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쇠락한 항일운동 유적②] 을사늑약 역사적 현장 ‘대관정’
▲ 1890년대 대관정 사진(위)와 현재 대관정 터(아래) / 사진=민족문화연구소 제공, 이원광 기자 |
# 일제가 호시탐탐 한반도를 노리던 19세기말. 고종황제는 대한제국 반포 이듬해인 1898년 “외교만이 살 길”이라고 판단, 덕수궁 인근의 한 서양식 주택을 매입했다. 당시 ‘푸른 눈의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 박사가 지은 주택으로 서울 중구 소공동 112-9번지 일대다.
주택은 해외 유력 인사들에게 대한제국의 자주독립 의지를 피력하기 위한 ‘황실의 영빈관’으로 꾸며졌다. 황실 외교활동의 거점이자 을사늑약의 현장인 ‘대관정’의 시작이었다.
당시 대관정은 국내에 드물었던 벽돌식 서양 건축물로 해외 영빈들을 맞이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1899년 독일 빌헬름 2세의 친동생인 하인리히 황태자가 이곳에 머무르기도 했다. 대한제국 반포 이후 대관정을 방문한 가장 유력한 해외 인사였다.
그러나 황실 영빈관이 일제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1904년 일본군사령관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러일전쟁을 구실로 대관정을 무단 점령해 군 사령부로 사용한 것.
1905년 11월17일 을사늑약 당시에는 이토 히로부미와 하세가와가 이곳에 머물며 을사늑약을 지휘·조종하기도 했다. 이들은 고종황제의 거처였던 덕수궁 별채인 수옥헌과 지근거리에서 대한제국을 압박했다.
실제로 이토와 하세가와는 이날 이곳에서 직접 군사를 이끌고 수옥헌으로 찾아가 고종황제에 을사늑약 체결을 강요했다.
대관정은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체결된 을사늑약의 중요한 역사적 현장인 셈이다.
대관정의 ‘영욕의 역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927년 일제도서관 경성부립도서관이 대관정 건물로 옮기면서 황실 영빈관은 일제도서관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후 1966년 민주공화당 당사로 사용됐다는 기록을 마지막으로, 철거 시점도 알려지지 않은 채 허물어졌다.
▲ 서울 중구 소공동 빌딩 숲에 위치한 대관정 터 / 사진=이원광 기자 |
대한제국 외교의 산실이자 일제 침략의 역사적 근거가 되는 대관정은 현재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과거 대관정이었다는 건물이나 표지석도 없이 돌계단 등 터의 흔적만 일부 남았다.
서울 도심 빌딩숲 한 가운데 위치한 이곳은 1960년대 중반 이후 인근 호텔과 백화점 주차장으로 사용되다 현재는 호텔 신축 공사를 앞두고 있다. 공사를 맡은 건설사가 남은 대관정 터에 대한 발굴 작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얼마 남지 않은 터의 흔적도 아예 사라질 가능성이 적잖다.
전문가들은 대관정을 보존 없이 방치하면서 불행한 역사를 증언하고 후대에 정확히 알릴 수 있는 귀중한 유적이 또 하나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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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학계 등에서 대한제국이 자국 발전을 위해 을사늑약에 합의했다고 주장하는 것과 관련, 대관정이 이를 반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은 “대관정은 을사늑약의 불행한 역사가 담긴 현장으로 한국 근대사 100년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공간”이라며 “이곳은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장소”라고 안타까워했다.
이 연구원은 또 “현재 대관정 터는 간단한 표지석 하나 없이 개발을 앞두고 있어 후손들이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격언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2015-08-12> 머니투데이
☞기사원문: “잊지말자더니…” 관광호텔 공사장된 ‘황실 영빈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