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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열 특별기고] 해방 70년, 감격과 반성 그리고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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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1학년 때 맞은 해방, 아직도 기억이 뚜렷하다. 어른들을 따라 간 신사(神社) 마당에는 의관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시골 어르신들이 즐거움을 이기지 못한 채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홍명희의 표현처럼 “아이도 뛰며 만세, 어른도 뛰며 만세,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까지 만세 만세”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편 높직한 곳에 자리한 신사가 불탔다. 화염에 싸인 신사를 보며 일제로부터의 자유가 현실화됨을 실감하는 듯했다. 심훈이 읊었던,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바로 ‘그날’을 어린 시절 경험했다. 나는 아직도 감격과 눈물 없이는 그날을 회상하지 못한다.


주일학교에 가서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해방되었듯이 우리도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을 들었을 때, 신사 마당에서 그렇게 기뻐하시던 어르신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은 딱 거기까지였다. 만세를 부른 지 얼마 안되어 이웃 동네의 구장이 죽창에 찔려 죽었다는 소문이 들렸고, 아무개 아버지는 빨갱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서북청년단이라면서 총으로 촌맹들을 겁박하는 장면도 보았다. 이어서 6·25가 터지고 북한군이 우리 마을까지 온 것을 보았다. 말로만 듣던 분단과 전쟁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 바람에 아버지는 곧 돌아가시고 막내 자형은 납북되었으며 종형 두 사람은 전사했다. 민족사의 비극이 가족사에도 비애를 안겨주었다.


해방은 완전자주통일독립을 의미하는 광복이 아니었다. 명실공히 광복은 몇 가지를 더 충족시켜야 했다. 분단된 국토를 통일하여 정부를 세우고, 친일파와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며, 민주주의를 정착시켜야 했다.


이런 과제들은 분리된 독립변수가 아니었고 서로 맞물려 있었다. 가장 혹독한 것은 분단 문제였다. 해방정국에서 분단 구조에 편승한 친일세력과 반민주세력은 기득권을 고수했고 독재권력을 뒷받침했다. 분단을 더 심화시키면서 자신들의 부패권력도 유지해갔다. 이런 상황에서 여운형이나 김구가 자주적인 통일독립을 선결과제라 부르짖었지만 분단 구조에 편승한 세력은 이들을 제거하고 말았다. ‘적대적 공생관계’를 즐기며 분단 구조를 심화시키고 있는 남북의 세력들, 남북관계를 1970년대 이전으로 되돌린 이 정권에 대해서도 희망 만들기를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통일 과제를 포기할 수 없다면, 한반도의 지정학적 상황을 고려하여 이제 중립화통일방안을 모색할 때가 되었다.


분단이 가속화되면서 해방 이후 시급히 해결해야 할 친일 청산의 과제는 방기되어 버렸다. 친일 청산은 해방 전의 독립운동세력과 해방 후 정치세력 및 민중들이 한결같이 주장했던 것이다. 제헌헌법 부칙에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적시한 것이나, 거기에 근거해 법률 제3호로서 반민법을 제정한 것은 당시 시대정신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반민특위가 와해되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친일파들은 복권되었고 반공주의에 편승하여 지배층으로 부상했다. 이들은 “충성의 대상을 천황에서 독재자로 바꿈으로써 그들의 권력은 일제 때보다 더 굳건해”졌다. 친일세력은 이승만 정권과 군사정권을 옹호하면서 민주주의 발전을 가로막았고 부정부패와 권력남용에도 앞장섰다. 집요하다 할 정도로 친일세력을 규탄하는 것은 한국의 분단세력과 독재세력의 뿌리가 바로 친일세력이라는 역사인식 때문이다.


통계청이 제시한 ‘통계로 본 광복 70년’은 해방 후의 성장 발전을 잘 보여준다. 이런 성장 발전으로 가슴 뿌듯함을 느꼈다. 한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남을 돕는 나라로 성장한 거의 유일한 나라다. 이런 발전을 가능케 한 것은 민주화와 산업화다. 산업화가 민주화를 이끌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필자는 민주화가 산업화를 이끌었다고 본다.


인간의 자유와 창의성을 담보하는 민주화 없이는 사회 전반의 발전이 불가능하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민주화의 역사는 독립투쟁의 전통에 서 있기에 역동성을 갖는다. 동학농민혁명과 3·1혁명으로 대한민국이 건국되었고, 4·19혁명, 광주민주화운동 및 6월항쟁으로 민주화 전통이 확립되어 갔다. 자유와 창의성에 기반한 역동성은 산업화는 물론 문화와 사상도 발전시켰다. 한때 우리보다 앞섰다는 필리핀이나 공산주의권은 이 점에서 반면교사다. 앞으로의 발전도 이런 역사의 경험칙을 벗어나서는 불가능하다.


놀라운 경제성장을 보면서 노동자와 기업인,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감사한다. 그러나 성장 이면에 비쳐지는 비극적 현실은 많은 숙제를 던진다. 한국이 최근 10년 동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출산율이 가장 낮고 자살률은 가장 높으며, 청소년의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라는 것은 충격적이다. 지니계수(0.308)도 높은 편이고 실업자·비정규직 증가, 저임금, 빈곤층 확대 등 체감으로 느끼는 소득불평등은 더욱 심각하다. 이는 우리 공동체에 큰 딜레마이다.


이쯤에서 대한민국을 창건할 때 꿈꾸었던 선진들의 이상에 접근해 보자. 대한민국 임시헌장(3조)은 평등사회를 선언했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방안으로 정치균등, 경제균등, 교육균등을 규정한 삼균주의(三均主義)를 국가 건설의 최우선 과제로 제시했다. 거창한 복지국가 이념도 중요하지만 균부(均富)의 이상은 지금도 심사숙고의 대상이다. 이는 실학시대 이익이 언급한 ‘손상익하(損上益下)’나 정약용이 제시한 ‘손부익빈(損富益貧)’의 원리를 계승 발전시킨 것이다. ‘부한 자들의 재산을 덜어서 가난한 자들에게 보태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언론에 회자되는 모 재벌의 ‘왕자의 난’은 선진들의 이 같은 이상 실현이 시급함을 강조하는 듯하다.


한국이 이 정도로 성장했으면 분단을 핑계로 대지만 말고 나름대로의 세계사적 사명을 모색, 수행해야 하지 않을까. 해방 70년을 맞아, 우선 우리에게 상처로만 남겨진 식민지 경험을 자산화하여 그걸 다른 민족을 돕는 데 활용하는 것은 어떨까. 이게 식민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길이다. 지구상에는 아직도 강대국의 세력권에서 신음하는 민중들이 있다. 동남아와 중동, 최근 보트피플을 양산하는 아프리카, 과거 유럽과 미국의 제국주의 지배로 상처받았던 이들에게 식민지 민중으로서 겪은 고통과 해방 경험을 나눠주자. 지난날 우리가 겪었던 고통과 흘렸던 눈물, 그것들을 씻겨주고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자. 국내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 근로자들과 다문화가족들을 향해서도, 과거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멸시 학대받았던 우리의 경험을 거울 삼아 그들을 돌보는 성숙한 자세가 필요하다. 이것이 해방 70년을 맞아 바로 이 땅에서 지구촌의 이상을 실현하는 길이다.


<2015-08-14> 경향신문


기사원문: [이만열 특별기고]해방 70년, 감격과 반성 그리고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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