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기사

또 다른 위안부 ‘포로감시원’…그들은 왜 전범이 되었나

1809

부산 백산기념관에서 광복70주년 특별전…한국인 전범 148명 중 129명 차지

▲1943년 7월, 부산에서 촬영한 노구치부대의 교육생들. 뉴스1 윤소희 기자 News1


광복70주년을 맞아 한국 사회에 여전히 알려져 있지 않은 조선인 전범자 문제를 전시한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전범이 된 조선청년들’ 특별전이 부산시 중구 백산기념관에서 열리고 있다.

한국과 일본에 살고 있는 피해생존자들과 유족들은 일본에 강제로 끌려가 포로감시원으로 생활한 것에 대해 아직도 ‘전범’이라는 멍에를 쓰고 살아가고 있다.

일본은 시종일관 이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있다.

관계자는 “강제동원 피해 중 대표적인 미해결 문제인 일본군 위안부, 사할린 억류자, 시베리아 억류자 등과 함께 조선인 BC급 전범 문제를 부산시민에게 처음으로 알리는 이번 전시회가 피해자들의 해원의 실마리가 되기를 기대해본다”고 말했다.

1931년부터 시작된 일본의 민족말살정책.

문화통치에 이어 창씨개명, 신사참배 등을 강요하며 우리 민족을 말살하고 황국신민화하기 위해 일본은 유례없는 강력한 정책을 실시했다.

1937년 중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기세는 하늘을 치솟았다. 그로부터 4년 후, 구미열강으로부터의 아시아 해방이라는 명분으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매일신보에는 포로수용소 감시원 모집 광고가 실렸다. ‘모집! 포로감시원. 거듭되는 반도청년의 영광, 군속으로 수천명 채용’

대상은 20~25세 민간인으로 표면상은 지원이었으나 행정관리와 순사를 동원해 강제로 모집했다. 지원이란 이름표를 단 징용이었다.

▲ 동남아시아 지역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전범은 1950년 이후 차례로 일본 스가모형무소로 이송됐다. 사진은 1951년, 이송 직전 아우트램 형무소에서 촬영된 전범들의 모습이다. 뉴스1 윤소희 기자(민족문제연구소 제공) News1

1942년 6월, 김완근씨 집으로 마을 구장이 찾아와서 2년간의 포로감시원을 제안했다. 그의 부모는 농사일을 물려받을 남자가 김완근씨 뿐이라는 이유로 거절했으나 곧 일본인 순사부장이 찾아왔다.

“천황폐하의 명령이다. 불복종하면 총살하고 배급을 전부 끊겠다”

식민지 지배체제에서 자유로운 선택이란 불가능한 것이었다.

같은 해, 문제행씨는 계속되는 차별대우를 끝낼 수 있다는 생각에 포로감시원에 지원했다.

그들은 ‘노구치 부대’로 불리는 임시군속교육대로 보내졌다. 마주보고 뺨 때리기, 사격 등의 군사훈련과 정신교육을 받았다. 일제의 만행속에서 군무원인 자신들이 왜 군사교육을 받아야 하는지조차 물어볼 수도 없었다.

▲ 인도네시아 자와 섬에 근무했던 군속들(안용근 소장)한국인 군속은 완장에 별마크가 있어 인도네시아어로 붉은 별을 뜻하는 ‘빈탄부사르’로 불렸다. 당시 일본군에게 이등병보다 밑으로 여겨졌고 군마나 군견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다. 뉴스1 윤소희 기자  News1

2달간의 훈련 뒤, 그들은 인도네시아 자와 포로수용소로 배속됐다. 최하급 계급장을 달고 일본군 이등병보다 밑으로 여겨졌고 군마나 군견보다 못한 치욕스런 생활을 했다.

주된 임무는 포로감시보다 건설현장 투입이었다. 열악한 상황속에서 계속적으로 노동을 착취당해야만 했다. 일부는 포로정책의 최전선에 배치돼 일본군의 명령에 따라 포로와 접촉하고 통솔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일본이 전쟁에서 패한 후, 자연스레 전쟁책임은 한국인 포로감시원에게 집중됐다.

일본과 동맹국이었던 독일, 이탈리아 포로사망률은 4%. 일본의 포로사망률은 27%에 달했다. 전쟁에서 승리한 연합국은 일본의 높은 포로사망률로 인해 전범재판에 엄격한 태도로 임했다. 전쟁범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한국인은 148명, 그 중 129명이 포로감시원이었다. 14명이 사형되고, 115명이 징역형을 선고받는 사태가 발생했다.

▲ 전쟁범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한국인은 148명, 그 중 129명이 포로감시원이었다. 14명이 사형되고, 115명이 징역형을 선고받는 사태가 발생했다. 연합국은 식민지 민중이 처한 상황에 대해 아무런 이해 없이 식민지 조선인을 일본인으로서 심판한 것이다. 식민지 조선의 국민으로 태어나 ‘역사의 희생자’가 됐다. 뉴스1 윤소희 기자 News1

연합국은 식민지 민중이 처한 상황에 대해 아무런 이해 없이 식민지 조선인을 일본인으로서 심판한 것이다. 그들은 조국 독립의 기쁨을 느끼기도 전에 힘없는 식민지의 국민이, 전쟁을 일으킨 범인이 됐던 것이다.

식민지 조선의 국민으로 태어나 ‘역사의 희생자’가 됐다.

판결이 확정된 유기수들은 일본 스가모 형무소로 차례로 이송됐다. 옥중에서 석방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으나 기각됐다. 출소 후의 생활은 또 다른 감옥이었다. 아무런 생활기반도 없는 일본 사회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일본은 아무런 지원도 없었고, 고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전범이 돼버린 이들의 가족들은 또 다른 고통을 겪었다.

전범으로 구속돼 총살당했던 변종윤 씨의 아들은 ‘전범 아들’이라는 꼬리표가 달렸고, 또 다른 이의 아내는 남편이 전범이 된 충격으로 저수지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 뉴스1 윤소희 기자.News1

1955년 한국인 전범자와 유족은 동진회를 결성해 일본을 상대로 명예회복과 피해보상을 줄곧 요구했으나 오늘날까지 어떠한 국가보상도 받지 못했다. 사형자 유골조차도 조국으로의 송환을 거부하고 있다.

9구의 유골만 송환한 채, 5구의 유골은 도쿄에 안치돼있다. 광복 70주년이 됐지만 5구의 유골은 아직 조국광복을 느끼지 못했다.

식민지의 아들로 태어나 ‘역사의 희생양’이 되고, 일본의 전쟁책임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던 식민지 청년들. 그들은 아직도 조선의 청년으로서 일본에 성의 있는 대응을 촉구하고 있다.

girl@

<2015-08-13> 뉴스1

☞기사원문: 또 다른 위안부 ‘포로감시원’…그들은 왜 전범이 되었나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