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독서
해방 후 3년
-건국을 향한 최후의 결전
조한성 지음/생각정원·1만6000원
70년 전인 1945년 8월15일,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한반도는 식민통치로부터 해방을 맞이했다. 3년 뒤인 1948년 8월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고, 한달 뒤인 9월9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한반도에 들어선 두 정부는 극단적인 대결과 기나긴 체제 경쟁에 돌입했다. 그토록 염원하던 해방은 도대체 어쩌다가 기나긴 분단으로 귀결됐던 것인가?
한국 근대사 연구자인 조한성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해방 뒤 3년이란 기간을 ‘가능성의 역사’라고 말한다. 지은이는 해방 뒤 3년이란 무대에 7명의 민족 지도자를 주인공으로 올린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꾸려 자주적 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여운형, 한국 최고의 공산주의자로 꼽혔던 박헌영, 국내 우파 민족주의 세력의 거두였던 송진우, 항일무장투쟁의 전설적인 지도자로 꼽혔던 김일성, 미국의 적극적인 후원을 업고 급부상한 이승만, 독립운동의 상징적 존재로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김구, 중도우파를 대표했던 김규식 등이다. 한반도의 정치 지형이 지금처럼 굳어진 데에는, 불현듯 찾아온 해방 공간에서 이들이 숙고를 거듭하며 내린 선택들이 있었다.
물론 해방 뒤 3년이 가능성으로 가득한 공간은 아니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기에 미국과 소련의 분할 점령을 피할 수 없었고, 세계자본주의와 세계공산주의의 대립이 본격화하는 전초기지라는 환경 아래에서 이들의 선택은 모스크바 3상회의, 미소공동위원회 등을 통한 국제적인 주체들의 선택으로 끊임없는 제약을 받았다. 그렇지만 지은이는 “해방 뒤 3년의 역사는 우리 민족이 미·소가 만든 세계 질서와 끊임없이 충돌하며 우리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조금씩 방향을 바꾸고 변화를 일으키면서 하나하나 소중하게 만들어간 역사”라며 그 의미를 강조한다.
당시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다양한 이상이 들끓었지만, 지은이는 ‘민족통일국가의 수립’이란 목표에 무게를 싣는다. 지은이는 해방 뒤 민족통일국가의 수립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시점으로 정당통일운동과 정부통합이 벌어졌던 해방 뒤 넉달 기간을 꼽는다. 당시 ‘각정당행동통일위원회’라는 상설회의체까지 만들어졌을 정도로 정당통일운동의 열기는 뜨거웠다. 그러나 좌우익 모두로부터 조정 역할을 넘겨받은 이승만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우익 중심으로 운영하면서 정당통일운동의 성과를 연기처럼 날려버렸다. 그 뒤 좌우익을 대표하는 양대 정부인 중경 임시정부와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통일합작운동에 기대가 쏠렸으나, 정략적인 태도로 일관한 양쪽의 태도로 역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신탁통치 파동 뒤 한국민주당, 국민당,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이 시도한 ‘4당 합의’는 한국민주당을 비롯한 우익 정당들이 도중에 합의를 깨면서 수포로 돌아갔고, 여운형과 김규식이 주도했던 ‘좌우합작운동’ 역시 박헌영이 주도한 좌익 세력이 비타협적인 태도로 나오면서 결국 실패했다. 지은이는 미소공동위원회가 공전하면서 점점 분단이 예정된 미래로 찾아오고 있을 때, “우리 민족이 하나로 뭉쳐 합의를 종용했다면 미국과 소련이 자신들의 의견을 고집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해방 공간에서 미-소 대립이 만들어낸 규정력이 비록 크긴 했지만, 민족을 하나로 묶지 못했던 우리 스스로의 미약한 역량도 아쉽다는 것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2015-08-13> 한겨레
☞ 기사원문:
분단으로 귀결된 ‘가능성의 역사’