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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에 나오는 ‘반민특위’는 왜 와해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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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상의 역사산책 118] 친일경찰이 난입해 무법천지가 된 반민특위


▲ ‘친일파’로 불리는 민족반역자의 대명사인 염석진. 반민특위가 와해되면서 법망을 피한다. (사진=영화 ‘암살’ 스틸컷)


영화 <암살>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법정에서 친일파 염석진이 교묘하게 처벌을 피하는 장면이 나온다. 재판장이 실형 대신 벌금형을 선고하면서 화가 치밀어 재판봉을 내던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 재판정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국회가 구성한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운영하는 특별재판소이다. 반민특위는 아쉽게 이승만 정권과 친일파들의 줄기찬 방해공작과 폭력에 의해 1년도 안돼 수명이 끊어진다.

반민특위가 간판을 내리면서 일제하 35년간 일본제국주의에 붙어 같은 민족을 체포하고 죽이고 재산을 갈취한 민족반역자들은 법망에서 빠져나와 백주대로를 활개치고 다니게 된다. 이들이 이승만 정권의 주축을 구성하면서 이 민족의 정의는 증발해버린다. 더러운 역사의 청산을 놓치는 순간이다.

어떻게 해서 ‘반민특위’는 와해되었나. 지난해 노컷뉴스의 <임기상의 역사산책 39>에 올린 글을 보완해 다시 그 당시 역사의 현장으로 가보자.

◇ “여기 있는 놈들 다 빨갱이다”…아수라장이 된 반민특위 사무실


▲ 4.19 혁명 당시 이승만 정권을 지키기 위해 최루탄과 카빈총으로 무장하고 출동하는 경찰


1949년 6월 6일 아침 남대문로에 있는 반민특위 사무실. 윤기병 중부경찰서장이 지휘하는 경찰관 40명이 일제히 사무실로 난입했다. 건물 주변은 기마경찰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윤기병은 장탄한 권총을 휘두르면서 소리 질렀다.

“여기 있는 놈들 모조리 끌고 가라!”

총을 든 경찰관들은 닥치는대로 특위 직원들을 붙잡아 두둘겨 패면서 쓰리쿼터(M37 트럭)에 실었다. 여기저기서 주먹과 발길질이 날라오면서 욕설을 해댔다.

“여기 있는 놈들 대부분이 빨갱이들이야~ 여긴 빨갱이 소굴이라구!”

모두 35명이 끌려 가고 통신기기와 호신용 무기, 서류 전체를 압수해갔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이 호통을 쳤다.

“이놈들아~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국법을 수행 중인 국가요원들에게 이러고도 너희들이 무사할 것 같으냐?”

윤기병이 이죽거렸다.

“최운하 과장과 조응선 주임을 진작 내주셨으면 이렇게까지 했겠습니까? 지금이라도 내놓으시면 조용히 물러나겠습니다.”

며칠 전 반민특위가 체포한 악질 친일경찰 최운하와 조응선을 풀어달라는 얘기다. 경찰은 거칠 것이 없었다. 급하게 달려온 권승렬 검찰총장 겸 특별검찰관은 권총까지 뺏기고 밀려났다.

중부서로 붙잡혀간 특위 직원들 35명은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이중 22명이 심하게 두둘겨 맞아 입원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였다. 악질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해 법에 의해 설치된 반민특위가 왜 이 모양이 되었을까?

◇ 드디어 발족된 반민특위, 악질 친일파들을 속속 체포하다


▲ 1948년 5월 31일 열린 제헌의회 개원식. 우여곡절 끝에 친일파 처단을 위한 반민법을 제정했다.


제헌의회가 구성되자 국회의원들은 이승만 정부의 반발을 무시하고 반민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반민족행위자의 범주와 처벌 규정, 특위의 구성과 활동, 특별재판부 구성을 담고 있었다.

이 법에 따라 구성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1948년 10월 12일 저명한 독립운동가이자 국회의원인 김상덕을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소식이 끊어졌다.



김상덕 위원장은 와세다 대학을 다니다 2.8 독립선언을 주도해 1년간 옥고를 치른 후 중국으로 망명해 일제 타도의 선봉에 섰던 독립투사다. 그는 경북 고령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학교를 다녔고, 중국에서 독립투쟁을 벌이다 남한에서 돌아온 후 납북돼 북한에서 여생을 보내게 된다.


▲ 1948년 10월 전남 광주에서 시민들이 반민특위 전남조사부에 설치한 투서함에 투서하는 모습이다.


반민특위는 국민들의 열화같은 성화를 업고 의욕적으로 출발했다. 반민특위가 가장 먼저 검거한 친일파는 화신재벌 총수 박흥식이었다.그는 조선비행기 공장을 세워 일제의 침략전쟁에 기여한 인물로, 해외도피를 기도하다 체포되었다.

이어 만주에서 일본 헌병의 앞잡이로 무려 250여 명의 독립투사를 붙잡아 17명을 처형한 악질 친일파 이종형을 잡아들였다. 그는 마포형무소에 수감된 후에도 “내가 감옥에 들어온 건 빨갱이를 잡는데 앞장서서 사방에 적을 만든 탓”이라고 고래고래 악을 쓰기도 했다.

이어 3.1운동 당시 33인의 한 사람이었다가 변절한 최린, 친일 변호사 이승우, 평안북도 특고과장을 지내면서 많은 독립투사를 잡아들인 악질 경찰 이성근, 고종황제의 당질로 매국 활동을 한 이기용을 구속했다. 이기용은 자택 응접실에 일왕 히로히토의 사진을 걸어놓고, 일본 왕실로부터 받은 훈장 30여개를 진열해놓아 조사관들을 놀라게 했다.

◇ 친일경찰 검거, 이승만과 경찰 수뇌부가 반격에 나서다


▲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있는 친일파들. 대부분 1년도 안되어 풀려난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25일 드디어 악질 중의 악질인 친일경찰 노덕술을 체포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전국 도처에서 독립운동가를 무차별적으로 체포해 여러 명을 고문해서 죽인 친일경찰의 상징이었다. 노덕술은 수배 중에도 번호판을 단 경찰 지프에 경호원까지 태우고 서울 시내를 활보하고 다녔다.

노덕술이 체포되자 이승만은 노기충천하여 김상덕 등 특위위원들을 경무대로 불러 그를 석방하라고 강요했다. 특위위원들은 단호히 거부했다. 국내에 지지기반이 약한 이승만은 어떻게 해서든지 친일파를 보호해 장기집권의 무기로 써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반민특위와 정부 사이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먼저 일제 경찰 출신들이 발빠르게 움직였다. 제일 먼저 반민특위 요인들을 암살하려는 음모가 진행됐다.

서울시경 수사과장 최난수와 사찰과 차석 홍택희는 테러리스트 백민태를 불러 국회의원 3명을 납치해 38도선상의 어느 지점으로 끌고 오면 그 다음은 경찰이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겁을 먹은 백민태가 검찰에 자수하면서 이 음모는 무산됐다.

친일경찰들은 급기야 법을 깡그리 무시하고 “실력으로 반민특위 특경대를 해산시키자”며 준비에 들어갔다. 습격 전날 밤 시경국장 김태선에게 계획을 전해들은 내무차관 장경근은 “앞으로 발생할 모든 사태의 책임은 내가 진다. 웃어른께서도 말씀이 계셨다”며 이승만의 사전 양해가 있음을 암시했다.

이렇게 해서 친일경찰들은 1949년 6월 6일 백주대낮에 국가기관인 반민특위를 습격한 것이다.

◇ 이어지는 소장파 의원들의 구속, 백범 암살…무산된 친일파 처단

물리력을 빼앗긴 김상덕 위원장과 특위 위원들은 사퇴서를 제출하고 자리를 떠났다. 이런 와중에 반민특위를 국회에서 지지해주던 김약수 부회장 등 소장파 의원들이 ‘남로당의 프락치’라는 혐의로 대거 구속되었다.

이어 반민특위의 정신적 기둥인 백범 김구마저 암살당하면서 ‘친일파 처단’은 물 건너가버리고 대한민국은 ‘친일파의 천국’으로 전락했다.


▲ 백범이 암살당하기 직전 화계사를 방문한 임시정부 일행. 앞줄 오른쪽 끝이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그 왼쪽이 김구 선생이다. 이들은 백범의 서거와 이승만의 탄압, 납북 때문에 다들 흩어져 버린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김상덕은 북한 내무서원들에 의해 이북으로 끌려갔다. 그 뒤의 소식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2006년 9월 3일 북한을 방문한 독립운동가 유족들에 의해 평양 용궁동에 있는 재북인사묘역에 묻혀 있다는 사실만 확인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국회에서 반민특위에 힘을 실어주던 국회의원들과 백범 김구를 제거하자마자 반민특위를 해체하고, 반민족행위와 관련된 모든 특별법을 지워버렸다. 물론 수감돼 있는 친일파들을 모두 석방하고 이들을 군과 경찰, 행정부의 요직에 두루두루 앉혔다.

이렇게 해서 한반도 남쪽이 친일파들의 수중에 떨어지자 독립운동가들의 존재는 까마득히 지워졌다.

1945년 해방이 되고 1962년 독립유공자 표창이 제대로 실시되기까지 17년동안 건국공로훈장을 받은 인물은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이시영 단 두 명뿐이었다. 이승만 혼자 받으면 비난을 받을 것 같으니까 이시영을 끼워 넣었다는 해석이 정설이다. 이것이 독립을 되찾은 대한민국의 실상이다.

그러면 4년간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한 프랑스는 어떻게 했을까?


▲ 파리가 해방되자 레지스탕스 지도자들과 함께 거리를 행진하고 있는 드골 장군.

프랑스의 수도 파리는 1940년 6월 26일 나치 독일에게 점령된 이후 4년 2개월 만인 1944년 8월 25일 해방된다. 지도자 드골 장군은 나치 정권에 협력한 자들, 우리로 치면 ‘친일파’를 철저하게 단죄하겠다고 천명했다. 전국에 ‘협력자 재판소’를 설치하고, 이들의 사회활동을 막기 위해 ‘시민재판부’까지 세웠다.

그러나 가장 먼저 처단해야 할 경찰과 군인은 이미 지구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지역마다 레지스탕스가 시민들과 합세해 8천 명~1만 명에 달하는 협력자들을 다 죽여버렸기 때문이다. 이를 ‘거리의 정의’라고 부른다. 살아남은 민족반역자 가운데 6,763명이 사형선고를, 2,702명이 무기징역을 받았다. 대한민국은 사형선고가 김덕기 1명, 무기징역은 김태석 1명 뿐이다. 그나마 1년안에 다 풀려났다.

왜 대한민국은 프랑스의 1/100도 따라가지 못했을까?

<2015-08-11> 노컷뉴스

☞기사원문: 영화 <암살>에 나오는 ‘반민특위’는 왜 와해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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