한다. 자유, 평등,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평화를 지향하는 우리의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정신은 대한민국임시정부 헌장과 제헌헌법 그리고 1987년 개정헌법을 통해 지금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특히 2016년으로 박두한 총선과 2017년의 대선은 진정한 의미의 민주공화정을 정착시킬 수 있을지 가늠하는 잣대가 될 전망이다. 

Ⅴ.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일제에 의한 수탈과 착취로 빈곤과 도탄에 빠졌던 한민족에게 해방은 주권의 회복이자 새로운 사회로 변전하기 위한 출발점이었다. 그 새로운 사회의 요체는 자주적이고 자립적인 경제체제를 확립하고 그 속에서 민중의 삶이 윤택하여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의미한다.

새 사회 건설을 위한 해방공간의 주장들은 분단으로 인한 한반도 경제권의 분리, 식민경제 유제의 미청산 등으로 빛이 바래기 시작했다. 여기에 3년간 이어진 한국전쟁은 국민경제를 위한 최소한의 토대마저 붕괴시켰고, 민생은 참담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런 열악한 기반 하에서도 지난 70년 동안 우리 국민들의 희생과 헌신, 용기와 지혜 그리고 교육열에 힘입은 수준 높은 노동력은 세계인들이 부러워할 정도의 경제적 성과를 이룩하였다. 초근목피의 생존유지형 경제수준에서 일인당 국내총생산 3만 달러를 바라보고 있으며, 국민총생산 규모나 무역규모에서 세계 10위 안팎에 달하는 위상을 가지게 됐다. 신흥독립국에서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하였으며, 원조수혜국에서 원조공여국으로 전환한 최초의 성공적 사례라는 평가가 그것을 입증하는 단적인 예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경제와 민중의 생활을 들여다 볼 때 70년 전에 꿈꾸었던 그 새로운 사회에 가까워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특히 지난 시기의 ‘개발독재’와 ‘압축성장’은 통제불능의 재벌권력을 창출하였으며, 그 부작용이 심대하였음에도 제대로 된 재벌개혁은 한번도 단행된 적이 없었다. 경제민주화를 국정 기본과제로 내걸고 ‘적폐’ 청산을 약속했던 박근혜 정권도 그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버렸다. 오늘날 재벌들이 부와 경영권 승계를 둘러싸고 ‘형제의 난’, ‘왕자의 난’ 등 추태를 서슴지 않는 현실이 웅변하듯 우리 경제가 세습자본주의의 늪에 빠지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재벌공화국’, ‘삼성공화국’이라는 냉소적인 평가를 받을 정도로 10대 재벌, 30대 재벌이 한국경제의 부가가치 중 대부분을 점하고 있어 중소기업과 그 종사자들의 지위는 결과적으로 열악하며, 이들 재벌과 대기업의 이윤창출방식은 매우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가운데 경제력의 집중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특히 1990년대 말 외환위기를 겪은 이후에 자본의 힘은 노동계층에 대한 분배를 더욱 축소시키고 있으며,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 노동자와 중소기업 노동자, 남성노동자와 여성노동자 간에 차별을 확대시켜 경제적, 사회적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청년실업의 책임을 노동자에 전가하는 정권의 노동정책은 지금도 열악하기 그지없는 노동조건의 안정성을 뿌리째 흔들고 있는 상황이다.

각종 사회 현상은 노동계급의 삶이 얼마나 곤궁한지 잘 보여주고 있다. 비정규직의 확대로 인해 노동권은 보장받지 못하고 삶의 질은 점점 나빠지고 있다. 하나의 직업으로는 최저생계비도 채우지 못하는 사람들과 굴뚝 위에서 장기간 고공농성을 할 수밖에 없도록 직장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노동권을 탄압하기 위해 도입된 천문학적인 ‘파업손실 책임 재산가압류’는 가정을 파괴하고 심지어 사람의 목숨까지 빼앗는 지경에 이르렀다. 반인륜적인 제도가 법이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행사되고 있음에도 우리 사회는 문제를 해결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있다. 청년들 또한 직업을 통해 사회에 참여할 기회가 박탈됨으로써 경제적 곤궁과 더불어 자존감을 상실하고 있어 우리의 미래를 더욱 암담하게 하고 있다. 

좀 더 나은 소비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중산층의 생활수준도 따지고 보면 세계 최장노동시간과 최고의 산업재해율, 높은 노동강도를 대가로 누리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생활 욕구라 할 수 있는 주거, 의료, 교육, 양육, 노후 등은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 경제성장의 성과물을 정의롭게 분배하고 향유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구축하기보다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처세법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국민들의 고단하고 피폐한 삶은 출산율 세계 최저수준, 자살율 세계 최고수준이란 현실에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우리는 과거 독립운동 세력들이 꿈꾸었던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향한 열망과 의지를 다시 한번 되새기며, 그 핵심에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가 있음을 확인한다. 

경제민주화란 국민에게 주권이 주어지는 민주주의의 신성한 원리가 경제권에도 실현되는 경제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뜻한다. 이는 곧 국민대중에게 정당한 분배의 몫과 참여의 권리를 보장하고 재벌과 대기업 권력, 투기자본의 횡포를 민주적으로 견제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통제불가능할 정도로 고삐가 풀려 있는 정글자본주의 독재체제를 발본적으로 개혁하고, 정경유착과 불공정한 경기규칙을 개선함으로써 새로운 경제혁신의 동력과 국민대중의 삶의 활력이 선순환을 이루는 민주적이고 사회적인 시장경제의 길을 열어야 한다.
복지국가란 불가피하게 등장하는 시장의 실패와 폐해, 그로 인한 사회적 위기와 위험들을 국가가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인간다운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사회안전망을 구축한 체제를 말한다. 사회권적 기본권의 보장과 확대는 공민권과 참정권과 더불어 시민권의 핵심 요소로서 진정한 자유와 공동체적 연대성, 평등의 가치가 실현될 수 있는 조건이라 할 것이다.


해방 70년을 맞이하여, 경제에 대한 민주적 통제 강화와 경제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재벌과 대기업에게 유리한 경제운영 방식을 개혁하고, 사회권을 확대하여 사회구성원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경제민주화와 보편적 복지국가라는 헌법정신의 구현은 지금은 물론 앞으로 이 땅에서 살아갈 사회구성원들에게 물려줄 가장 값진 선물이 될 것이다.

Ⅵ. 백년의 큰 계획, 교육

시대와 사회에 따라 교육의 이념과 목적은 다를 수 있으나, 사회적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것을 돕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일은 공통된 과제일 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역시 국가건설의 기본방향을 설정할 때 교육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임시헌장 3조에서 민족국가의 기본 방향을 평등사회 건설에 있다고 선언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안으로 삼균주의를 제시했다. 정치균등(均權), 경제균등(均富)과 함께 교육균등(均智)을 신민족국가 건설 방략으로 적시한 점은 선구적인 인식의 반영이었다. 임시정부는 나라를 되찾으면 평등사회 실현을 위해 의무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인간의 주체성을 말살하는 식민지 노예교육에서 벗어나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갖춘 완전한 국민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하겠다는 확고한 입장을 갖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제시한 교육이념은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조선인을 일본제국주의에 동화시키기 위해 동원했던 권위주의적이고 강압적인 교육방식과 통제 중심의 인적·물적 유산들이 청산되지 못한 채 해방 이후 교육체제에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군사정권이 장기간 지속함에 따라 군사문화적 요소들이 식민지 유제와 결합하여 통제 중심의 관료적 교육체계와 병영적 학교문화를 고착화시켰다.

수출과 교육으로 국부를 조성하자는 박정희정권의 정책은 학교교육을 산업인력의 확보를 위한 도구로 변질시켰다. 1968년의 ‘국민교육헌장’은 천황제 파시즘과 군사문화가 기괴하게 결합한 국가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교육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현재 학교의 구조나 교육 운영체제는 일제강점기의 그것과 유사하다. 국가권력의 교육내용에 대한 직접적 개입과 간섭은 교육 현장의 자율성을 끊임없이 침해하고 있으며, 운동장과 조회대(朝會臺), 교문지도, 빈번한 국민의례, 근절되지 않는 체벌, 교장을 정점으로 한 수직적인 학교 권력 구조 등은 민주시민의 양성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최근 각급학교에서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성희롱 문제 역시 학원에 깊숙이 스며든 권위주의 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민주화가 진전됨에 따라 교육의 이념도 “홍익인간의 이념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하여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데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진화 발전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 도입된 신자유주의 이념의 무차별적 공세에 교육부문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으며 도처에서 부작용과 왜곡현상이 일어났다. ‘수요자 중심의 교육’ 정책은 학생을 위한 교육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긴 하나, ‘수요’와 ‘공급’이라는 경제용어를 그대로 차용한 데서 드러나듯이 교육에 시장 논리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것이었다. 시장경제 논리가 교육정책의 기저가 됨에 따라 자본에 의한 통제와 획일화가 강화되어 교육현장은 더욱 황폐화하고 있다. 전인교육 인문정신은 이제 한갓 구두선으로만 남아있으며, 학교는 경쟁일변도의 나락으로 끝없이 침몰하고 있는 중이다.

교육에 잔존한 비민주성과 신자유주의 경제 논리는 우리의 교육 현실을 매우 비인간적이고 비교육적인 형태로 바꾸어버렸다. 교육 관련 지표들이 우리 교육의 참담한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동의 삶의 만족도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최하위이며 청소년 자살 증가율도 최고 수준이다. 자살의 주요 원인은 경제 파탄이 야기한 가정불화나 과중한 학업 스트레스에 있다. 교육의 질을 담보하는 학급당 학생 수와 지방교육재정 교부 수준은 열악하며, 정부의 공교육 예산 부담 수준 역시 OECD 평균 수준에 크게 못 미친다. 민중은 경제난 속에서 의료비와 주거비에 더해 사교육비를 감당하느라 몸부림치고 있다. 유예된 행복을 미래에도 기대할 수도 없는 갑갑한 현실 속에서 민중의 주름살은 깊어지고 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설은 이미 먼 옛날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소득불평등이 교육불평등을 확대하고, 다시 교육불평등이 소득불평등을 확대하는 악순환 구조가 굳어지고 있어 계층간 상승이동을 어렵게 하고 있다. 소득 격차의 확대와 각종 특권학교의 난립으로 교육의 기회균등이라는 원칙이 무너진 것이다. 뭇사람들은 공공연하게 부와 학력 그리고 직업이 세습되는 신분제 사회의 재림을 말하고 있다.


교사들 역시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신자유주의 교육 재편에 동반되는 교사에 대한 공격적 정책과 전산화 및 전시행정에 따라 폭증한 행정적 업무로 교사는 학생들과 만날 시간을 빼앗기고 교육자로서의 자존감에 큰 상처를 입었다. 성과급과 교원평가 등 경쟁주의 교원정책은 교사들을 교육 혁신의 주체로 세우지 않고 객체로 내몰았으며, 교육 관료와 정치가들이 져야할 정책 실패의 책임을 교사들에게 전가시키는 경향마저 두드러진다. 강화된 시장주의 교육정책과 함께 최근에는 권위주의적 경향까지 확대됨에 따라 교육현장의 자율성이 심각하게 침해되고 있어 매우 우려스럽다. 심지어는 한국사교육마저 국가가 주도해 정권의 입맛대로 개악하겠다는 시대착오적인 정책을 집요하게 관철시키려 하고 있다. 현재 정부와 여당이 추진하고 있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움직임이 그러하다. 교육을 정권의 한낱 전리품 정도로만 여기는 어리석음의 발로인 것이다. 단언컨대 백년지대계라고 하는 교육에 대한 원모심려를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실정이다.


현재 우리 교육은 일본제국주의와 장기 군사독재가 남긴 부정적인 유산들을 청산하는 데 소홀했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여기에 더해 신자유주의 경제논리가 결합함으로써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비교육적이고 기형적인 교육체제를 형성하고 있다. 가혹한 입시경쟁 서열화교육은 청소년의 자주적인 사고의 성장과 자연스러운 발달을 저해하고 있으며, 교육주체들의 인권을 억압한다. 교육은 민중에게 행복을 가져오는 복지가 아니라 고통을 가중시키는 짐이 되어버렸다. 교육은 더 이상 사회적 이동의 기회를 주지 않으며 기존의 불평등 구조를 합리화해줄 뿐이다. 배려와 공감을 토대로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야 할 교육이 타인을 경쟁과 배제의 대상으로 여기게 하는 교육으로 전락해버렸다. 교사들에게 정치적 자유와 시민적 권리, 그리고 노동기본권을 온전히 보장하는 과제는 교육 부문에서 과거의 잔재를 털어내고 혁신의 돌파구를 마련하는 데 관건이라 할 수 있다.

한반도 공동체가 현재와 미래에 가장 심혈을 기울여야 할 분야는 ‘백년 대계’인 교육이다. 해방 70년을 맞아 지금까지의 교육을 반성하면서 미래의 새사회를 향한 교육의 획기적인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자녀들을 무한경쟁으로 몰아넣는 교육현실을 지양하고 각자에게 주어진 창의성을 한껏 발휘할 수 있도록 가정과 학교, 사회간의 유기적인 협력을 모색하고 아이들에게는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을 계발하여 공동체를 섬기는 자로 성장하도록 인성교육을 강화하고 입시제도와 사회적 관행도 고쳐야 한다. 작금의 권위주의에 기초한 교육정책을 개혁하여, 교육에 대한 공공성을 강화하고 교육 현장의 자율성을 보장하도록 정책을 전환해야 한다.

Ⅶ. 격변하는 동아시아 질서

해방 70주년을 맞이한 올해는 2차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이자 한일협정 체결 50주년이며, 6·15 공동선언 15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한반도는 대륙과 해양의 정세변화에 민감한 영향을 받아왔다. 대륙의 판도가 바뀌거나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충돌할 때 한반도는 어김없이 큰 소용돌이에 휩쓸리곤 했다.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 미·소 냉전기의 사례를 보더라도 강대국의 각축 속에서 주권을 잃거나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겪은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현재의 동아시아 정세는 한반도가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던 한말의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2015년 3월 서울에서 미국과 중국의 외교관리들이 한반도의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문제를 두고 충돌했던 일도 한반도가 처해 있는 지정학적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은 자국의 국가이익을 앞세워서 ‘2차세계대전 종전 70주년 외교’를 벌이고 있지만, 한국의 외교는 수동적으로 끌려가고만 있다. 거기에다 최근 미일방위협력지침을 개정하고 평화헌법을 무력화시켜 다시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나아가려고 하고 있는 일본이 주변사태에 대한 대응이라는 명분으로 오래전부터 자위대의 한반도 상륙을 구상해 오고 있는 사실도 한반도 나아가서는 동북아시아의 안전에 큰 위협을 주고 있다. 

동아시아의 이러한 급변에 대해서 한국정부는 무기력하게 대처하고 있다. 기껏 일본이 한반도에 군대를 파견할 때는 한국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만 말하고 있다. 한반도의 안보와 관련된 사안에 대해 일본에게 엄중한 경고를 보내지 않고 오히려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어 매우 우려스럽다. 박근혜 정부는 군사주권인 전시작전권 회수를 연기해 가면서 국방문제를 미국에 의존하는가 하면, 국회의 동의도 회피해가며 일본과 군사정보보호협정을 체결했다. 게다가 대일 외교에서 전략과 전망 없이 무기력하게 대응한 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 역시 무능한 외교정책을 펼치고 있다. 한일 국교정상화 50년을 맞아 “과거사의 짐을 내려놓자”며 내놓은 박근혜 대통령의 대일외교 신호는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박근혜 정부의 갑작스런 화해 신호가 결국 일본의 군사력 강화에 튼튼한 징검다리를 놓아주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면할 길 없다.


2015년은 남북관계와 동아시아 정세에서 또 한 번의 고비가 되는 해이다. 아시아의 평화와 한반도의 화해협력이 정착되는 기회로 만들기 위한 첫단추는 남북관계 개선이다. 하지만 김정은 정권의 출범 이후에도 ‘전략적 인내’라는 미국의 대북정책에는 변화가 없다. 북한은 핵실험이나 전쟁위기 조성 등 정세를 긴장시키는 불안한 행보를 보이면서도 남북관계에 대통로를 열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으나, 박근혜 정부는 공허한 대북정책을 되풀이하면서 한반도 상황을 주도하지 못하고 있다. 2015년 벽두부터 무성했던 남북 정상회담 소식은 현실화하지 못한 채 말로만 끝나버릴 전망이다. 한반도가 강대국들의 분쟁지역화하는 비극을 막으려면 최소한 남북대화의 단절은 어떻게라도 피해야 할 선택임에 틀림없다.


남북관계는 정체되어 있고 동아시아 정세는 격동하고 있는데, 우리는 해방 70주년을 몇 가지 이벤트만으로 허비하고 있다. 남북관계를 개선하여 한반도를 대륙이나 해양의 변방이 아닌 유라시아와 태평양을 연결하는 가교로 재창조하겠다는 구상은 여전히 ‘구상’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환황해경제권과 환동해경제권을 중심으로 해서 북방 네트워크를 구축해 나가는 것이 새로운 성장동력을 창출하는 길이라는 데에 많은 국민들이 희망을 걸고 있다. 환황해권과 환동해권의 활성화는 한반도가 강대국의 각축장이 되는 위기를 막고 동아시아에서 협력적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지경학’(geoeconomics)적인 접근이라 할 수 있다.
한반도의 분단상황은 대한민국을 사실상 고립된 섬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를 해소하고 동북아의 교류 협력을 확대해 나가기 위해서, 나아가 유라시아 대륙과 태평양을 연결시키는 허브라는 21세기 한반도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남북관계의 정상화와 긴장완화 외에는 달리 해법을 찾을 길이 없어 보인다.

Ⅷ. 평화통일을 향한 노력


분단 70년을 맞이하였지만 남북관계는 역사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고 있는 상황에 처해 있다. 우리가 맞이하는 해방 70년이 이처럼 공허하기만 한 것은 6·15 공동선언 이후 착실하게 발전해오던 남북관계가 지난 몇 년 동안 퇴행을 거듭하더니 마침내 냉전시대의 대결적 남북관계로 돌아가고 말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통일운동은 민주화와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사월혁명 직후인 1961년과 6월민주항쟁 직후인 1988년에 통일운동이 활성화된 사실이 이를 입증해 준다. 사월혁명 이후 시작된 통일운동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10년도 지나지 않았고 더구나 전쟁을 종료하지 않은 정전 상태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통일을 향한 국민들의 염원이 그 만큼 간절했다는 증좌라 할 수 있다.


분단체제의 고착화를 막기 위한 통일논의는 5·16 쿠데타로 중단되고 분단체제는 1987년 6월민주항쟁 때까지 더욱 강고해졌다. 6월민주항쟁으로 형성된 ‘87년체제’는 철옹성만 같았던 분단구조에 공간을 만들어냈으며 박정희·전두환 집권기 내내 억압받던 통일운동은 1988년부터 다시 분출되기 시작했다. 사월혁명 이후의 통일 열망이 반공을 제일의 국시로 내건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수면 아래로 잠복했던 것과는 달리, 6월민주항쟁 이후의 통일운동은 지속적으로 진행되었으며, 분단50년인 1995년을 ‘통일원년’으로 만들자는 목표를 설정하고 대중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통일운동은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노무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별로 남북간 민간차원의 교류운동으로 발전했으나,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하에서는 그 민간교류마저도 철저히 차단 봉쇄되고 있는 상태이다.


6·15 남북공동선언은 1972년 7·4 공동성명과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의 정신을 계승하여 남북통일을 지향하는 한반도 평화와 화해협력의 방향을 합의한 선언이었다. 국제정세의 변화에 맞춰 북방정책을 추진한 노태우 정부는 북한을 평화와 통일의 ‘동반자’로 받아들이면서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하였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은 김대중 정부의 화해협력정책(햇볕정책)과 노무현 정부의 평화번영정책으로 발전되었다. 2000년에 체결한 6·15 남북공동선언은 통일방도를 제시하고, 남북기본합의서의 합의사항 중 우선해야 할 실천사항을 남북 정상이 최초로 합의한 통일장전이었다. 2007년의 10·4선언은 6·15남북공동선언에 기초해 남북관계를 확대 발전시키고자 구체적 사업들을 제시한 실천강령이었다.



분단 70년 동안 민간차원에서 진행된 통일운동은 남북 정부 사이의 대화와 합의로 이어졌고, 두 차례의 정상회담을 통해서 남북관계의 평화적 발전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였다. 이후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는 남북연합을 형성해 공존공영하며 서로 왕래하고 교류 협력하자는 ‘사실상의 통일 상황’부터 실천하는 환경조건이 조성되었다. 남북 당국은 각종 회담을 통해 남북 사이의 교류협력과 평화정착을 논의하였고, 민간에서도 다양한 분야에서 남북 간 교류와 협력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에 들어와서 남북관계는 단절되고, 우리 사회에서 통일논의는 현저히 후퇴하였다. 박근혜 정부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동북아 평화구상,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DMZ 국제평화공원, 통일대박, 통일준비위원회 등 백화점식의 장밋빛 구상을 제시하였지만, 정작 이를 구체화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은 내놓지 못하고 오히려 남북관계를 냉전시대와 다를 바 없는 국면으로 악화시키고 있다.
한편 김정은 체제가 3대 세습으로 출범한 뒤 북한은 핵개발과 경제발전을 병행하는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미국도 ‘전략적 무시’라는 기왕의 노선을 고집하면서 제재를 완화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국제사회에서는 북한의 인권에 대한 문제제기의 강도를 높이고 있으며 북한은 이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간헐적으로 시도되던 남북관계의 개선 노력마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함으로써 해방 70년의 의미는 퇴색하고 미래에 대한 전망 또한 암울하게만 보인다. 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대결구도에 현명하게 대처하면서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여 평화를 정착시키고 나아가 동아시아 경제공동체를 만들어 공동의 번영을 이루기 위해서는 남북관계 개선이 첫 번째 순서이다. 남북 당국간 대화와 6자회담 복원, 평화체제 구축과 비핵화 논의, 남북 경제협력과 다방면에 걸친 교류협력의 활성화는 민족 내부의 긴장 해소는 물론 동아시아의 안정을 위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급한 선결 과제인 것이다. 


해방 70년을 맞이하여, 한반도의 군사적 대립상태를 종식하는 평화협정체제를 구축하고 남북간에는 자주 평화 민주적 이념에 입각하여 통일외교를 강화하는 등 평화통일을 위한 국내외적 여건을 착실히 준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남북 간의 인적물적 교류를 막고 있는 장애물부터 제거해야 할 것이다.

Ⅸ.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회를 향해

한국근현대사는 탈식민과 탈냉전을 위한 투쟁의 역사에 다름 아니다. 엄혹한 일제의 식민지배 아래서도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독립투사들, 정부수립 이후 수십 년 동안 이어진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하여 헌신한 민주화운동가들, 그리고 해방과 동시에 닥친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평화통일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하여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분단세력과 맞서 싸워온 통일운동가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존재한다. 어디 그분들뿐이겠는가? 비록 이름 석 자조차 제대로 남기지 않았지만 각자 자신이 서 있는 현장에서 헌신적으로 일해 온 분들의 노고가 지금의 우리를 있게 했다. 그분들이 흘린 피와 땀에 진심으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바친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앞선 세대들로부터 큰 빚을 졌다. 그 빚을 갚는 길은 명실상부한 주권 국가로서의 면모를 완성하고, 더 많은 사람이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민주주의 체제를 강화하며, 민족 분단을 극복하여 평화통일을 이루며, 나아가 이웃 나라들과 상생하면서 인류사회에 기여하는 대한민국을 만드는 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해방 70년을 맞은 2015년 현재의 대한민국의 자화상은 앞선 세대들이 꿈꾸던 모습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다. 전시작전권 문제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안보문제마저 스스로 해결할 수 없어 미국에게 의존하는 것이 OECD 국가를 자랑하는 대한민국의 민낯이다.


한편으로 온 겨레의 염원이던 친일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함으로써 친일파의 후신들이 사회 곳곳에서 기득권 세력이 되어 발호하고 있다. 이들은 과거청산과 역사정의를 실현하는 일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면서 노골적으로 이를 저지하는 데 앞장선다. 이로 인해 한국전쟁기의 민간인 학살이나 독재정권하의 의문사에 대한 진상규명은 중단된 상태이며,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은 요원하기만 하다. 이것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의 또 다른 현주소이다.


정부, 여당, 사법부, 보수언론이 한 덩어리가 되어 안보와 경제성장이라는 미명 아래 헌법의 기본 정신인 자유와 평등을 끊임없이 훼손하고 있는 부끄러운 현실도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의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면목의 하나다. 거기에 더해 어렵게 일군 남북대화의 싹이 독버섯처럼 되살아난 반공과 냉전의 논리 앞에 무참하게 짓밟혀버리는 것이 평화통일을 헌법 정신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실제 상황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한다. 해방 70년의 역사는 우리 민족의 피와 땀으로 일군 것이다. 해방 70년을 맞는 우리에게는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와 평화를 억압하는 권력과 체제를 거부하고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을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아니 단지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들이 꿈꾸었던 세상을 완성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우리들이 짊어져야 할 역사적 책무이자 소명이다.


자유, 평등, 민주, 평화를 향한 더 나은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 우리는 독립운동의 전통을 계승하여 제정한 제헌헌법과 민주화운동의 정신에 기초하여 개정된 현행 헌법에 담겨있는 핵심가치들이 대한민국이 지향해야 할 시대정신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이래 지금까지, 또 앞으로도 변함없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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